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글 하나 퍼서 던져주고...
이하 부분적으로 편집 펀글
박원순은 한마디로 인성이 마비된 교활한 도덕타락자이라 본다. 어떤 사안에 대해 말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를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나는 저번에 대형아파트 얘기가 나왔을 때 그가 대꾸하는 말을 듣고 단번에 알아 차렸다. 진실은 말 한마디로도 백만개의 허위를 뒤집을 수 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일관성이 없으며 한 껍질을 벗기면 다른 색깔이 나온다면 그것은 절대 진실일 수 없다.
진실은 고요하고, 수미가 쌍관하고, 깨끗한 몸체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중략)....나는 박원순의 학교생활에 대해 일별해볼까 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교활함이 관찰된다.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4가지는 뭘까. 병역,취업,결혼도 중요하지만 이 3가지에 선행하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진학이다. 특히 대학입학이 중요한 데, 그것은 성인이 되는 시점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개인의 인생관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박원순은 1956년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1955년생이라 한다. 그가 재수를 해서 경기고에 들어 갔고, 경기고 입학 후에도 1년을 쉰 끝에 실제 21살이던 1975년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진학한다. 정상 진학생보다는 3년이 늦은 것이다.
그의 성향으로 볼 때 동기들보다 3년이나 늦은 것에 대해 뭔가 더 빠른 사회적 진출욕구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전공선택과 사회진로를 보면 증명된다.
그는 서울대 사회계열로 진학했다고 한다. 사회계열에는 정치학과, 법학과, 외교학과 등 소위 말하는 출세의 지름길인 과목이 속한 계열이다. 그러나 그는 입학 3개월만에 제적된다. 시위대에 우연히 휩쓸려 구속이 된 끝에 서울대 뱃지를 잃게 된 것이다. 당시 시위로 제적된 서울대생들은 많다. 하지만 누구도 다른 학교로 진학하지 않았다. 제적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군입대를 하든지 사회생활을 했다. 그들은 나중 모두 복적되었다. 박원순은 달랐다. 재수를 해서 단국대에 들어 갔다. 1976년, 그의 나이 22세때다. 그것도 사학과에.
여기서부터 박원순의 인생관이 나온다. 박원순의 인생을 한마디로 축약하라면 '블루오션 개척과 이용해먹기'라 할 수 있다. 이 원칙은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관통하는 기본준칙이다. 경기고 출신에게 단국대는 완전 블루오션이다. 사학과는 순수학문의지의 표상이다. 박원순은 블루오션에서 이런 순수의 깃발을 걸어 놓고 엄청난 특혜를 누렸을 것이다. 그것의 입증은 나중에 된다.
단국대에도 법학과나 정치외교학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외면하고 사학과를 택했다. 불과 1년 전에 서울대 사회계열을 선택해서 출세를 다짐한 자가 1년만에 완전히 인생설계가 바뀐 것이다. 과연 구속과 제적이 인생관을 급격하게 바꿨을까?
그러지 않다는 것은 그가 단국대 입학 직후부터 국가고시(아마도 사법고시가 최종목표였을 것이다)준비를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그가 단국대 사학과 입학한 진실이 드러난다.
그의 속마음을 그려 보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어차피 사법시험을 통해 법조인으로 출세를 하려면 전공이 무슨 관계가 있나...고시는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닌가...서울대란 뱃지가 떨어져 나가고 언제 복적이 될 지도 모른다. 고시를 공부하려면 입영연기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대학재학이 필수다. 부선망독자로 방위로 빠질 수 있는데, 시위전력으로 현역 입대의 위험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인생설계가 완전히 무너진다... 서울대 복적을 기다릴 순 없다. 무조건 대학교에 적을 걸어 둬야 한다. 돈도 없는 마당이니 명문고 출신들을 가장 목말라하는 아무 대학에 진학하자. 장학금도 최고수준으로 줄 것이고 결석도 관대하게 허용될 것이다. 법학을 선택하면 금방 뾰록나니 순수학문을 선택하자..그리고 사법시험 준비에 매진하자...중퇴하더라도 손해 볼 일이 없지...단국대는 무슨 개뼉다귀야... 사학전공은 무슨 얼어 죽을...먹고 차 버리면 되지...'
박원순은 고시 준비를 하는 가운데 입학 다음 해인 1977년 고향에서 8개월 방위생활을 하게 된다. 23세때 일이다. 용케 방위로 빠지게 되었고, 방위기간동안 고시공부를 계속 할 수 있다는 좋은 여건을 놓칠 리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978년 8월, 나이 24세 때 고시공부 3년만에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고, 1979년 강원도 정선등기소장에 부임하여 1여 년간 근무했다. 그는 25세에 이미 '영감(令監)'소리를 들으며 권력의 단맛에 취했다.
1980년 1월 서울대는 제적학생들을 복적시켰다. 그러나 영감님 박원순은 1학년부터 시작해야 하는 서울대 신입생에 입맛을 다실 리 없었다. 무엇보다 하고 있던 사시 준비에 지장을 받는다. 그래서 그 길로 영원히 서울대와 이별했다.
영감을 하면서 그는 사법고시 준비를 계속했다. 법원사무관시험 합격자에게 사법고시는 따논 당상이다. 1980년 8월, 드디어 박원순은 몽매에도 그려온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된다. 그의 나이 26세때다. 연수기간 2년을 보내고 박원순은 1982년 8월 검사로 발령 받는다. 28살의 박원순 검사가 되는 순간이다.이상 박원순의 20대를 여기저기 나와 있는 자료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박원순의 학력이 완전중구난방이다. 인터넷, 종이신문, '원순닷컴'이 모두 틀리다. 자신의 사이트 원순닷컴을 보자. 단국대 입학/졸업이 1979-1985로 나온다. 1975년도 서울대 제적부터 4년이나 지나 단국대에 들어 갔다는 얘기다. 원순닷컴 이전에는 단국대 입학만은 1976년으로 일치되어 있었던 게 이렇게 바뀐 것이다. 졸업도 박원순이 사업연수원을 졸업하고 검사 발령을 받은 그 다음 해인 1983년으로 알려 졌으나 선거를 앞두고 만든 자신의 사이트에서는 이렇게 바뀌었다. 어떤 프로필에는 1976년 입학, 1979년 졸업이라고도 되어 있다. 6학기만에 졸업했다는 말이다.
왜 이런 혼란이 일어 날까? 박원순이 사실대로 말하면 단국대에 적만 걸어 놓고 수업 출석도 하지 않은 채 밖에서 고시공부, 병역, 공직생활을 한 게 뾰록나기 때문이다. 블루오션에서 온갖 단물과 특혜를 빼먹고 차버린 자신의 행각이 드러나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이런 치졸한 술수를 부리는 것이다. 진실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앞뒤가 안 맞고 여기와 저기가 틀린 것은 조작과 허위임을 반증한다. 아마 박원순은 이런 문제로 질문을 하면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상의 오기일 뿐 다른 뜻이 없었음을 둘러대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것이다.
박원순의 행적에 대해서는 학력위주로 일별해 봤지만, 그의 허위와 가식, 이중적 면모는 1983년 변호사 생활 시작 후 1990년 유학을 갈 때까지 약 6-7년 지속된 변호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변호사 생활에 대해서 그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다닌다. 그의 맨토는 조영래 변호사라 한다. 조영래 변호사야 말로 우리나라 인권변호사의 전설이다. 박원순은 제 입으로 자신의 멘토와 같이 1980년대를 오로지 인권변호사 일에만 매진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재산 얘기가 나오면 변호사 생활 할 때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인권변호사가 아니든가 변호사로 번 돈이 아니든가...
나는 박원순 만큼 지능적인 가면극의 달인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에게 서울시장 자리가 돌아간다면 우리사회의 양심과 정의는 실종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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