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방 안 가득히 여러 종류의 예쁜 포장지들과 각양각색의 쵸콜릿들이 널려있고
옆에는 하교길에 팬시점에 들러 사온 커다란 뚜껑 달린 쓰레기통이 있다.
난 곱게 자른 포장지로 쵸콜릿을 하나씩 하나씩 정성들여 싸고 있다.
발렌타인 데이에 그 아이에게 줄 꺼다.
쵸콜릿 하나에 눈물 하나..
수백 개의 쵸콜릿을 싸야하니 눈물도 그만큼 나오려나?
아직도 귓가엔 그 아이의 마지막 말이 맴도는 듯하다.
"우리 이제 고3 올라가잖아. 열심히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너 만나고 다닐 수는 없잖아?
우리 대학가서 떳떳하게 만나자. 너도 공부 열심히 하고, 가끔 전화해서 안부 정도는 물어도 괜찮아.”
난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이별을 위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저런 말은 영화 속에서나 하는 말들이지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누가 공부한다고 잘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단 말인가!
공부? 지가 언제부터 공부 같은걸 했다고…
정말 기도 안찬다.
선심쓰듯 가끔 전화정도는 해도 된다는 그 애의 말이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지만
난 최대한 태연한 척 하느라 한마디 따지지도 못했다.
대신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발렌타인데이에 쵸콜릿 줘도 될까?”
“그래. 대신 그게 마지막인거야.”
“응. 고마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내가 주는건데 왜 니가 선심쓰듯 말하는거야? 왜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냐구!
그리고 그냥 아무거나 사서 줘버려도 괜찮을 쵸콜릿을 일일이 포장지를 잘라
정성들여 포장하는 내 모습이 한심스럽다.
쵸콜릿 하나에 눈물 하나 떨구고 가만히 한숨을 삼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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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를 처음 만난 건 고2 올라가는 해 발렌타인데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 소개로 폰팅을 하던 남자아이를 그 날 처음 만나기로 했었다.
그 남자아이와 나 그 남자아이 친구와 내 친구.
햇수로 5년을 통화만 했었기 때문에 쵸콜릿을 준비한다, 머리를 만진다, 옷을 산다
그러면서 온갖 부산을 떨어댔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약속장소에 나갔다.
레스토랑 안에는 손님이 한 테이블 밖에 없었고, 그 자리엔 남자아이들이 세 명이 앉아있었다.
내가 만나기로 했던 아이들은 두 명이었기 때문에 아직 오지 않은 줄 안 내 친구와 나는 다른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다른 테이블에 있던 남자아이 하나가 걸어왔다.
“저기요…”
헉!!!
고개를 들어올린 난 경악에 찬 비명소리를 내뱉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야 했다.
‘이 앤 아닐꺼야! 아니어야만 해! 그 목소리에 이 얼굴은 정말 아니라구!!!’
“저기…혹시…윤영이…아냐?”
순간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앞에 앉았던 선희도 아니라고 하라는 협박성 눈빛을 내게 강하게 보내고 있었다.
“아…니………………..맞는데…”
이런 머저리!!!
“아! 역시 맞구나! 반갑다! 내가 형준이야. 저 쪽에 친구들 있으니까 저리로 가자.”
“어…그래…”
뛰어난 외모를 가졌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했다.
다른 건 다 참겠는데 날 물어뜯을 것처럼 튀어나온 저 뻐드렁니만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간신히 끌며 나와 선희가 옮겨간 테이블엔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또록또록 굴리고 있는 두 아이가 있었다.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선희와의 짧은 암투에 승리한 나는 테이블 밑에 준비해간 쵸콜릿을 감추고 최대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간단한 통성명이 이어지고 음료를 주문한 나는 그 때부터 테이블과의 눈싸움에 들어갔다.
만남의 주체 중 하나인 내가 그러고 있으니 다른 애들이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니가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하는 선희의 말을 무시하지 못한 내가
“니네 두 명 나온다더니 왜 세 명이야?”
이렇게 물어보자 남자애들 표정이 싹 굳어져갔다.
내가 생각해도 빨대 빙빙 돌리면서 삐딱하게 앉아 시비걸 듯 말하는 내가 참 싸가지 없어보였을 거다.
세 명 중 오른쪽에 앉아있던 아이가 내 질문을 받아 답했다.
“그래서 불만이냐? 지금 시비거는거냐?”
응?
아니 저런 싸가지가!!!
고개를 돌려 봤더니 눈이 쫙 찢어져서 가뜩이나 사납게 생겼는데 마르기까지 하니 더 성질있어 보이는 놈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잘라 말해서 내 타입이 절대 아니었다.
그 애를 노려봤더니 그 애도 날 마주 노려봤다.
그렇게 한참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형준이가 일촉즉발의 위기를 느꼈는지
“원래는 철민이랑 나랑 둘이 나오려고 했었는데 기우도 마침 여기서 약속이 있다고 해서 같이 나온거야. 조금 있다가 기우 친구 오면 기우는 갈꺼야.”
형준이 말에 난 이렇게 답했었다.
“누가 철민이고 누가 기운데?”
애들이 일순 대답을 못했다.
왜? 내가 못 할 말을 했나? 애들이 셋이 있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니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 너랑 눈싸움 하고 있는 애가 기우야. 방금 통성명 했잖아.”
선희가 작게 속삭였다.
오호... 그래? 저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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