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6년생이다.
올해 31살이 되는 그냥 그저그런 남자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적의 기억은 술에 취해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폭행을 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밖에 없다.
물론 나 자신의 한정된 틀 안의 기억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릴적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해 지금 기억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술먹고 어머니와 형, 누나 그리고 나를 때리는 것.
초등학교 3학년. 내가 10살이 되던 해 우리는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를 뒤로하고 다른 가족들은 타도시로 이사를 왔다.
그때부터 우리가족의 전쟁은 시작됐다.
형과 누나들은 어린나이에도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야 했다. 그때 형과 누나들의 나이라고 해봐야 고작 17, 15, 12살에 불과했다.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하거나 초등학교에 다녀야할 형과 누나가 일을 한 것이다.
단지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그때의 나는 10살이었기에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나 자신이 창피했을 뿐...
14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릴적의 기억 그대로 매일 술만 먹다가 간경화증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가족 모두가 고향으로 내려가도 난 가지 않았다. 형이 가야 한다고 때려도 난 차라리 맞아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다고 버텨서 결국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친가쪽 친척들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장손이었기에 남아 있는 선산, 논, 밭 모든것을 자신들이 처리하고 제사만 장손이라는 이유로 남긴체 친척끼리 돈 문제는 깨끗해야 한다면 앞으로 손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나 자신의 처지를 어느정도 이해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입학하고는 공부보다는 돈을 벌어야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족들 모두가 일을 해야 했기에 한달에 한번 모여 밥을 먹을수 있으면 그나마 운이 좋은 달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때 대학은 꿈도 꿀수 없었다. 대학 등록금을 낼 바에야 차라리 그돈을 아껴 사글세에서 전세로 집을 옮기는게 더 좋은 때였다.
고등학교 졸업후 일을 했다.
걸어서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매일 걸었다. 군대에 가서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하사관을 지원했다. 하사관 생활을 하면서도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차비를 아끼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하사관생활을 하다 부대에서 사고가 나서 제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대후 무엇을 할지 막막했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벌어놓은 돈이 있기에 그 돈을 가지고 제대를 했다.
나의 제대와 함께 가족들이 모은 돈으로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그날 5년만에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며 울었다. 이게 우리집이다. 다른집에 돈을 내고 사는 사글세나 전세가 아닌 우리집이다. 우리가 번 돈을 산 우리 집이다!!!
집을 사서 어느정도 집안 살림이 나아졌다. 어머니의 나이 어느덧 56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일을 하신다.
식당에서 설겆이를 하시고 파출부도 하신다. 어머니를 비롯해 형이나 누나 그리고 나 모두 돈에 미쳤다.
아니, 미칠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으면 인간으로 취급받을수 없으니까...
두명의 누나들이 모두 결혼을 했다. 매형들이 부자는 아니지만 서로 사랑한다면 잘 살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군대에서 제대후 여러가지 일을 했다.
장사도 해보고 직원으로 일도 해봤다. 장사를 하면서 망해보기도 했고 한철 장사로 돈을 만져보기도 했다.
가족 모두 열심히 일을 한 덕인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중산층이라고 자부할 만큼 됐다.
그때서야 연락이 없던 친척들에게 하나둘씩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웃으며 그들을 반겼지만 난 그들을 반길수 없었다. 아니 반기는게 아니라 그들을 증오한다. 돈이 없을때는 연락해도 욕을 하던 사람들이 어느정도 먹고 살만하니 먼저 연락하는 것을 보니 친척이나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귀다. 오직 돈을 보는 마귀...
할아버지와 할머니 합동 제사로 친척들이 모였을때 친척들에게 욕을 했다. 당신들은 친척들이 아닌 마귀라고...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께 맞았다. 그리고 난 성인이 된후 처음으로 밤새 울었다. 그날 이후 친척들은 지금까지 집에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두명의 누나들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조카들을 낳았다. 난 조카들을 위해 할수 있는 있는 일은 뭐든지 해준다. 나 스스로는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몇시간을 걸어도 조카들을 위해서라면 아낄수가 없다. 나 자신이 어릴때 너무 힘겨웠기에 조카들이나마 돈에 구애받지 않도록 뭐든지 해준다.
내 나이 이제 31살.
형의 나이 38살. 형은 고교 중퇴다. 고등학교 1학년때 학교를 중퇴하고 지금까지 오직 일만 했다. 지금도 한달에 한번 쉬면 운이 좋은 편이다. 나는 형보다 조금 나은편이라 주말에는 쉴수 있어 주말에는 알바를 뛴다. 알바를 뛴돈도 어느정도 모여 이제는 제법 큰 돈이 됐다. 가끔 통장을 볼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올해가 어머니 환갑이다.
어머니의 평생소원은 나와 형이 결혼을 해서 며느리를 보시는 것이시다. 나의 나이는 이제 31살. 하지만 형의 나이는 벌써 38살이다. 우리가족이 아는 형은 17살때부터 지금까지 21년이라는 시간동안 오직 일밖에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족만이 알뿐 다른 사람은 전혀 알아보지 않는다.
선을 봐도 고교중퇴, 별 볼일 없는 직업이라는 이유로 항상 퇴짜를 맞는다. 몇번의 선을 본 후 형은 더이상 결혼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어머니나 내가 베트남이나 조선족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도 그저 고개를 저울뿐, 형은 이미 결혼에 대해 미련을 버린것 같다. 아니 어쩌면 과거 어릴적의 트라우마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나역시 마찬가지.
170cm의 키에 평범한 외모. 고등학교 졸업. 그저그런 직업. 친구들의 소개로 몇명의 여자들을 만나봤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사귀어 본적이 없다. 나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들이 보는 것은 내가 아닌 나의 외모와 나의 학벌, 그리고 돈 뿐.
하지만 그런것에 대해 별로 기분 나쁘거나 실망하지는 않는다. 나 스스로 결혼에 대해 이미 포기를 해서 인지 몰라도 나의 목표는 오직 돈일 뿐이다. 어릴적의 기억이 너무 선명한 탓인지 난 나의 피를 잇는 후세를 남기고 싶지 않다. 아버지를 이은 나의 피를 잇는 나의 후손을 남긴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 세상을 불행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의 소원이자 목표은 한가지다.
돈, 돈을 버는 것.
나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조카들 모두가 돈에 얽매이지 않고 살수 있을만큼 벌어서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저 행복하게 살수 있을만큼 돈을 버는 것이 나의 인생에 남아 있는 목표이다.
그리고 그 목표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것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해도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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