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을 하루 남겨둔 12월 30일 오후 5시 30분. 땅거미가 내려 앉은 텅빈 공장은 을씨년스러웠다.
끝내 '콜라독립'의 꿈은 무너져 내렸다. 지난 98년 코카콜라의 아성에 맞서 '콜라독립 815'를 생산하며 한때 콜라시장 점유율을 14%까지 끌어올렸던 곳. 대전 대덕구 신탄진역 부근의 범양식품 본사 공장은 지는 해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공장 곳곳엔 '콜라독립'의 흔적이 남아 있다. 1층 로비에는 '815콜라'를 비롯해 이곳에서 생산한 수십 종류의 제품이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공장 내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2층 복도로 올라가 보면 콜라 제조공정에 쓰인 기계들이 육중한 몸짓으로 놓여 있다. 기계 한편엔 탄산수로 쓰였을 법한 재고품도 수백 상자 넘게 그대로 방치돼 있다.
본사 출입구에는 아직도 '범양식품(주) 직장 민방위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낡은 공장 지붕에 서 있는 '콜라독립 815'란 대형 옥외 간판은 여전히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콜라'와는 상관없는 새 주인을 맞았다. 지금은 한 중견 건설업체가 이 부지를 사들여 공구상가로 변신시킨다는 계획아래 한창 분양 중이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꿈을 못 이루고 묻히고 마니 씁쓸하네요."
이재한 전 범양식품 영업관리팀장은 공장 출입구 옆에 놓인 고장 난 '815콜라' 자동판매기 앞에 서서 잠시 회한에 젖었다. 그는 91년 범양식품에 입사해 지난해 3월 회사가 파산선고를 받던 그날까지 10여 년간 영업 일선에서만 근무했다.
지난 98년 '콜라독립'을 외치며 국산콜라를 생산해 한 때 콜라시장 점유율을 14%까지 끌어올린 곳. 그래서 코카콜라와 '맞짱'을 떴던 곳. 하지만 범양식품은 얼마 전 결국 파산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코카콜라와 '맞짱' 떴던 곳... 그런데 왜?
▲ '815콜라'
ⓒ2006 오마이뉴스 남소연
범양식품은 원래 지난 73년부터 영남과 충청권에서 코카콜라 생산과 판매를 담당했다. 이 회사는 코카콜라가 국내 진출 초기 반미 감정에 따른 소비자들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 국내 업체와 손을 잡은 '보틀링파트너'였다.
일반적으로 코카콜라가 해외 시장을 공략할 때는 범양식품처럼 현지 업체를 통해 시장에 진입한다. 그 뒤 어느 정도 소비자들의 입맛을 길들이고 난 뒤에는 보틀링파트너에게 계약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하면서 결국 보틀링파트너를 인수한다.
이 같은 코카콜라의 영업 방식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것이 범양식품이다. 당시 코카콜라 보틀링파트너에는 범양식품 외에 두산음료 우성식품 호남식품 등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96년 국내 보틀러 3사가 한데 합쳐 한국코카콜라보틀링(주)를 세웠는데, 범양식품은 피인수를 거부하며 자체적으로 '815콜라' 생산에 나섰다.
그렇다면 범양식품은 왜 코카콜라의 인수 제의를 거절하고 험난한 '독립의 길'로 접어든 걸까. 우선 코카콜라의 인수가격이 문제였다. 20여 년간 코카콜라의 현지 파트너로 있으며 사실상 코카콜라의 국내시장 진입을 이끌었지만 이에 대한 보상보다는 오히려 터무니없이 낮은 인수 가격을 코카콜라가 내세웠다는 것.
범양식품이 인수 제의를 거절하자 코카콜라는 95년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범양식품이 이에 맞서 법원에 계약해지 취소 소송을 냈다. 법원이 범양식품의 손을 들어줌에 따라 범양식품은 2년간 계약해지 유예기간을 갖게 됐다. 범양식품은 이 기간 동안 자체 생산계획을 세우고 '독립의 꿈'을 키우게 됐다.
가격경쟁력·유통망·국민정서, 세가지 경쟁력
무엇보다 탄탄한 거래처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범양식품을 자체 생산의 길로 이끌었다. 이 회사는 73년부터 코카콜라 생산과 판매를 해오면서 대전·충청과 대구·경북권에 막강한 영업기반을 구축해 놓았다. 음료시장은 유통망을 장악하고 시장에 얼마나 많은 제품을 공급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 범양식품은 이 같은 기반을 이미 갖추어 놓은 셈이었다. 이재한 전 팀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20년 넘게 한 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대리점과의 친밀도가 매우 강했습니다. 국산 콜라를 내더라도 이 지역에서만큼은 새로 거래처를 뚫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음료시장에선 이 정도만 갖춰도 충분히 승부가 가능합니다."
여기에 가격 경쟁력에서 자신감이 있었다. 콜라 생산비용을 낮춰 더 싼 가격에 거래처에 공급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과거에는 코카콜라에 로열티를 주고 원액을 사서 제품을 공급했지만 자체 생산할 경우 로열티를 줄여 그만큼 공급 단가를 낮출 수 있다. 실제 초기 '815콜라' 출시 당시 국산콜라가 1.5리터 기준으로 1상자(12병) 당 1500~2000원 가량 값이 쌌다.
또 하나 우호적이었던 것은 국민 정서였다. 당시는 나라가 막 IMF를 통과하며 때 아닌 국산품 애용과 '금모으기 운동' 등 애국주의 마케팅이 강력한 호소력을 얻던 때였다. 이재한 전 팀장은 당시를 '가격', '유통망', '소비자 정서' 등 3박자가 척척 들어맞았던 때라고 회고했다.
콜라시장 점유율 14%... '기적'이 일어났지만
▲ 지금은 한 중견 건설업체가 범양식품 공장 부지를 사들여 공구상가로 변신시킨다는 계획 아래 한창 분양을 중이다.
ⓒ2006 오마이뉴스 김연기
"98년 4월 1일 처음 '815콜라'를 출시했을 당시 소비자들의 반응은 정말 뜨거웠어요. 대부분의 기업들이 IMF 여파로 현금 유동성에 차질을 빚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현금이 남아돌았을 정도니까요."
특히 콜라의 주소비층인 10대 중후반부터 20대 초반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대학생들 사이에선 '815콜라'를 마시는 것이 곧 '애국'이었다. 당시 100명 이상이 모인 집회나 시위 현장에는 늘 '815콜라'가 옆에 있었다.
이 같은 국민정서가 극에 달했던 99년 초반 '815콜라'의 시장점유율도 가장 높았다. 출시 1년 만에 시장점유율이 13.7%까지 치솟았다. 당시 4000억 원 규모였던 콜라 시장에서 범양식품은 500억 원 가량을 차지했다. 코카콜라와 펩시로 양분된 콜라 시장에서 이 같은 범양식품의 약진은 당시 음료업계에서 거의 '경악스런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코카콜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을 당시 27개에서 10개로 줄어든 지점 수도 14개로 늘어났다. 코카콜라와 결별하면서 그곳으로 옮긴 직원들도 하나둘 돌아왔다. 말 그대로 코카콜라와 당당히 싸워 맞서 '독립'을 이루는 듯 했다.
'맛' 떨어지고 '애국정서' 시들... 점유율 내리막
▲ 대전 범양식품 본사 출입구 옆에 '815콜라' 전용 자동판매기가 고장난 채 세워져 있다.
ⓒ2006 오마이뉴스 김연기
하지만 시장은 냉혹했고 코카콜라의 벽은 높았다. 급속도로 팽창한 시장 점유율 상승은 오히려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위기의식을 느낀 외국 음료업체의 물량공세와 판촉행사 등이 이어지면서 범양식품의 '독립선언'은 차츰 한계에 부딪혔다.
이런 와중에 경영진의 판단 착오도 점유율 하락에 영향을 줬다. 99년 중반 14%대까지 점유율이 올라가자 경영진은 그 동안의 저가브랜드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가 전략을 택했다. 99년 7월과 8월 2차례에 걸쳐 가격인상을 하면서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어느 정도 길들여졌다고 생각해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맛'에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곧 소비자들 사이에서 "'815콜라'는 뭔가 1%가 부족하다"는 인식을 낳게 했다. 콜라를 생산할 때는 톡 쏘는 맛을 좌우하는 탄산가스량이 중요하다. 그러나 범양식품은 이를 고정시키지 못하고 계속 조정을 하면서 소비자들에게 맛의 변화를 불러왔다. 이재한 전 팀장은 이를 가장 대표적인 실패요인으로 뽑았다.
"처음 '815콜라'를 출시하기 전 블라인드 테스트(눈을 가리고 하는 것)를 했을 경우엔 소비자들이 '815콜라'와 코카콜라의 맛을 구별하지 못했어요. 그 만큼 맛이 비슷했다는 거죠. 그러나 이후에 탄산가스를 조절하면서 맛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죠. 예전에는 코카콜라에서 정해주는 대로만 하면 됐지만 이젠 우리가 스스로 정해야 했어요. 여기서 매번 일정한 맛을 못 냈던 거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소비자들의 '애국 정서'도 차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시작 초기에는 소비자들의 감성에 호소해 덕을 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맛으로 승부를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범양식품이 주춤하는 사이 외국계 음료회사의 견제가 더욱 집중되면서 시장 점유율은 다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난 2003년 10월 제품 판매를 담당했던 계열사에 부도가 나면서 급기야 범양식품도 연쇄부도를 맞았다. 99년 500억 원에 달했던 매출은 2003년 100억 원대로 줄어들었다. 콜라시장 점유율은 5% 아래로 주저앉았다.
2004년 생산중단... 시골 구멍가게에서 보이는 '희귀제품' 돼
계속되는 자금난에 허덕이다 결국 2004년 9월 '815콜라' 생산이 중단됐다. 그 이후로 '815콜라'는 대도시 소매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지방 소도시의 구멍가게와 예식장·장례식장 등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 제품'이 됐다. 이재한 전 팀장은 이마저도 오는 6~7월쯤이면 아예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유통망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결국 일반적인 유통경로를 통해서는 제품이 판매될 수 없었죠. 그러다보니까 재고품들이 헐값에 예식장이나 장례식장에 대규모로 유통됐던 거죠. 보통 유통기한이 패트병은 1년, 캔은 2년이기 때문에 그나마 일부 남아 있는 캔 제품들도 올해 7~8월이 되면 유통기한을 넘겨 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겁니다."
이후 범양식품은 화의신청, 취소, 항고, 재항고를 거치며 2004년 12월 법원의 법정관리 개시가 결정돼 회생을 위한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왔지만 지난해 3월 끝내 파산선고를 받았다.
콜라독립의 꿈은 끝? "아직은 모릅니다"
법원의 파산선고 당시 이재한 전 팀장과 함께 마지막까지 회사를 떠나지 않은 직원은 38명. 그러나 지금은 이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을 포함해 범양식품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받지 못한 임금채권만 115억원에 달한다. 얼마 전 '마지막 자산'으로 남았던 대전 본사 공장부지가 183억원에 팔렸지만 이마저 대부분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
이들 38명은 회사가 파산하는 날까지 '독립의 꿈'을 놓지 않고 회생을 위해 힘썼다. 법원에 회생안을 제출하고 일부 대리점과는 영업재개를 위해 접촉까지 했다. 이들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영업 운영안'을 보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향후 10년간의 세부 영업계획이 책 한 권 분량으로 꼼꼼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법원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8년간 이어 온 '콜라독립의 꿈'도 결국 역사 속에 묻히고 만 것일까. 이재한 전 팀장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콜라독립 815'란 상표권은 아직도 범양식품이 가지고 있어요. '독립'이 어디 쉬운 건가요? 지금이야 실패의 교훈도 있으니 그래도 예전보단 한발짝 더 가까이 거기에 가 있겠죠. 모르죠. 누군가 다시 '독립선언'을 들고 일어설지…."
제가 듣기로는 다시 한번 자매품을 맹근다네요
콜라전쟁 625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