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호텔 예식비용은 하객 1인당 25만원 정도다. 12월은 할인해줘서 조금 저렴하다. 그래도 비용이 1억 원을 쉽게 넘어간다. 예약이 쉽지 않다. 12월까지 주말은 저녁 결혼식을 빼고 모두 예약이 끝났다.
불과 몇 년 전 1인당 10만 원 정도였던 시내 특급호텔 예식의 식사비용은 지금은 15만원을 넘어간다. 10만원 축의금 봉투가 미안해진다.
그래도 수개월씩 예약이 밀린다. 꽃값만 천만 원이 넘는 곳이 많다. 올 성장률전망치가 2.7%(한국은행)로 또 내려갔다. 경기가 걱정이다. 그런데 경기가 진짜 나쁜가?
화재기능이 옵션이라는 BMW5시리즈는 자동차의 나라 미국만큼 팔린다. 벤츠 E클래스는 제네시스 G80보다 더 잘 팔린다. 올 1월과 3월 급기야 미국 판매량을 뛰어넘었다(미국은 우리보다 자동차 시장이 10배인 나라다). ‘벤츠 E클래스’는 국내에서 독일보다 더 팔릴 때도 있다.
특이한 게 있다. 우리가 자주 이용하지 않거나, 한 번도 구입해 본 적이 없는 재화나 서비스가 유독 잘나간다. 올 2분기 백화점 매출은 전년 대비 겨우 2.2% 올랐다. 그런데 백화점 안에서 파는 해외 명품은 전년대비 13.5% 판매가 늘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대형 마트는 오히려 -3.0%, 매출이 줄었다. (자료 산업통산부)
일반인은 구경하기도 힘든 미술품 경매시장까지 호황이다. 서울옥션은 올 들어 주가가 3배나 올랐다. 그런데도 다들 경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소득 몇분위 가처분 소득 증감율>뭐 이런 거 따질 필요도 없다.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 본 통계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통계 하나. 고객이 은행에 맡긴 10억 원 이상의 고액예금 잔액이 500조 원에 육박한다(올해 우리 정부 예산이 400조다). 물론 사상최대치다. 지난 5년간 15%나 늘었다(자료 한국은행 /2018). 물론 수백만 원, 수천만 원 저축한 사람들의 예금 증가율을 큰 폭으로 뛰어넘는다.
지대상승이 노동생산성을 초과하면 임금이 오를 수 없다거나(헨리 조지), 자본을 통한 이익 증가가 성장률을 넘어서면 노동수익이 쪼그라든다는(토마스 피케티) 이론을 들억이지 않더라도 커지는 빈부 격차의 ‘정황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몇 해 전만 해도 연봉 1억이면 근로소득 상위 1%안에 들었다. 그런데 지금 상위 1%안에 들려면 연봉이 2억4천만 원은 돼야한다. 그런데 금융소득 상위 1%는 연 평균 44억 원을 번다.
더 일상 깊이 들어가 보자. 강남 고속터미널의 식당들. 냉면집, 설렁탕집, 중국음식점... 대부분의 메뉴가 7~8천원 수준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1~20% 겨우 올랐다. 터미널을 오가는 보통 사람들의 구매력이 겨우 그만큼 올랐단 뜻이다. 동네 순대국이나 미용실 커트의 소비자 가격은 1천원 올리기가 쉽지 않다. 아니 못 올린다. 보통 사람들의 구매력이 따라 높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차의 대형차 판매가격은 훨씬 더 올랐다. 그랜저나 에쿠스라인(지금은 EQ900)은 10년 전에 비해 거의 2배(100%) 가까이 올랐다. 구입하는 소비자층의 구매력이 그만큼 올랐다는 것을 방증한다. 나뚜찌 소파도, 샤넬 핸드백도 모두 10여년 만에 두 세배 씩 훌쩍 올랐다. 그래도 잘 팔린다.
특이한 것은 언론이다.
상당수 언론이 이들이 얼마나 풍족한가를 보도하기보다, 다들 어렵다고 보도한다. ‘건물주도 어렵고, 다주택자도 어렵고, 심지어 재벌도 어렵다...’ 눈물 날 만큼 걱정한다. 그들의 재산세도, 종부세도, 양도세도, 증여세도, 금융소득종합과세도 걱정이다.
진짜 이들에게 조금 더 과세하면 시장경제가 힘들어질까? 70년대 미국의 소득세 최고구간 세율은 70%을 넘어갔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가난한 계층에는 혜택이 주어진다. 교회는 물론이고, 대학이나 병원도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준다. 저소득층은 전기요금도 깎아 주고, 핸드폰 요금 할인도 해준다. 정부는 저소득 농어민에게 매달 국민연금 보험료의 절반을 대신 내준다.
그런데 금융은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자를 더 받는다. 대출을 못 갚으면 거기서 또 올려 받는다. 가난에는 이자가 붙는다. 그래서 불리하고 또 불리해진다. 한번 가난해지면 좀처럼 일어나기가 어렵다.
시장경제는 수백년 전부터 이 문제점을 계속 고쳐왔다. 그런데도 격차가 자꾸 커진다. 우리사회는 특히 자본이득이 쉽다. 지대추구가 쉽다. 이걸 알아차리고 다들 ‘건물주님’이 되려고 한다. 축구선수도 정치인도 의사도, 꿈의 종착점은 ‘건물주님’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는 이자의 종착점도 여기다.
보통 어느 조직의 슬로건은 그 조직의 약점을 반영한다. ‘동반성장 ’이라는 정부의 슬로건은 미안하지만, 동반 성장하지 못하는 우리 경제의 약점이 숨어있다. ‘3% 성장’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수십 배 성장하고, 누군가는 마이너스 성장하지만 3%라는 숫자로 정리되고 가려진다.
격차의 문제는 논쟁조차 쉽지않다. 자꾸 이념문제로 희석된다. '지금 거지가 조선시대 양반보다 잘먹는다’ 같은 황당한 논거들이 쏟아진다. 그러다 진영논리로 갈무리되고, 그래서 대안을 논하기도 전에 서로 얼굴을 붉힌다.
‘커지는 격차’와 ‘격차 해소’는 ‘초등학교 급식에 설탕을 줄이자’같은 선명한 명제다. 자유주의 진영 학자 누구도 이를 부인한 사람이 없다. 다만 해법이 달랐을 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같은 학자도 모두 같은 소득세를 내고, 그 평균값에 못미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마이너스 소득세(돈을 정부가 지원하는)를 걷자고 했다. 이 경우 가난한 사람이 일 할수록 더 많은 정부 지원을 받는다(지금 정부가 하는 ‘근로장려세제’도 이런 아이디어를 베낀거다). 자유방임을 외치는 경제학자 누구 하나 ‘소득 격차’를 외면했단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우리는 ‘격차 해소’가 여전히 뜨거운 주제다. ‘격차가 자꾸 커진다’고 하면 ‘베네수엘라처럼 될 것이냐?’고 되묻는다. ‘조금 더 나눠보는 건 어떤가’ 란 주장은 ‘그들도 힘들어요!’ 라는 구호에 밀린다. 그런데 진짜 다 같이 힘든가? 참고로 우리나라 주택 보유 국민 중 상위 100명이 보유한 주택은 총 1만4천663채다. (자료 국세청 /2017 기준) 이들이 소유한 집의 공시가격을 모두 합치면 1조9천994억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