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넌 나를 항상 뭔가 내려다 보는 게 있었지.
같은 동네 살면서도 정말 니가 뭔가 필요할 때가 아니면
부르지도 않았고 도리어 반에서는 내가 같은 동네 산다는 걸
쪽팔려 하기도 했으니까. 너는 집도 풍요로운 편이었고
나에 비해 넉넉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던 반면
난 공부도 별로 못 했고 집도 가난하고 부모님도 엄격했던지라
위축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언젠가 우리 엄마가 빚 때문에 고생하실 때
너희 부모님이 셋방이나마 몇 달 간 내주시고 도와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인사드리러 갔을 때도
넌 경멸의 미소를 머금고 옆에서 쳐다봤었잖아.
아마도 니가 나를 하녀부리듯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였을 거야.
평소에는 아는척도 안 하고 연락도 없다가 뭔가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거나
친구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만 잠깐 불러서 친한 척 하면서 놀지.
그러다가 다시 괜찮아졌다 싶으면 그 뒤로 또 쌩까고 모른척 했잖아.
그 때도 경우에 따라 너무나 다른 너의 태도 때문에
상처 많이 받았는데, 너희 부모님이 도와주셨던 게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서 뭐라고 하지도 못 하고 그냥 묵묵히
받아줬어. 뭐, 너도 이런 내 심정을 어느정도는 아니까 그런 거였겠지.
그리고 이런 니 행동은 대학 가면 고쳐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솔직히 나, 작년에 대학오면서 너 때문에 진짜 고민 많이 했었어.
하필이면 바로 옆 동네 학교라니.. 차라리 아주 먼 곳에 살면 니 이런
이중적 태도를 두 번 다시 안 봐도 되리란 생각 반, 4년 동안 대학 다니면서
필요할 등록비 걱정 반에 지방에 있는 국립대로 갈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그놈의 학벌주의가 발목을 잡더라. 우리 엄마도 꼭 여기 보내고 싶다고
소원을 했던 데라 어쩌지도 못 하고.. 그리고 그 이후로 넌 더더욱 자유롭게
날 필요에 따라 불러냈다 말았다 반복하고 말야.
미용실 정도는 그냥 혼자 가. 너도 대학가서 친구 많이 사겼을 거 아냐.
이제 2학년인데 너도 너네 학부사람들이랑 친해져야지.
목욕탕 혼자 간다고 안 죽어. 서류 접수하러 혼자 온다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 없고,
헬스장 여자 혼자 다닌다고 욕하는 사람 없어.
그렇게 깐보던 앤데 무슨 왜 정작 뭔가 일이 생기면 나한테만 전적으로 의존해?
그리고 심심하면 니 친구들 불러. 왜 예전에는 남들 앞에서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나를 굳이 불러다가 니 심심풀이 땅콩으로까지 써 먹으려 하는데?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상대가 필요하면 친한 친구들
부르면 되잖아. 안 그래도 공인영어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인간 데려다가
옆에서 웃긴 얘기 좀 해 보라는 말이 나와? 그렇다고 내가 힘들 때도
똑같이 도와준다던지 고민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아냐. 그저 니가 하고 싶은 말만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다가 내가 무슨 말을 하려하면 그자리에서 바로 끊고
'그만 쉬자'라고 하지. 예전에 하도 짜증나서 니가 부를 때 과제 때문에 바쁘다고 어떻게
변명이라도 해 보려니까 벌컥 소리지르면서 집안 얘기
꺼내서 얼마나 기겁했는 줄 알아? 진짜, 야. 우리집이 예전에 빚진 건 진짜 미안한데,
지금은 안 살잖아. 너희 부모님 도와 주신게 너무 감사해서 집에 내려갈 때면
뭐라도 꼭 사가서 안부인사 드리는 편이고, 나중에 성공하면 갚을 생각으로
나름 학과내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너도 잘 알잖아.
그래. 뭐 이런 것들은 그렇다 치자. 그 동안 하도 겪어왔던 거라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어제도 니가 남자 문제로 힘들다면서 술상대 좀 해달래서
또 여차저차 너네 집에 끌려갔지. 옆에서 새벽 두시가 넘도록 니가 하는 하소연 듣고
열심히 상담도 해 줬고 먹고 싶다는 술안주도 사 줬잖아. 그러다가 어느 샌가 나도
헬렐레 해져서 그냥 고백 한단 심정으로 너같은 애한테 솔직하게 과거 얘기
털어놨던 게 가장 큰 실수였던 것 같다.
야. 니가 내 팔에 흉터 왜 있냐 그랬지? 말 했던 그대로야.
과장 하나 없이 알콜중독 걸린 아빠가 나 초등학생 때 시험 좀 못 봤다고
깨진 술병 미친듯이 방에 던지고 난리 치던 바람에 그거 맞아서 생긴 거라구.
그러면서 이게 은근히 트라우마라 힘들댔더니 뭐랬냐?
뭐 그까짓 거로 그렇게 힘들다고 징징대냐고?
너보다 힘들게 자란애들 수두룩 하다고?
하! 그래. 그럴수도 있지 물론. 근데 그럼 넌?
그런식으로 하면 남자 문제 따위로 투정부리면서 바쁘다는 애 불러다가
잔소리 주절거리는 너도 웃긴 애 아냐? 내가 괜히 우울해져서 암 말 안하니까
'야!남의 집에 와서까지 분위기 망치냐? 왜 자꾸 우울해져서 그래?웃긴 얘기 좀 해봐'
이러질 않나 진짜ㅋㅋㅋㅋ 니가 불러서 갔지 내가 가고 싶어 갔냐?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난다 썅..
야. 내가 암 말 안하고 있던 시간이 10분도 채 안되.
나 같은 애는 10분 동안 자유롭게 내 감정 표현도 못 할 정도란 거
냐? 니 시다 노릇하느라 하루를 소비한 내 처지는 그럼 뭔데?
결국 내가 어영부영 대충 떠 넘겨서 넘어가긴 했다만 진짜 가관이었어 너. 알아?
나중에 술 다 먹고 컴터 하면서 툭 던지는 말로 '힘내'이럴 땐 진짜 아오..
어차피 하인 취급하던 애 말, 귀찮으면 나중에 아예 그런 걷치구레 말이라도 하질 말던가.
더 가관인건 그 말 하고 나서 또 넌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도 나에게 전화를 했지. 다음주에 피부 관리 받으러 갈 때 따라와 달라고.ㅋㅋㅋ
솔직히 진짜 가기 싫은데, 뭐라고 댈만한 핑계가 없어서 짜증도 나고 해서
글로나마 이렇게 주절댄다. 뭐 넌 어차피 여기 모르니까 읽을 일도 없겠지만
나중에 내가 성공해서 너희 부모님께 빚 갚으면 그땐 진짜 두번다시 안 보고싶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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