곽노현 교육감 사건후 김어준 총수가 나꼼수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진보 언론의 깨끗해보이려는 습성. 우린 너희와 다르다는 강박관념. 그렇기에 몸을 사린다고.
나중에 또 무언가가 나오면 좆되니까. 그런데 좀 좆되면 어떠냐.
우리를 위해서 우리 대신 싸워주던 사람이 힘들 때 힘이 되어주어야하는 거 아니냐.
라고요.
그 방송듣고 참 오랫만에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많이 공감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가장 미웠던 건 그를 죽음으로 몬 이 정부나 검찰이 아닌
살아계셨을 때 힘이 되어주지 못한 제 자신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김어준 총수는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역할을 아주 잘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동가적인 역할은 우리가 얻고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김어준 총수는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실제 나꼼수에서도 가슴이 있으면 투표를 하세요. 라는 말이 아주 자주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뜨거운 가슴이 너무 나아가다보면
기본적인 이성적 사고가 결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은 똑똑하지만 대중은 무식하다.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개인도 대중의 일원이 되어버리면 분위기에 휩쓸려버리고 감정적이 됩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진보진영의 유일한 인물이 진중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진보지만 이상주의자 성격이 강하기에 내편 네편을 구분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참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만 그게 이 사회가 그를 필요로하는 이유입니다.
대중이 감정적으로 나갔을 때 생기는 문제점은 황우석 사건이나 디워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그 뜨거운 가슴의 김어준은 이 두 사건을 모두 옹호했고
차가운 머리의 진중권은 이 사건을 모두 비난했습니다.
당시의 뜨거운 가슴을 가진 우리들은 모두 진중권을 욕했습니다.
그는 전두환 저리가라할 만큼 한국에서 가장 많은 욕을 먹은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뒤 우리들의 대부분은 진중권이 맞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가운 머리가 뜨거운 가슴만큼이나 중요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원론이 중요한 이유는 그게 진리는 아닐지라도 가장 정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원론을 잊지 않게 해줄 사람이 우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뜨거운 가슴을 가진 우리는 황우석 때처럼, 디워 때 처럼
또 다시 진중권을 욕하고 있습니다.
비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언론이 정부의 눈치를 볼 때 그 비판의 중요성을 인지한 딴지에서 나꼼수를 만든 것이고요.
그리고 그 비판의 대상은 나꼼수도 논외가 될 수 없습니다.
나꼼수를 한 회도 빠지지 않고 들었고 매주 목놓아 기다리는 애청자인 제 입장에서
진중권의 비난이 (사실 관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그 자체로 너무 좋았습니다.
브레이크가 없어보이는 인기 때문에 진보진형에서 그 누구도 감히 비난은 커녕
조금의 비판도 내기 힘든 분위기였던 나꼼수에 처음으로 찬물을 끼얹어 조금이나마 식혀주었기 때문입니다.
진중권이 나꼼수를 비난한 첫 진보 인사인 건 나꼼수에겐 조금은 잔인했지만
진중권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인물은 반드시 썩습니다. 진보가 비판의 수용을 거부하면 이미 진보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도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게 됩니다.
뜨거운 가슴의 김어준, 차가운 머리의 진중권.
어떤 것이 지금 더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둘 중 어떤 것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지만, 기분 나쁘고 짜증나지만, 우리는 모두 안고 가야합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봤다.
 
'영화 하나가 잘만들었니 못만들었니로
티비 토론을 할만큼 세상에 큰 논란이 없었던
그 때가 그립다.'
대통령부터 정치권, 헌재까지..
모든 사건, 모든 발언 하나하나가 비상식적이기만하고
민주주의와 다양성이라는 단어들이 너무나 가볍고
가치가 없게 느껴진다. 
이 나라엔 진보와 보수가 있는 게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만 남아 있다는 이 느낌이
군사정부를 겪지 않았던 내 세대에겐
너무 낯설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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