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들,"허리26인치,나는돼지다"
시사IN Live | 2011.08.29 오전 9:48
소녀는 텔레비전을 편하게 보지 못한다. 모처럼 학원을 가지 않는 주말이었다. 박자영양(가명ㆍ1 2)은 오랜만에 턱을 괴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가요 프로그램에서는 걸 그룹 티아라의 무대가 한창이었다. 박양은 연방 "예쁘다"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4분 남짓 동안 표현 은 점점 구체적이 됐다. "지연이 다리 길고 예쁜 거 봐" "효민이 허리 한 줌밖에 안 될 것 같아." 뒤 이어 나온 에프엑스를 보면서도, 미스에이를 보 면서도 박양은 공연보다는 그들의 몸을 '감상'했 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이내 전신거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거울 속 제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 는다는 듯 박양은 간간이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 나는 얼굴이 왜 이렇게 커? 거기다 허리는 26인 치나 되잖아. 아, 나 너무 돼지 같아.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그런 박양을 지켜보는 엄마 송명아 씨(42)의 마음도 복잡하다. "'너는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라는 말도 소용없다. 아이가 너무 스트레 스받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저런 날은 밥도 잘 안 먹는다. 다른 엄마들 얘기 들어보니 우리 집만 의 일은 아니더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2009년 전국 16개 시도 중ㆍ 고생 7000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체중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식사를 기피하거나, 폭식 후 구 토를 하는 식이장애 고위험군에 속한 청소년은 1 2.7%다. 정상 체중인데도 자신이 비만이라고 여기 는 청소년이 40%에 육박했다. 키 158㎝, 몸무게 48 ㎏인 박양 역시, 지극히 정상이다. 그러나 박양은 자신이 좀 더 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은 굶 어서도 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얼굴이 문제예 요."
청소년기의 2차 성징은 도둑처럼 온다. 갑자기 일 어나는 몸의 변화는 수습이 안 된다고 느껴질 정 도다. 따라서 몸에 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커지게 된다. 그러나 청소년이 몸에 대해 얻는 정 보는 대부분 '이미지'로부터 온다. 학교에서 나름 '얼짱' 취급을 받는 허진혁군(17)은 요즘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지난해 갑자기 키가 15㎝ 훌쩍 자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얼 굴선이며 골격이 굵직하게 변하거나, 수염 자국 이 퍼렇게 생기는 게 영 마땅치 않다고 했다. 허 군은 기자에게 되물었다. "누나도 어려 보이는 미 소년이 좋지 않나요?"(웃음)
다이어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급증
청소년이 외모와 몸의 기준을 세우는 데 큰 역할 을 하는 것이 대중매체이다. 최근 <내 몸을 찾습 니다:S라인을 꿈꾸는 청춘에게>(양철북 펴냄)를 묶어낸 건국대 몸문화연구소의 고민도 여기서 출 발했다. 김종갑 소장(몸문화연구소)은 "청소년들 이 대중매체가 제시하는 이미지에 집착하면서, ' 열등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안타까웠다. 일방적 으로 전달되는 시각 문화에 대해 철학적인 성찰 을 하도록 돕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대중매체는 몸을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 수 있 는 것으로 보여준다. 이는 다이어트 서바이벌 프 로그램의 증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텔레비전 은 요즘 '살과의 전쟁' 중이다. 최장수 다이어트 프로그램 <다이어트 워>(스토리온)는 시즌5에 돌 입했다. 매주 가장 적게 몸무게를 감량한 참가자 가 탈락하는 <다이어트 리벤저>(E채널)도 2기를 모집하며 순항 중이다.
여기에 공중파 채널도 가세했다. SBS는 <스타킹> 의 한 코너이던 '다이어트 킹' 시리즈를 단독 프로 그램으로 만들어 8월28일부터 <빅토리>라는 이 름으로 편성한다. 2000여 명이 지원했고, 이 중 20 명이 트레이너 숀 리의 특별 훈련을 받는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상금 1억원을 비롯해 각종 부상을 줄 예정이다. KBS <개그콘서트>의 '헬스걸'은 개 그맨 권미진과 이희경이 다이어트하는 과정을 개 그 소재로 삼았다. 두 사람은 한 달 사이 모두 36 ㎏을 감량했다.
다이어트뿐이 아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나 <겟 잇 뷰티>(모두 온스타일) 같은 '변신' 프로그램도 인기다. 변신을 원하는 지원자들을 위해 성형외 과ㆍ치과ㆍ피부과 의사, 스타일리스트 등이 총동 원된다. 이들 '조물주'는 지원자의 몸을 마음껏 주 무를 수 있는 반죽 취급 하고, 이들의 변신 결과 물을 통해 시청자들은 몸과 아름다움에 대한 기 준을 세운다.
청소년 프로 주요 광고주는 피부ㆍ성형외과
전 국민이 이처럼 '몸 만들기'에 열중하는데 청소 년이라고 빠질 수 없다. 하물며 청소년들을 타깃 으로 해 아이돌 멤버들이 주로 DJ를 맡는 오후 8 ~12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붙는 광고도 성형외과 ㆍ피부과 광고가 주를 이룬다.
ⓒ뉴시스 ‘몸이 변하면 삶도 변한다’
로그램 <빅토리>(위)의 캐치프레이즈는 상징적이다.
<몸에 갇힌 사람들>(창비)을 쓴 정신분석가 수지 오바크는 "대중매체는 신체의 문제를 놓고 경쟁 을 벌일 기회를 제공하고, 우승자는 머리에서 발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바꿀 기회를 부상으로 얻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때문에 강박을 갖게 되고, 이러한 공격은 지금 우리가 깃들여 살고 있 는 몸을 당장 변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된 다"라고 지적한다.
고혜민양(18)은 지난 겨울방학 때 120만원을 들여 쌍꺼풀과 눈 앞트임 수술을 했다. 졸업 앨범을 찍 기 전에 미리 해두는 게 좋다고 부모님을 설득했 다. 반 친구 30명 중 혜민양을 포함해 5명이 이미 쌍꺼풀 수술을 했다. "요새 쌍꺼풀 수술은 성형으 로 치지도 않잖아요. 제국의 아이들(아이돌 그룹) 광희는 전신 성형도 했다던데요, 뭐. 저는 광희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 해서 위험도 감수한 거잖아요. 저는 그거 노력으 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야 (수술)하 고 싶어도 돈이 없어 문제죠."(웃음) 수술 이후 자 신을 부러워하는 아이들이 늘었다는 혜민양은 외 모야말로 경쟁력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은 제국의 아이들 광희의 경우처럼 성형을 이슈화ㆍ마케팅화한다. 한 아이돌 그룹은 멤버들 모두 합쳐 성형을 27번 했다고 말하며 '경 쟁'을 노골화하는 한편, 성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을 털어놓으며 눈물짓기도 한다. 이처럼 성형에 익숙해지면서 청소년들은 거리낌 이 없다. 성형외과가 밀집한 서울 강남 일대를 끼 리끼리 몰려다니며 '성형 투어'를 하고, 각 병원의 가격을 비교하며 '성형 쇼핑'을 한다. 필요한 건 두둑한 지갑과 결단이며, 시간적 여유일 뿐이다. 강남의 한 성형외과 의사는 "연예인들이 이미 실 증 사례로 존재하지 않나. 요즘 병원에 오는 10대 들은 매몰법이니, 절개법이니 운운하며 의사인 나보다도 더 성형에 대해 아는 척을 한다"라고 말 했다.
이 같은 청소년의 관심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 다. 서울시 통계 웹진 'e-서울통계' 제46호(2009년) 에 따르면 여학생의 54.6%, 남학생의 42.4%가 '외모 를 가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할 수 있다'라고 응답 했다. 2007년 여성민우회가 '외모인식 개선 교육 프로그램'을 하며 4개 중ㆍ고등학교 1648명을 대 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을 때도 '외모에 만족하 지 않는다'라고 답한 청소년 중 76.8%가 '나도 성 형수술을 하고 싶다'라고 답했다. 당시 여성민우 회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기가 꿈꾸는 이상 적인 모습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여학생들의 그 림은 천편일률이었다. 몸무게 45㎏, 오똑한 코, S 라인 몸매, 하얀 얼굴, 쌍꺼풀 있는 큰 눈, 긴 손가 락….
이영아 연구원(몸문화연구소)은 아름다움은 결 국 '통계'라고 말했다. "근대에 여성의 의복이 위 생상의 문제로 한복에서 양장으로 바뀌면서 짧은 치마가 도입됐다. 이를 통해 다리를 드러낸 여성 이 많아지면서 다리를 '보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 고, 각선미라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판단 기준이 생겼듯이, 이미지가 무차별로 살포되는 현대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화제가 됐던 가수 옴므의 '남자니까 웃는 거야'를 패러디한 '여자니까 굶는 거야'의 노랫말 은 상징적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봐/니가 나라면 , 출렁이는 뱃살 넌 좋겠니/꼭 먹고 싶지만 입 막 는 거야/화가 나지만 눈 돌리는 거야/다 먹고 싶 지만 참는 거야/정말 슬림하게 몸매 만들 거야." 시각 문화에 길들여져 '열등한' 정체성을 갖고 있 는 청소년들은(또 그렇게 자라난 사람들은) 어떻 게든 자신의 몸이 '10점 만점에 10점'이 되길 원한 다.
시장(산업)은 이를 위해 지갑을 열라고 강요한다 (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럴 여력이 없으면 하 다못해 굶으라고 조언한다. 몸을 가꾸는 '이렇게 나 많은 수단'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노력하지 않 는 것은 비난 대상이 된다. '착한 외모 종결자'들 은 텔레비전을 점령했다. 이들은 몸무게에 집중 할 뿐,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와 위험에 대해서 는 충실히 알리지 않는다. 그렇게 몸은 '열심히 노 력하고 신경 쓴 결과를, 혹은 게으름 부리고 실패 한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 취급을 받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계급이 사라진 새로운 사회에서 (상층 에) 쉽게 편입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이다.
"외모 집착 현상은 전염병이다"
물론 청소년들이 몸에 집착하는 것을 대중문화나 시장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장근영 한국청소년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발달 특성상 청소년이 몸 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체성 정 립의 시기에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정체성의 소 재는 매우 빈약하다. 남이 인정해주는 것은 외모 나 성적 같은 외적 요인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씨는 청소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어른들이라 고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외모를 대체할 요소들 로 정체성을 구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어른들부터 외모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지 오바크는 이 같은 현상을 전염병으로 규정 하고 현대를 '몸의 문제에 잠식당한 사회'라고 진 단한다. 그녀에 따르면 이런 사회는 기이하다. "뚱 뚱한 것은 나쁘고 날씬한 것은 좋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상할 정도로 반성의 기미가 없다."
김종갑 몸문화연구소 소장은 말한다. "우리가 아 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아름답다고 여 기도록' 주위에서 영향받고, 교육받고, 세뇌된 결 과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여러 가지라는 것, 대 중매체가 제시하는 몸도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청소년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장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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