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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박사의 나의 생명 이야기
닭이 우는 시간은 통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의 시간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자.
하늘을 감동시키자.
아름다운 것들은 저희끼리 눈 맞춘다.
사람과 짐승이 가까이 지내던 시절, 서로 눈빛을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1편. 내 친구 소 이야기
자연과학도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 나는 자연과학도지만 인간의 삶을, 그것도 막연한 인간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 분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연과학을 전공했다.
- 우리 노력이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삶을 나락에서 건져 올리는 작은 희망일 수 있는 한 우리는 쉴 수가 없다.
제발 내 딸을 걷게 해달라는 어느 부모의 통곡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두렵기만 하던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바로 과학의 출발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는 과학의 산물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과학뿐 아니라 인간 또한 출발점이었던 자연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 평생 과학도로서 한길만 가자고 다짐해 온 나는 과학도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자연을 이해하고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한한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과학도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과학책을 보고 실험하기전에 먼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숲과 나무와 그 숲에 깃들어 사는 무수한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벗이 되라.
과학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소와의 인연
- 나는 1953년생이다. 전쟁이 막 끝난 그때 시골은 누구나 천형처럼 가난을 짊어지고 살았다.
내 나이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우리집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철모르던 시절부터 나는 ‘생존’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런 나를 위로한 것은 푸른 산과 들 그리고 순한 눈망울을 꿈벅거리는 소였다.
소는 땅 한마지기 없던 우리집을 먹여 살리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우리집에서 키우는 소는 돈 많은 사람이 사서 키워달라는 배냇소였다.
그 소가 커서 낳은 새끼가 우리 몫이 되는 것이다.
- 서울대 의대를 가지 않고 수의대를 선택한 것은 소와 평생을 함께 하겠다던 나의 어린 시절 꿈 때문이었다.
그 무렵 소는 가난한 시골사람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더 많은 새끼를 낳고 더 크게 자라는 소를 만들면 가난한 우리 식구도 내 친구들도, 이웃들도 좀 더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어린 아이다운 순진한 생각의 발로였다.
땅을 닮은 사람
- 경기도 광주에 서울대 실험농장이 있다.
농장을 돌 볼 사람을 찾았으나 오래 버티질 못했다.
현재는 중국 흑룡강 출신의 조선족이 돌보고 있다.
내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자잘한 부분까지 다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
그는 매일 7만평에 달하는 산을 다 돌면서 울타리에 작은 구멍이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그는 이 작업을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소가 아프면 소 옆에서 밤을 새운다.
겨울에는 아픈 소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 소와 함께 먹고 잔다.
그는 수십년 전 내 고향 마을 사람처럼 손익을 따지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한다. 그가 소를 키우면 소가 살찌고, 토끼를 기르면 토끼가 살찐다.
채소도 그가 키운 것은 유난히 탐스럽다.
지극한 정성 때문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풀 한포기도 애정을 베풀면 그에 답한다.
어머니
- 어머니를 위해 나는 아무리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이라도 어떻게든 틈을 내어 전화를 드린다.
평생 자식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하신 어머니께 더 많은 보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와하면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선물 중 가장 큰 것은 물론 가없는 사랑이리라.
중학생이 되어 대전에 유학하던 시절 차비가 없어서 집에 잘 들르지 못하다가 어쩌다 돈을 모아 집에 가는 날이면
동네 어귀에 이르자마자 저 멀리서 귀신처럼 나를 알아보고 논에서 피 뽑다말고 거머리에 물려 다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지도 모르시고 맨발로 달려오셨다.
평생을 홀로 자식들 키우시느라 고생스럽게 살아오시면서 소리내어 웃을 줄도 모르시던 어머니 입가에 번지던 눈부신 미소,
말없이 어쩔줄 모르며 내 얼굴을 쓸어내리시던 어머니의 손길이 지금도 그립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또 하나의 큰 선물은 소 같은 우직함이다.
어머니는 평생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별이 총총한 새벽부터 달이 밝은 한 밤중까지 자식을 위해 소처럼 일하던 어머니를 고스란히 배웠는지 나도 일이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남달리 명석한 두뇌도 아니고 배경도 없었다.
오직 소 같은 성실함만이 최선의 자세라는 사실을 늘 간직하며 살아왔다.
등 안대기 클럽
- 세상사는 공정해서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내 노력에 답해 주었다.
-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우울해 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정신이 버쩍 들 정도로 혼뜨검을 낸다.
할 만큼 했는데도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결과를 따지기 때문이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는 에디슨의 말이 범인들을 위한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눈앞의 결과에 연연해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혼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하라.
안되면 될 때까지 노력하라.
될 때까지 하겠다는 각오면 이루지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찍소 정신
- 나는 밭을 가는 소를 보면 마음이 아팠고 또 존경스러웠다.
소는 일생동안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가슴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존재였다.
나 역시 소 처럼 살고 싶었다.
- 내가 복제 인간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연구를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는 모두 말렸다.
그건 이미 세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연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는 실패와 도전의 반복 끝에 마침내 벽을 뛰어 넘고야 말았다.
나는 우리의 연구가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내 결심이 옳았다고 믿는다.
모든 연구자가 부딪쳤던 난관은 누군가 언젠가 넘어야할 벽이고 그 벽은 무수한 실패 끝에 비로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실패를 밑바탕 삼아 성공하면 되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나는 주변의 만류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찍소 정신으로 우직하게 매달렸다.
좀 더 멀리 좀 더 크게 보면 손해나 실패도 때로는 공동체를 위해 큰 이익이 될 수 있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도전과 실패가 없었다면 우리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역사는, 과학은 그렇게 진보해 가는 것이다.
너는 책박사
- 소는 새끼를 낳으면 태반을 먹어 치운다.
그런데 소는 초식동물이라 동물성 단백질 분해효소가 없어 동물성인 태반을 소화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내가 태반을 못 먹게 치우려고 하면 어머니는 “얘, 태반을 먹어야 자궁이 튼튼해지는 법이다. 그냥 나두어라. 그걸 못 먹으면 다음 새끼를 못 낳더라” 하시며 나를 말리는 것이다.
내가 먹으면 왜 안 되는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어머니는 경험으로 얻은 자신의 견해를 굽히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제가 명색이 수의학 박사입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빙긋이 웃으시며 이렇게 맞받으셨다.
“ 너는 책 박사지, 나는 소 박사다. ”
- 송아지가 설사가 나면 나는 항생제를 들고 달려가는 반면 어머니는 어미소의 먹이를 줄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얼마 후 송아지의 설사가 멈췄다.
아마도 어미소의 젖이 줄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나는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지만 경험에서 우러난 어머니의 삶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으면 소들이 토실토실하게 살찌던 것은 어머니의 오랜 경험도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컸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글 한줄 읽지 않고 고된 노동으로 평생을 살아온 분들을 만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