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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맞은 8·15 해방 기념일은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져왔다.
이날을 위해 남한에서는 석달 전에 5·10 선거를 통해 2백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했으며 6월부터 헌법 심의에 착수하여 7월 17일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공포했다. 사흘 후인 7월 20일에는 이승만과 이시영이 정·부통령에 당선됐으며, 8월 4일에는 이범석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의 조각을 끝내고 마침내 광복절을 기해 신생 대한민국 탄생을 내외에 알렸다.
그리고 그 해 9월 11일에는 이범석 국무총리가 경축 사절단으로 내한한 미국의 대통령 특사 무초에게 미군정의 행정권과 재산권을 이양받음으로써 미군정 3년간의 신탁통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미군이 이 땅을 떠나던 시기에 북한에서도 8월 25일 소련식 흑백 투표함을 통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9월 3일에는 북한 헌법을 채택한 뒤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이름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소련 역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의 철군 방식은 크게 달랐다.
소련이 김일성에게 탱크를 비롯한 온갖 남침용 공격무기를 남겨주고 떠난 데 비해 미군은 소련군 철군 후 그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여건을 만들어주고 떠났다. 북쪽의 탱크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철수 후에 곧 남한 포기를 선언했다. 남한은 그들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남한을 누가 집어삼키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닌 미 국무장관 담화를 서둘러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쨌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떠나면서 우리는 새 정부에 맞는 교육법을 제정해야 했다. 그런데 1949년 12월 31일에 공포된 교육법이나 이와 관련된 제도를 보면 미국식을 본 딴 것도 있지만 대게는 일본식 법제를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도 교육이념으로 밝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만은 결코 어디에서도 빌려온 것이 아니었다. 홍익인간은 어디까지나 우리 고유의 교육이념이었다.
아득히 먼 옛날 환웅이 태백산(묘향산)에 내려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신시를 베풀 때의 건국 이념이 홍익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념은 한낱 신화시대의 옛 이야기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을 받았을 때나 조선시대와 일제 침략 등 우리가 국난을 겪을 때마다 되살리며 지켜온 정신으로 해방을 맞아 교육법을 제정할 때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세우기까지는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시창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어서 제정 과정에 갖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홍익인간 이념이 우리의 교육이념으로 채택된 것일까?
○ ○ ○ ○
1945년 12월 5일 열린 조선교육심의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격론을 몰고 왔던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제정 문제는 12월 13일 열린 제3차 회의에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날 반대에 나선 인사는 주로 오천석, 장이도, 이인기 등 미국과 일본 유학파가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동경상대를 나온 좌익계 학자로 당시 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남운은 일제가 주장하던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재판'이라며 극렬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천석은 당시 상황에 대해 "교육이념을 다루는 분과위원회에서 홍익인간이 채택되어 전체회의에 보고되었을 때, 반대의 이유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고기(古記)에서 나온 말이므로 신화에 가까운 비과학적이라는 것과 과거에 일본인들이 즐겨쓰던 팔굉일우라는 말과 비슷한 냄새를 피운다는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같은 논란 끝에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것은 1945년 12월 20일 오후 2시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린 조선교육심의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같은 논란 이면에는 누가 처음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세우자고 주창했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학계에 홍익인간 시창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 데에서도 알 수 있다.
12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심의된 교육 이념은 전번의 안재홍 제안을 약간 수정하여 홍익인간의 건국 이상을 바탕으로 한 민주 국가의 공인 양성…"이라 하여 안재홍이 제안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안재홍은 당시 제1분과위원장(교육 이념)으로 대표성을 띄었기 때문에 편의상 그를 지칭한 것 일뿐 처음 그가 주장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학계의 주류 의견.
백낙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군정시대에 교육이념 이야기가 처음 나왔습니다. 그 때 위원 중에는 정인보, 현상윤, 하경 덕, 안재홍, 나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교육이념을 두 세개 제출해 가지고 토론하였는데 처음에는 우리 교육 이념이 될만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어서 내가 생각이 나서 '홍익인간'이라고 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할 때 그 때 모두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홍익인간이라는 것은 무슨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 군정시대 분과위원회에서 나는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교육학적 여러 이론이나 철학적 이론은 내가 말할 수 없지마는 홍익인간으로 삼자고 하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후략)"
그의 이같은 증언은 훗날 학계에서 홍익인간 시창자가 백낙준이라고 믿는 결정적인 근거 자료로 활용됐다. 그러나 서구 유학파면서 충실한 기독교도였던 백씨의 사상적 배경이나 출신 성향을 놓고 볼 때 철학적 의미까지 내포한 홍익인간 이념을 제창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 백낙준 시창설을 부정하는 학계의 한 흐름.
어쨌든 조선교육심의회에서 채택된 '홍익인간' 이념은 정부 수립 이후 교육법 제정기에 또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정부로부터 이송된 교육법은 국회 심의과정에서 교육이념이 건국신화와 관련된 공허한 것이라든지 극히 추상성을 가져 과학성이 없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면서 구체화되었다.
제5회 국회 법률안 심의 과정에서 이성학 의원은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바란다"고 추궁했으며 이에 대해 문교사회분과위원장을 맡은 이영준은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한 것은 특별한 뜻은 없고 역사성을 포함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특이한 문구를 포함한 것 … "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대 문교부장관이던 안호상은 "서양의 교육이념은 인간주의·인문주의가 중점적 사상인데 홍익인간은 이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며 "홍익인간이란 말을 제외한 다른 표현을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 홍익인간의 교육 이념 정립을 관철시키는데 앞장섰다.
'홍익인간'의 법제화 과정은 이처럼 불완전한 논리와 반대 이견 등 우여곡절 끝에 채택되어 해방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고유의 교육이념으로 정착됐다.
그러나 교육입국의 뼈대를 세우는 교육법 제정 과정에서 논란이 불거졌던 것은 비단 교육이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출처 | http://www.unn.net/ColumnIssue/detail.asp?nsCode=42347&sCode=1&cIdx=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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