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민간부문이 주머니를 여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앞날이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어느 누가 감히 주머니를 열겠습니까? 따라서 이럴 때는 정부가 과감하게 주머니를 열고 돈을 풀어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돈을 푸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자주 쓰이는 것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입니다. 쉽게 말해 정부 주도로 여러 가지 토목사업을 벌여 돈을 푼다는 뜻입니다. 케인즈(J. M. Keynes)가 확장적 재정정책을 통한 경제활성화를 주장한 이래 가장 흔하게 쓰인 방식이 바로 이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경제의 상황하에서는 정부가 SOC 투자에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 정부에게 적극적으로 SOC 투자 확대를 모색해 보라는 충고를 해준 적도 있습니다. 그 동안 현 정부는 SOC 투자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24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공공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예타) 조사의무 면제 소식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조치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문제될 것이 너무나도 뻔한 데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SOC 투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큰 규모의 공공사업들에 대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예타 의무를 면제시켜 준 데 있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도대체 내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문재인 정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나 같은 지지자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일은 이 정부가 MB, 박근혜 정부와 비교해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를 듣는 것입니다. 절차적 정의를 밥 먹듯 무시했던 그 두 정부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거북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조치는 그 두 정부와의 구별을 어렵게 만드는 한 요인을 제공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조치가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MB 정부의 그 악명 높은 ‘4대강사업’을 새삼 떠올리더군요. 예타 면제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문제되는 점도 비슷하고, 낭비될지도 모르는 국가의 돈 규모도 거의 비슷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니까요.
전 국토를 파괴한 망국적 4대강사업과 비교되는 것이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정부가 이런 결과를 자초한 셈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예상에 앞으로 두고두고 이 일이 현 정부의 발목을 잡게 될 악재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정부가 원칙을 얘기할 때마다 이 일을 예로 들어 반박하고 나서는 사람이 줄을 설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예타 면제의 근거로 지역균형발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궁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지역균형발전이 예타 면제 이유 중 하나니까 법률적으로만 보면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대규모 사업을 동시에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분 하나로 정당화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정치적 의도가 그 배경에 깔려 있었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오는 것 아닙니까?
문재인 정부가 MB, 박근혜 정부와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고집스럽게 절차적 정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는 적폐청산이 더욱 강력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경제 살리기가 급하다는 이유로 이번 일처럼 적당히 넘어가려 한다면 여론의 질타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무리수가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목적지에 조금 늦게 도달한다 하더라도, 모든 일을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식으로 추진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합니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무리수를 거듭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서울대학교 교수 이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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