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월남전에, 그것도 두 번이나 갔다오셨거든요. 다행히 살아 돌아 오셔서 제가 태어났어요.
일곱살 되던 해 1월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해 10월에 박정희가 죽었어요. 대통령이 죽었단 소식에 엄마랑 형이랑 저랑 손 붙잡고 울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안 흘린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흑백테레비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어깨에 번쩍번쩍 별을 달고 나와 지도를 짚어가며 북괴의 지령을 받은 폭도들을 진압했다고 떠들더군요. 그무렵 흑백테레비에는 번쩍번쩍한 아저씨 말고도 똘이장군이라는 소년이 맨몸으로 총을 든 늑대무리와 거대한 돼지를 쳐부수는 만화도 나왔어요. 그래서 저는 김일성이 거대한 돼지이고 북한 인민군은 머리에 뿔 달린 늑대들인 줄 알았어요.
시간이 흘러 저도 중학생이 되었어요. 그사이 흑백테레비는 칼라테레비로 바뀌고 번쩍번쩍 아저씨는 대통령이 되었어요. 여름방학 때 집에 온 대학생이 된 큰형이 이상한 소릴 하는 거예요.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며 대통령 각하를 욕하는 거예요. 저는 큰형이 빨갱이가 된 것 같아 무서웠어요.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을 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대신 뽑아주는 게 당연하다고 했는데, 큰형은 대통령은 우리가 직접 뽑는 게 맞는 거래요.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이 도탄에 빠진 우리 국민을 위해 구국의 결단으로 혁명을 일으켰다는데 큰형은 군인이 나라는 안 지키고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욕했어요.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라서 처벌할 수 없다고 배웠는데, 큰형은 군인이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건 범죄랬어요. 저는 조만간 형 머리에서 뿔도 나고 늑대로 변할까봐 무서웠어요. 1987년 6월이 되었어요. 칼라테레비에선 대학생 형, 누나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데모만 하는 게 나왔어요. 자꾸 누구를 살려내래요. 어느날엔 서울시청 앞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대학생 형, 누나들 뿐 아니라 양복 입은 아저씨들도 많이 보였어요. 그리고 주변 빌딩에서 휴지를 막 던졌어요. 나는 변소에 가면 공책 찢어서 비벼서 닦는데, 그 아저씨들은 휴지 아까운 줄도 모르고 막 던졌어요. 그러다가 부처님 귀 같은 아저씨가 무슨 발표를 했어요. 그리고, 많은 것이 변했어요. 대통령은 똑똑한 사람들이 대신 뽑아줘야 한다던 선생님이 드디어 대통령을 우리가 직접 뽑게 됐다고 기뻐하셨어요.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라던 선생님이 군인은 나라 지키는 일 외에 권력을 탐해서도 안 되고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댔어요. 어느날엔가는 아침에 싸이렌이 울리고 묵념을 하래요. 독재정치에 반대한 학생들이 떨쳐 일어나 의거를 일으키고 나쁜 대통령을 쫓아낸 날이랬어요. 그때 4.19를 처음 알았어요.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기 시작했어요. 우리를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라고 가르치고 대해주던 선생님들이었어요. 그 선생님들이 쫓겨나면 학교에는 무서운 선생님들만 남아요. 비싼 리바이스 청바지 입었다고 허벅지가 터질 정도로 때리고, 수업시간에 쓸데 없는 질문 한다고 코피가 나도록 때리고, 캐비넷에 회초리 부터 각목에 야구배트까지 종류대로 걸어놓고 학생들을 쥐어패고 다니는 선생님들만 남는게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우리 선생님들 쫓아내지 말라고, 좋은 선생님들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선생님들과 함께 싸웠어요. 전교조는 그렇게 태어났어요. 우리나라를 좌경화 하려고 한 게 아니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가르치려고 한 게 아니고, 그저 학생들을 사람으로 보고 인격적으로 대하자고, 아이들은 시험점수 생산해내는 기계가 아니라고, 아이들을 정답 맞히는 기계로 만들지 말자고 시작한 거예요.
대학생이 되었지만 성적 맞춰 온 학과라 공부에 뜻이 없었어요. 직업군인이 되기로 하고 부사관으로 갔어요. 그사이 대학 동기들은 군대도 갔다 오고 복학해서 졸업할 때가 됐어요. 4년제 대학교만 졸업하면 대기업에서 어서옵쇼 할테니 큰 걱정은 없었어요. 그런데,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어요. 나라에 돈이 없어서 부도가 났다는 거예요. 절대 망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대기업들이 날마다 몇개씩 무너졌다는 뉴스가 온나라에 가득했어요. 졸업하고 취직했던 91학번 선배들은 회사가 없어지거나, 채용이 취소되거나, 발령이 안 나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 동기들이 졸업할 쯤엔 아예 신규채용을 안 했어요.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학교에 남았어요. 학교에 남을 수 없었던 친구들은 전공과 아무 상관 없는 곳으로 갔어요. 그래서 저희 동기들 중엔 석,박사도 많고 보험 영업, 자동차 판매 영업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토목기사 자격증을 가진 친구들이 보험 팔러 다니고 자동차 팔러 다녀요. 그런 저희가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 있겠어요? 그 치열했던 삶을, 하루아침에 좌파라고 매도하고 빨갱이라고 무시하는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우리가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어요? 일하다가 죽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끼리 연대해서 만든 노조를 두고 귀족노조라며 깎아내리는 국민의힘을 저희가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어요?
저희는 민주당 콘크리트가 아니에요. 그때로 되돌리고 싶지 않은 거예요. 군인이 총칼로 권력을 찬탈하고, 헌법을 자기들 마음대로 바꿔 독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말 안 듣는다고 붙잡아다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하던, 그 야만의 시대로 되돌리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막걸리 마시다 울분에 차서 대통령 욕 한마디 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시키는 그 폭압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학생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가르쳤다가 학교에서 쫓겨나는 선생님들을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미국산 수입 쇠고기에서 뼛조각이 발견 됐다며 우리 국민들을 광우병으로 다 죽일 거냐고 선동하더니, 대통령 바뀌자마자 좌파들이 광우뻥 선동한다고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는 조중동 같은 쓰레기를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뼈가 바스라지도록 일하고 돈도 못 받아도 어디 하나 하소연 할 데도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우리 자식들이 그런 정글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반대하는 거예요.
페미니즘이 그렇게 싫고, 여가부가 그렇게 불만이면 남성부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될텐데, 여가부폐지 한마디에 홀려 대한민국의 인권을 여러분 스스로 후퇴시킨 거예요.
윤석열이 잘못하면 끌어내리면 된다구요? 여러분이 윤석열 끌어내리자고 싸울 때, 과연 우리 세대들이 여러분과 연대를 해줄까요?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눈물로 호소한 걸 두고 꼰대라고 손가락질 받은 저희가 기꺼이 여러분의 어깨에 손을 올려줄까요? 민주당 콘크리트라고 무시 당하고 대깨문이라고 조롱 받던 저희들이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의 손을 잡아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