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인가 나이도 세지 않고 기념일 같은 것도 전혀 기억하지 않고 살고 있어서 처음 만난 날이 언제인지, 첫키스가 언제인지, 결혼하기로 합의한 날이 언제인지, 첫섹스가 언제인지, 같이 살게 된건 언제인지 등등 많은 것들이 그저 가을쯤? 겨울 아닌가? 같은.. 정확하지도 않은 계절로만 기억되어 있을 뿐인지라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남은 기념일은 서류에 기록된 날짜뿐이다.
여튼 만으로 꽉 채운 서류상 4주년.
대통령도 이 정도 하면 레임덕에 시달리는 시기인만큼 우리 부부는 지난 날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보람찬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결혼전 남발했던 공약을 점검하는 시간을 마련해보았다. 이 글에서는 그 중 대표 공약 하나를 점검 결과와 함께 공유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여기에 타산지석으로 세우고자 한다.
공약 넘버 원 : 너랑 평생 10만번 섹스하겠어.
이것은 하루에도 눈이 맞으면 몇번이나 등산을 하던 우리 부부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공약이다.
나는 성격이 매우 집요하여 연애할때부터 날짜와 관계 여부, 횟수를 스프레드시트에 입력하고 전체 횟수를 자동 합산하는 함수를 통해 관계 횟수를 파악하는 파일을 가지고 있는데(아 이 기록을 보면 첫섹스날은 알 수 있구나) 나의 이 미친 집요함을 보고 당시 남친이었던 남편이 화르륵 불타오르며 기록 달성에 열을 올리면서 나온게 바로 이 공약이다.(하여간 단순한 남자다)
덕분에 연애 및 결혼 초기에는 관계1번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로 많이 투닥거렸다. 남편은 마치 심판에게 항의하는 운동선수처럼, 끝도 없는 토론을 통해 그날의 관계를 어떻게든 한 번으로 등재하고자 토론 주제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사정이 완료되어야 1번으로 보는 것인가, 오르가즘 도달 횟수로 볼 것인가,
멀티 오르가즘은 한번인가 아닌가.
잠시 넣어만 본 경우에는 한번인가 아닌가
충분히 애무하고 무르익었으며 이른바 유사 성행위로 둘 또는 일방이 만족했지만 삽입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한번으로 쳐주는가 아닌가
혹시 쓰리썸을 하게 된다면 이건 두번인가 한번인가 등(쓰리썸의 성별 구성 방법과 정의가 서로 달라서 하지 않기로 하고 마무리)
여튼 정신적 육체적 교감을 한번으로 하겠다는 아리송한 기준을 세운 이래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합산할 결과와 각 회마다 간단한 메모를 덧붙인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를 최근 서류상 결혼 4주년을 맞이하여 같이 열람, 분석하게 되었는데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최근까지(공약 점검시까지) 한 섹스는 총 1055회로 집계되었다.
이 공식기록은 남편의 공약인 10만번에 한참 못 미치는 숫자로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겨우 1%달성) 이것은 4년의 결과가 아니라 연애시를 포함한 9년의 결과인지라 우리 부부는 몹시 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우리 부부가 앞으로 40년을 더 산다고 가정했을때(이미 넉넉한 가정) 전체 일수는 14,600일+ 4년에 한번씩 추가1일 총 10일 = 14,610일이고 공약인 10만번 섹스를 채우기 위해서는 40년을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평균 6.8회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매일 세번 먹는 밥도 챙겨먹기 힘들어서 두끼만 먹고 사는 우리 부부로써는 당장 오늘부터 시작해도 시간 확보 및 체력 확보가 어렵고, 어떻게 지금 당장은 모든 일을 그만두고 노력해본다고 쳐도 우리 부부가 70대, 80대가 되어도 같은 추세로 계속 해야 한다는 미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매일 하루에 6번이나 7번쯤 섹스하는 노부부가 있다면 기네스에 등재되거나 다큐를 찍어야 할 판. 결국 남편은 깊이 고개 숙여 사과하면서 공약 축소를 선언하였다.
"정말 미안해. 난 정말 모자란 남자야. 하루 6번쯤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는게 고단해서 아무래도 어렵겠어. 십만번을 만번으로 줄이면 어떨까. 어쩔 수 없는 공약 축소지"
"9년동안 천번 했는데 이런 패턴으론 만번으로 줄여도 앞으로 90년이 걸려"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지금보다 2배 열심히 하면.."
"45년? 당신이 90이 되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을까? 난 자신 없는데?"
"그럼 5천번?"
"지금 패턴으로 했을때 5천번도 앞으로 36년이네"
"세상에!!! 우울해졌어. 앞으로 내게 남은 섹스가 겨우 몇천번이거나 혹은 그거보다 적다니!"
"첫 1년 신혼에 할때마다 사탕을 모으고, 남은 결혼생활동안 할때마다 그 사탕을 까먹으면 그걸 다 못먹는단 얘기가 있지"
"난 끝났어. 내 인생은 끝장이라고!!"
앞으로 하루에 한번 해도 겨우 만번 남짓이며, 90이 되어도 이틀에 한번한다 쳤을때 겨우 오천번 따위의 복잡하지도 않은 셈을 계산기로 두드리면서 남편은 좌절하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고심끝에.
"키스도 쳐 줌?"
"당신이 카운트할거면 쳐줄게"
심하게 우울해진 남편을 달래고 키스는 안쳐주기로 하고(자긴 집요하지 않아서 카운트할 자신이 없단다) 섹스 3천번으로 공약을 축소하기로 했다. 사실 3천번 조차도 남편의 수컷으로서의 허영심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하게 우울해하는 남편이 더 충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풋 십만번이라니. 십만원만 생각하면 십만이 별거 아닌것 같았는데 새삼 십만은 얼마나 큰 숫자인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죽지 않으면 십만 번을 달성할 수 있을까"
"죽지 않을 뿐더러 늙지도 않아야 가능하겠지"
늙지도 죽지도 않는 뱀파이어라고 치고.
그렇다고 해도 한사람과 십만번의 섹스를 하는건 여간해선 이루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 역시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죽고.. 늙어가기 때문에 한사람과의 결혼 생활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다면 우린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당장 죽더라도 억울하지 않게 오늘은 오늘의 섹스를 하자.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웃으면서 살자"
결국 죽음과 노화를 견뎌야 하는 나약한 인간인 우리가 서로에게 내세울 수 있는 공약이란 겨우 이 정도의 결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