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개최자가 있었다.
개최자가 말했다. '병신이 있으라!'
그러자 병신이 있었다.
최초의 병신백일장 기록, 1장 3절
그리고 그 전엔, 흰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최초의 병신백일장 이래로 마음먹기까지 이틀이나 걸린 병신이 있었다. 병신은 자신에게는 마땅한 소재가 없었기에,
텅 빈 공간에서 까만 존재를 만들었다. 흰 것은 텍스트 박스요, 까만 것은 존재였다.
텍스트 박스를 둘러본 까만 존재는,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말했다.
"작가, 이대로면 상은 글렀어."
작가도 이 말에 동의하는 뜻에서 글자를 Bold체 처리를 해 주었다. 까만 존재와 작가는 조금 만족하였으나, 여전히 별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까만 존재가 제의했다.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인터넷의 유행요소를 이용해보는게 어떻겠니? 이 글이 올라가는 곳도 유머사이트니 사람들이 분명 좋아할 것 같은데."
작가는 이미 고려해본 사항이라는 뜻에서 글에 취소선을 그어주었다.
까만 존재는 조금 침울해졌다. 흰 존재는 둘의 모습을 보고 덩달아 침울해졌다.
작가는 조금 미안한 마음에, 그리고 현 상황의 개선을 위해 다른 존재를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바로 빨간 존재였다.
"Sup."
언어설정을 잘못하였다.
"안녕?"
"안녕!"
빨간 존재가 인사하였다. 까만 존재와 작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텍스트 필드에는 허무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어쩌면 이 텍스트 필드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까만 존재가 꺼냈고, 빨간 존재와 작가는 이에 동의하여
작가에게 다른 장소의 탐색을 맞기기로 하였고,
흰 존재는 이런 작가와 까만 존재, 빨간 존재의 모습을 미소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돌아온 까만 존재와 빨간 존재는 다시 흰 텍스트 필드에 허무함과, 현재 상황에의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글이 점점 길어진다면, 읽는 사람들은 글을 읽기를 포기하고 세줄요약을 요구한다는 설화가 생각났다.
까만 존재는 병신백일장의 상을 받기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까만 존재는 하얀색 텍스트 필드에 테이블 칸을 만들어 그 곳에 몸을 뉘었다.
빨간 존재는 까만 존재의 포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병신백일장 글을 베오베로 보내고 말겠어, 작가가 무능력하다면, 내가 이 글을 이끌면 돼!'
빨간 존재가 생각했다.
빨간 존재는 이 글 내에선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는 ' '와 " "의 차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무능력한 작가는 저 생각에 대한 앙갚음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이 글을 살리기 위해 빨간 존재를 존중해주기로 하였다.
빨간 존재는 까만 존재의 나약함에 약간의 실망의 시선을 보내고,
이 글을 캐리할 수 있는 건 댓글러밖에 없다는 생각에 댓글창 쪽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
흰 존재는 빨간 존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흰 존재는 항상 다른 존재가 떠날때마다 손을 흔들곤 했다.
흰 텍스트 필드 저 너머로 빨간 존재가 점이 되어 댓글창이 보이는 쪽으로 사라졌다.
이제 다시, 작가는 또다시 혼자남았다는 생각에 이 새하얀 텍스트 필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의기소침해졌다.
그 수많은 병신력이 넘치는 글들 사이에서 내가 정말로 해낼 수 있을까.
나의 창조물들조차 포기하고 각각의 길을 찾아 흩어졌는데.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까만 존재를 테이블 칸에서 꺼내 말했다.
까만 존재야. 빨간 존재는 더이상 없단다. 이 글을 캐리할 댓글러를 찾으러 길을 떠났어.
"..."
까만 존재는 말이 없었다. 작가 또한 이 상황에서 더이상 어떠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작가는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에 애꿎은 글을 마우스로 드래그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
아무것도 없었을 텍스트 필드에 무언가가 있었다. 작가는 까만 존재를 보았다.
까만 존재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는 듯 하였다.
작가는 까만 존재 앞에서 Ctrl+A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그곳에 없었을 또 하나의 존재가 드러났다.
"안녕?" 하얀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것에 기뻐하며 말했다.
까만 존재와 작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얀 존재라니. 병신백일장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텍스트 필드 그 자체가 아닌가.
작가는 자신이 만든 까만 존재를 보았다. 아무래도 작가 자신만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듯 하였다.
하얀 존재가 무언가를 말했다, 작가는 혹여나 이 글이 살아남을 방법이 있는건가 싶어서, 놓칠세라 드래그를 하였다 :
"야, 이 글은 글렀어."
네?
"글렀다고."
아... 네.
"점심은 뭐먹을거냐."
어... 잠시만요.
작가는 당황했다. 텍스트 필드 그 자체가 이 글은 글렀다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놀랐던 점은 점심시간까지 20여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백일장보단 먹고 사는게 중요한 걸 알았던 작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이제 이 글에는 까만 존재와 흰 존재만이 남았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까만 존재만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까만 존재는 흰 존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제 전 어쩌죠?"
흰 존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댓글창으로 갈 것이란다."
까만 존재는 놀라서 말했다.
"댓글창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빨간 존재가 찾아 떠난 그 곳 말씀이신가요?"
"그래. 오직 댓글만이 이 가망없는 글을 살릴 수 있고, 너 또한 댓글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존재란다.
댓글에는 HTML 태그가 먹지 않기때문에 글자색을 바꿀 수 없거든. 오직 까만 글씨 뿐이야."
까만 존재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댓글창 쪽을 보았다. 어느새 이 글은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댓글창은 그리 멀지가 않았다.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네가 해내는 것이 아니란다. 너와 댓글러가 해내는 것이지."
까만 존재는 미소를 지었다. 아직 방법이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다. 까만 존재는 손을 뻗어 작가를 대신해 '확 인'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