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땐, 책벌레 라고 불릴만큼 책도 읽고, 악기면 악기 글쓰기면 글쓰기, 운동이면 운동도 좋아하고 공부는 소위 영재반이라고 불릴만큼
나는 그런 우수한 아이였다. 엄마는 내게 거는 기대가 컸고 어린 나의 세계에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난 의외로 여린아이였나보다.
가장 선명하게 남은 그 나이때의 기억은, 교내 수학경시대회 에서 98점을 받았다고 엄마한테 혼날까봐 질질 울었던일. 이게 첫번째.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뭐라 표현 할 수 없이 구역질 나는 표정으로 내 사생활이 써있는 비밀일기장을 찢어 온 반에 뿌리고 다니고
멍 한 표정으로 그 가운데서 쳐다만 보던 나. 이게 두번째
그외에도 숭배와도 가까운 비뚤어진 우정을 쏟아붓던 나를 교묘하게 이용하던 무서운 아이. etc etc
시간은 빠르게도 흐르고 중학생. 엄마는 말씀하셨다. " 이제 공부에 더 집중해야지? 대금은 대학교가서 해도 충분해"
울어제끼면서도 난 그게 당연한줄 알았다. 엄마 말이니까. 사실 공부보단 대금공부를 더 하고싶어요 엄마 하고 말하는 그런건 내 선택지엔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건. 공부. 컴퓨터도 핸드폰도 쓰면안되. 넌 학생이잖아? 다들 이렇게 사는줄 알았으니까 착한 딸이됬다. 네 엄마.
초등학생때로 비뚤어진 내 모든 친구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거기서 한눈에 반해버릴만큼 빛나는 아이를 만났다. 놀러갔던 반에서 긴 앞머리로 색소옅은 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그녀는
한눈에 반해버릴만큼 너무 예뻐서, 눈이 마주친 순간 웃어버렸다. 이게 우정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을만큼 빠져들었고 미쳤고 매달렸다.
학교에 훌륭하게 난 소문이 야 쟤 좀 레즈같애. 그리고 이상해 재수없어. 수업시간엔 잠만자면서 공부는 잘한다?
아아... 작아져만 갔다. 중학교수준의 공부는 초등학교때 다 해왔고, 중3이 되기전엔 고2 과정공부를 하고있었으니까 수업엔 흥미가 없었다.
눈을 들면 쏟아지는건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에게서 쏟아져 내리는 소름끼치는 시선들. 욕설들. 뱀같이 온 몸을 기어다니는 음습한 감정들.
겉으로 보이는 나는 견고하고 단단하고 차가웠다.
적어도 대놓고 날 무시 할 수 없게 스스로가 만드는 방어선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겁에질린 개새끼가 짖어대는 발악에 가까운 행동이였다.
망가지기 시작한 착한 딸은 서서히 무너져 엄마가 바라는 공부도. 착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매질은 조금씩 조금씩 강해졌다. 늘어가는 팔다리의 흉터와. 남아있는 내 끔찍한 기억은
옷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진 채로 신발도 신지 못하고 죽을듯한 공포를 피해 미친것처럼 집밖으로 뛰쳐나가는 내 비참한 모습
머리채를 휘어잡히고 침대 모서리에 짓이겨지는 자그마한 머리통과 어느날 저녁 산산조각난 내 방 책상 유리와 내 목을 조르는 엄마.
엄마가 엄마가 아니게 되어간다.
그녀는. 그녀만은 날 받아줬어. 예쁜 네 눈을, 반듯하고 하얀 이마를 보면서 난 계속 말했었지. 사랑해. 사랑해.
넌 내게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잡아주기만 했다. 사랑해 라고 한번도 돌아온적 없는 그런 내 메아리는 계속 널 향해 매달렸다.
하지만 적어도 넌 날 밀어내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그 옆에서 행복했어. 행복한채로 옆에서 말라비틀어져 간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자. 그러면 어떡해야되지? 자면되. 자면 다 잊어버릴수 있어. 자면 넌 힘들지 않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설자리가 없는 내가 갈 곳은 하교부터 한밤중까지 꽉찬 학원의 행진이였고, 학원 책상에서도 학교책상에서도 잠에빠져들었다.
시간은 또 잘도잘도 흘러 고등학생이 됬다.
바뀌는것 없이 지옥 밑바닥같은 그 아래서 썩어 문드러지던 내게 취미가 하나 생겼다. 연필로 노트 귀퉁이에 끄적이던 낙서들이 어느새
고여서 부패한 감정을 토해내는 배출구를 넘어 제법 잘 그리는 구나 소리를 들을만큼 발전해갔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일어나서 식사하고 밥먹고 이동하는 시간외엔 온종일 그림만 그리고 있엇으니까. 자는것 말고 도망가는 방법을 한가지 더 알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제법 즐겁기도 했다.
서서히 깨달았다. 아 더이상 이렇게 살기 싫다.
눈도 보이지 않을만큼 앞머리를 내리고. 버스 하나도 제대로 못탈만큼 사람이 무서워서 덜덜떨면서 도망다니고. 버릇처럼 자리잡은 자해로
팔목은 성할날이 없는 이런 버러지같은 삶은 살고싶지 않아. 나도 행복하고싶다. 나도 다른애들처럼 저렇게 밝게 예쁘게 웃을줄 알고 싶어.
앞머리를 잘랐다 눈이 보일만큼.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한다. 반친구 들 앞에서 평범하게 말해본다. 내리깐 시선을 위로 올려본다.
누군가의 눈동자와 마주하는게 부들부들 떨려올 만큼 공포스러웠지만, 뒤에 숨어서 줄줄 울어야 햇했지만 죽어라 노력했고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평범하게 착한 아이들이 함께 해 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사람이 되 가는 연습을 했다.
공부는? 공부는 이미 중학교때 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해오던 가락은 있어서 고1때 까지는 전교에 손꼽히는 성적으로 들어왔지만 점점 떨어져만 간다.
그에 맞춰 더해가는 엄마의 히스테릭한 분노는 내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몸에 점점 늘어가는 숨길수 없는 흉터와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싶은 엄마한테
짓이겨 진다는 상처가 숨 쉴수 없을만큼 버거워졌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아직도 내게 대답해주지 않아.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을까?
사랑받고싶다. 사랑받고싶다.
이때 만난 내 친구들. 지금도 누구보다 소중하게 아끼는 친구를 둘 만났다.
나만큼 성하지 않게 자라온 친구들이지만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그렇게 난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고3.
입시의 무게까지 더해져 난 결국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처음 시작한 공황발작의 그 끔찍한 감각은 잊을 수 없다. 정류장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덜덜떨며 쪼그리고 앉아 운다. 아래 위의 이빨이
덜거덕거리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괜찮아? 괜찮아 학생?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내게 말하는것 같지만 닿지는 않는다.
죽을것만같이 엄습해오는 공포감과 터질것같은 심장을 꽉 누르고 버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는 모르겟는데 이제좀 괜찮다.
일어서야지 다음 학원시간 늦겠다.
발작의 횟수가 늘어나만 가고 여느날 처럼 엄마의 욕설과 함께 얻어맞던 내 몸뚱이가 그 순간에 발작을 시작한다.
차갑게 돌아온 엄마의 말은 "미친년 쇼하네" 살려줘 살려주세요. 힘들어요 엄마 내가 이상해.
그림들이 흩날린다. 내가 그린 그림 한장한장이 흩날려 그 손아래 찢겨진다. 내 모든걸 쏟아부은 시간과 감정들이 유린되간다.
울부짖고 반항해보지만 아직 덜자란 몸은 그저 맞기를 피해 구석으로 도망간다.
이제 더는 못하겠다.
하나.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다.
돌아오지 않는 구애에 지쳤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쏟아질 부모님의 실망과 사회의 비난을 피해 도망가 버린다.
둘.
이제 그림은 포기할게 엄마.
나 이제 제법 강해졌으니까 이런 탈출구는 없어도되. 입시준비할게. 안되면 재수라도 할게.
다 끝났다.
이제 다 끝난거다, 이제 더는 힘들지 않아도되. 엄마도 다시 사랑해주겟지? 착한딸이 될게요.
재수를한다. 죽어라 열심히 공부를했다. 엄마는 다시 다정한 엄마로 돌아왔다.
4년제는 아니지만 3년제 간호과를 들어간다. 내 비참한 성장과정에 같이 울어줄만큼 착하고 좋은 남자도 만났다.
이제 쉬고싶다. 다 내려놓고 쉴꺼야.
대학생활은 그럭저럭 3.0만 채울만큼 멍하게 1년 2년 3년 잘도 지나간다.
졸업을 하고 학사를 따자.
엄마가 4년제 수준은 되야 된다고 했잖아? 그리고 아직도쉬고싶어.
상처입은 괴물이였지만 선명하게 색을 가지고 있던 난 사라지고 히풀어진 눈동자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저그런 인간 쓰레기만 이 자리에 남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남자친구에게 비 정상적이게 유아적으로 의존하는 자신을 알지만 어떻게 하고 싶지 않다. 달콤한 덫과같은 지금이 좋다.
겉보기엔 그럴싸하게 예뻐지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우습다 예전엔 혐오스럽다고 욕하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달라지네.
그냥 이렇게 미지근하게 사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펜을 잡아봤는데 우습게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릴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눈물이 나온다.
분명히 즐겁게 연필을 놓고 트라우마는 다 극복한 줄 알았는데? 이제 이런 탈출구같은건 없어도 잘 살줄알았는데?
아ㅋㅋ 알아버렸다. 난 극복한게 아니다. 도망간거다.
비겁하고 치졸하게 극복한척 날 속이고 여태까지 도망만 쳐온거다. 구역질나는 겁쟁이 쥐새끼 그게 나였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전부가 사실은 연필을 꺾고 포기한 그 순간부터 산송장이 되기위한 발걸음에 불과했다.
이제서야, 내게는 그렇게 무섭던 엄마가 동생이 미술을 한다고 할때 허락하던 순간 이상하게 꿈틀거리던 감정이 이해가 간다.
죽을것만같다. 죽을 용기도 없으니 죽진 못하겠지만 앞으로도 죽은것처럼 이렇게 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