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빈 플란팅가의 '신과 타자의 정신들'을 읽고 쓴 글입니다. (알빈 플란팅가는 미국 기독교 철학계의 대부입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정당성 문제, 신의 전능성과 악의 양립성 문제, 필연성에 대한 논리의 문제 등 기독교 철학에 관련한 다방면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 하고 있습니다.)
'신이 존재하는 가' 가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한 유명한 3가지 논증인 우주론적, 존재론적, 목적론적 논증에 대한 문제점을 이 책에서 모두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인 악과 자유의지, 검증 주의 및 여러가지 반신학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그 논리가 빈약함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인가?' 가 초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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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타자의 정신들’에서 알빈 플란팅가는 신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증거적 논증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적 논증인 우주론적, 존재론적, 목적론적 논증에 대한 반론도 이 책에 실려 있다.) 다만 신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답으로, 유비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플란팅가는 신에 대한 믿음을 타자의 정신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타자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인식론적인 증거들을 갖고 있지 않다. 타인의 정신에 대해 인식론적 입증이나 증거 없이 타자의 정신을 존재하는 것을 합리적인 믿음이라 여긴다. 여기서 정신의 한 가지 예로 ‘통증’이 등장한다.
(a) 나는 통증을 느끼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b) 내가 느끼지 못하는 어떤 통증이 있다.
(c) 종종 나의 신체의 어떤 부위는 통증이 없다.
(d) 나의 신체에는 없는 어떤 통증이 있다.
(e) 나의 신체 부위의 통증 행위에 수반되지 않는 어떤 통증이 있다.
(f) 나는 나의 신체의 통증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다.
(g) 종종 어떤 사람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통증을 느낀다.
(a)~(g)가 알빈 플란팅가가 통증에 대해 설정한 명제들이다. (각각의 명제에 대해서도 논리적 추론을 행한다. 그것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9~10장의 주된 내용이다.) 통증의 감각은 직접 관찰하거나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다. 통증의 감각은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타자는 우리의 통증을 그것에 수반한 통증 행위로서 ‘간접적’으로 관찰하고 추측할 뿐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도 타인의 통증에 대해서 절대로 느낄 수는 없지만, ‘본인의 경험이나 통증의 감각과 그에 따르는 통증 행위’라는 빈약한 증거만을 가지고도 타인이 통증을 가진다는 믿음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어떤 인식론적 증명도 요구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g)다. 종종 어떤 사람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통증을 느낀다. 흔히 말하는 출산의 고통에 대해 남자들은 직접적으로 느껴보지 못한다. 심지어 같은 여성이라도 본인의 출산의 통증이 타인의 통증과 완전히 같다는 확신을 가지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출산에는 통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
통증은 타자의 정신의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저 고통을 다른 말로 바꾸어 논의를 확대하자면 감동, 슬픔 등 감정적인 부분으로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타자의 슬픔에 대해서 결코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심지어 내가 절대로 느껴보지 못한 특정한 슬픔을 타자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타자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지 않고, 인식론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타자의 정신에 대한 증거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뿐이다. 우리는 타자의 정신에 대한 믿음을 이런 빈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어떤 실증적, 인식론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믿음도 정신적인 부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증거도 오로지 개개인이 가진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자의 정신에 대한 인식론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신에 대한 믿음에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타자의 정신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이 타자의 정신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신에 대한 믿음도 그러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타자의 정신에 대한 믿음의 증거는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며, 특정 타자는 본인이 전혀 느끼거나 인식하지 못한 정신적인 활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자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것을 타자의 정신에 대한 유비적 논증이라 부른다.
(a) 우리는 타자의 정신에 대한 어떤 객관적 증거나 믿음 없이도 우리 본인 스스로의 정신 활동에 비추어 타자가 정신을 가진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b) 특정한 타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정신적 활동을 가지고 있다.
(c) (b)에 등장한 특정한 정신적 활동이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고 타자의 정신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이라 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도 합리적이다.
책의 역자가 주장했듯, 알빈 플란팅가의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의 대상이 특정 종교의 창조주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플란팅가의 논증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한 것이지 그 것이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라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즉, 이 논증은 기독교적 변증론이 될 수는 없다.
알빈 플란팅가의 논증을 요약하자면, 타자의 정신에 대해 우린 어떤 합리적인 이유나 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정신에 대한 믿음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면 신에 존재에 대한 믿음 역시 합리적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타자의 정신에 대한 믿음과 신의 대한 믿음이 같은 것인가에 대한 논증은 진행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