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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다 버리려고 했던 내복을 또 빨아 입었다. 낡은 내복을 입는다고 딸들은 야단이다. 새 내복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딸들이 사다 준 내복, 조카들이 사 온 내복들이 상자에 담긴 채로 쌓여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자꾸 새 것 입어 휘질러 놓으면 뭐하나 해서다. 그리고 새 옷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을 보면 헌 옷을 입어도 뿌듯하다. 나 죽은 후에 다른 없는 이들 입게 주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그런 에미 맘을 모르고 딸년들은 낡은 옷을 버리라고 야단이다. |
내 글은 남들이 읽으려면 말을 만들어 가며 읽어야 한다. 공부를 못해서 아무 방식도 모르고 허방지방 순서도 없이 글귀가 엉망이다. 내 가슴 속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꽉 찼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연필을 들면 가슴이 답답하다. 말은 철철 넘치는데 연필 끝은 나가지지 않는다. 글씨 한 자 한 자를 꿰맞춰 쓰려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모른다. 그때마다 자식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놓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글 모르는 게 한 평생 끌고 온 내 한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문턱에라도 가 봤으면 글 쓰는 방식이라도 알았으련만 아주 일자무식이니 말이다. 이렇게 엉터리로라도 쓰는 것은 아이(손주)들 학교 다닐 때, 어깨 너머로 몇 자 익힌 덕분이다. 자식들이나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도 못했다. 숫자는 더 깜깜이었으니까. 그래서 70이 가까워서야 손자 놈 인성이 한테 숫자 쓰는 걸 배웠다. 밤늦도록 공책에 1,2,3,4를 100까지 썼다. 내 힘으로 딸네 집 전화를 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숫자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건 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니 장원급제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너무 신기해서 동생네도 걸고 자식들한테도 자주 전화를 했다. 나는 텔레비젼을 보며 메모도 가끔 한다. 딸들이 가끔 메모한 것을 보며 저희들끼리 죽어라 웃어댄다. 멸치는 ‘메룻찌’로, 고등어는 ‘고동아’로, 오만원은 ‘오마넌’으로 적기 때문이다. 한번은 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약속 장소를 불러 주는 걸 적었는데 동대문에 있는 이스턴 호텔을 ‘이슬똘 오떼로’라고 적어서 딸이 한 동안 연구를 해야 했다. 딸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하며 웃는다. 그러나 딸들이 웃는 것은 이 에미를 흉보는 게 아니란 걸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써 놓은 글들이 부끄럽다. 그래서 이 구석 저 구석 써놓은 글들을 숨겨 놓는다. 이만큼이라도 쓰게 된 게 다행이다. 이젠 손주들이 보는 글씨 큰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다. ‘인어 공주’도 읽었고, ‘자크의 콩나무’도 읽었다. 세상에 태어나 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나마 쓰게 되니까 잠 안 오는 밤에 끄적끄적 몇 마디나마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말벗이 없어도 공책에다 내 생각을 옮기니 너무 좋다. 자식을 낳으면 굶더라도 공부만은 꼭 시킬 일이다. (참고: 맞춤법이 틀린 일기를 고쳐서 옮겨 적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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