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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이 황윤길과 반대되게 ‘왜적이 절대 쳐들어올 리 없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의 임진왜란의 원인을 당쟁으로 몰아가려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 식민사학의 영향일 수도 있겠습니다. 즉 김성일의 말이 왜곡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여타 책에서는 김성일이 뭐라고 대답했다고 나와있냐. ‘왜적들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다.’라고 합니다. 앞의 ‘절대 쳐들어올 리 없다’와는 전혀 다른 어감이지요? 즉 왜적이 침략할 수도 있으나 쉽게 오기는 힘들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왜 선조수정실록에는 왜 ‘김성일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왜적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치게 하였다.’라고 나온 반면 징비록에는 ‘김성일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왜적들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다고 말해’라면서 차이를 보이는가? 그리고 개인이 저서한 징비록보다 국가 차원에서 만든 선조수정실록이 더 옳지 않느냐라고 하신다면 글쎼요. 이식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 주로 참고한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징비록입니다. 징비록을 주로 참고해 해당 기사를 기록하였음에도 가장 중요한 이 부분에서 내용을 교묘하게 바꾸어 놨는데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죠. 제가 바꾼 것도 아니구요.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기 전부터 이미 부산 왜관이나 오억령의 상소 등 전쟁에 대한 소식은 들려옵니다만 일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에 대한 축하, 그리고 문화 교류의 목적, 가장 기본적인 정탐의 목적을 가지고 황윤길과 김성일을 중심으로 한 통신사에 일본에 파견됩니다. 그러나 통신사로 돌아와 선조에게 보고를 올린게 1591년 2월, 반면 전쟁 즉 제 1군인 고니시 군이 승선한 일본 전선이 부산 가덕도에 모습을 들어낸게 1592년 4월 13일입니다. 부산성을 점령한게 4월 14이고요. 님의 말대로 김성일이 황윤길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해온 일본과 이제 겨우 1년 2개월 남은 조선의 상황. 제대로 된 준비나 되겠습니까? 뭐 물론 선조는 그래도 지속적인 전쟁의 조짐이 보이니깐 그래도 전쟁 발발 13개월 이전인 3월부터 전 국가 차원의 전쟁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후에 전쟁을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도요토미의 국서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뛰어넘어 중국으로 들어간다.’라는 노골적인 침공 의지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쟁 발발 13개월 전인 3월에 들어서야 일본군의 침공 예상 루트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성곽 수리, 무기 및 군량 확보, 재능 있는 무신들의 전진 배치 등이 이루어진 겁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민중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냐? 농사도 힘들어 죽겠는데 요역? 우리는 이를 거부한다 하며 사대부든 민중이든 거센 반발과 상소를 올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성일에게 중대한 책임이 있다? 조선이 대신 한 사람의 목소리로 좌지우지되는 그런 국가입니까? 기본적으로 왕이 중심이 되고 왕이 최고 결정권자가 되는 국가 아닙니까? 결국에는 가장 지대한 책임을 가진 인물은 그러한 의견을 수렴하고 결정한 선조가 되지요.
물론 임진왜란의 모든 책임이 선조 혼자에게 있느냐? 또 이건 아니지요. 다만 뭐 김성일이 그릇된 보고로 인해 임진왜란에 있어 가장 큰 원인이 돼었다, 책임이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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