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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출신으로, 이름은 백안홀도(伯顔忽都)이다. 고려로 시집 온 다른 원나라 황족들과는 달리 이렇다 할 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당시 백안(伯顔) 가문이 원나라 귀족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귀족 출신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
1332년(충숙왕 복위 원년) 당시 원나라에 체류중이던 충숙왕과 결혼하여[1]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음력 3월에 고려로 들어왔다[3]. 충숙왕에게는 고려인 명덕태후 홍씨 등의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도 몽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명덕태후 등을 밀어내고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에 이어 제3비로 기록되었다.
충숙왕 사망 후에는 영안궁(永安宮)에서 지냈다. 1339년(충혜왕 복위 원년) 충혜왕은 그녀를 위해 음력 5월과 음력 7월에 각각 영안궁에서 잔치를 베풀었다[4][5]. 이러한 왕의 잔치에 대해 그녀도 음력 8월에 답례를 베풀었는데, 이 날 충혜왕은 연회가 파한 후에도 술에 취한 척 하고 나가지 않고 있다가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6]. 당시 충혜왕은 경화공주가 저항을 하자 송명리(宋明理) 등을 시켜 공주를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또 충혜왕은 경화공주 외에도 부왕 충숙왕의 제4비인 수비 권씨(壽妃 權氏), 외숙 홍융(洪戎)의 처 황씨(黃氏) 등을 강간하는 등 그 패륜이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7].
이 일이 있은 다음날 경화공주는 이 일을 치욕스럽게 느끼고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사들이려 했으나, 충혜왕이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희비 윤씨의 아버지) 등에게 명하여 마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여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자 경화공주는 심왕파이던 조적(曺 頔)에게 자신이 강간당한 일을 고자질하였고, 충혜왕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조적이 경화공주 편에 서서 군사를 모으는 바람에 연경궁의 충혜왕 일파와 영안궁의 경화공주 일파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적은 이때 충혜왕에게 살해되었다[8]. 얼마 후 이 일을 알게 된 원나라가 사신 두린(頭麟) 등을 고려에 파견하여 경화공주에게 황제가 하사한 술을 올리고 충혜왕의 옥새를 빼앗아 공주에게 넘겼으며[9], 충혜왕은 원나라로 압송하였다. 이후 경화공주는 정사를 처결하면서 충혜왕의 총신이었던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를 정동성(征東省)에 가두고, 김지겸(金之謙)을 권정동성(權征東省)에, 김자(金資)를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使司)에 임명하기도 하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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