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퍼왔습니다만.
이런 한국인의 행위가 정말 부끄럽고, 안타까울뿐입니다.
저의 추천영화는
PLATOON 입니다. 이건 미국인이 월남에 참전한것을 그린 영화이지만, 베트콩과 관련이 있고, 가슴아픈 일이 있기에.. 올립니다.
"나는 선과 악의 두 아버지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분노는 알아도 베트남인의 한국분노는 모른다.
우리가 저지른 일은 없는 역사공부 우리가 당한 일은 있는 역사공부 우리 또한 역사 왜곡이라 생각한다. 일본이 정당한 전쟁을 한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의 월남전은 그나마 민주주의 국가 창설이라는 조금이나마의 명분은 있었지만. 우리가 저지른 양민학살 그리고 임신부 아이들을 마구 죽인 우리의 행동은 아무도 모른다는게 개인적으로 어이없다.
미군이 우리에게 노근리학살이라는 것을 남겼다면
우리도 역시 베트남전에서 양민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아래는 그와 관련되 기사와 인터뷰입니다.(출처는 한겨레21입니다.)
살아남은 노스님의 증언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인민군대>지 1969. 10. 24)"
(중략)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 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중략)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그 내용이 워낙 끔찍해 자세히 밝히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 군, 프 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판랑에서 헤어진 지 이틀 만에 퀴년시를 조사중인 "나와 우리" 일행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았어요!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 말이에요." 1966년 3월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친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던 응웬탄퐁을 이르는 말이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자료가 점점 두려워지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이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지도 몰라요. 빈딘성을 중심으로 이 자료에 소개된 네 지역말고도 한국군의 학살현장이 더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한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우리에게도 베트남전은 잊고 싶은 전쟁이다. 한국은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 남쪽 붕타우에 파견함으로써 베트남전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후 65년에서 73년까지 약 30만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라는 미명 아래 베트남전선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들도 4960여명이 전사했고 10여만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또한 적군인 베트남인을 4만1450명이나 죽이는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아군 사망자수의 10배에 이르는 적군을 전사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만!
이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종전 24년을 맞는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한켠에서는 새로운 총성이 울려온다. 한국에서는 코소보에서의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도 높다. 20세기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21세기의 또다른 상처 하나를 낳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과정이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양심에 칼을 대는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역사는 우리에게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놓는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호치민.판랑=구수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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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왔고요...
이게 사실이라면 딱히 할말도 없습니다...
일본이랑 다를게 뭐가 있지요?
이걸 보고도 우리가 일본을 욕할 권리가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공개사과를 하고 피해자와 그 모든 사람들에세 진심으로 사과하기를...
진심으로 뉘우치길...진정으로 바랍니다...
락밴드 린킨파크...영원한 우상입니다...ㅠ_ㅠ 더 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_- 흠흠;;
린킨파크 1집 앨범입니다...Hybrid Thoery...명앨범이죠
리애니메이션...Reanimation
2집 앨범 미티오라...앨범 굿이요...
라이브 인 텍사스...가보고 싶었는데...ㅠ_ㅠ
이건 Faint 뮤직 비디오중 한 장면입니다...이걸 보고 뿅 갔습니다..-_-ㅋ
정말 그떄 느낀 선율이란...엄청났습니다...
제가 산 후드티 잇힝..한정판이라내요..
세상은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울지 않는다...
세상은 그냥 거기 있을뿐...
세상은 널 위해 존재하지 않어...
세상에 넌 파묻혀야되...
그래야지 살아남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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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생각하시는 분들...한번 보세요...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하루는
어제 죽어간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내가 죽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다. - A. 말로
모든 희망은 인간에게 허락되어 있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겠다는 희망까지도. -장 로스탕
"하지만 난 당신의 희망이 자살로 이어지질 않기 바란다"
쇼펜하우어의 3대 행복론. 첫째, 사람은 나지 않음이 행복하다. 둘째, 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 행복하다. 셋째, 일찍 죽지 않았으면 자살하라.
"하지만 당신은 벌거벗고 태어났지만 지금은 옷이라도 입지 않았는가...이 인생은 잃기 보다는 얻는게 많다...한번 살아봐라"
술취함은 일시적인 자살이다. 그것으로 인한 행복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순간적으로 불행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버트란드 럿셀
시간을 죽이는 것은 점차적으로 자살하는 것이다. -불케
우울증은 꼭 해야 할 창조적인 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어떤 화가가 자살하려고 가스 스위치를 틀려는 순간, 조금 더 손을 대야 하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는 그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을 그냥 놓아둘 수 없어 자살하려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그 그림의 마지막 손질을 하였다고 한다. -빅톨 프랭크
"당신의 인생은 완벽하지 않다...한번더 뒤돌아 보고 손질하라..."
인생은 유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겐 자기만의 의사로 이것을 포기할 권리는 없다. -톨스토이
자살은 살인의 최악의 형태다. 그것은 후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존 C. 콜린스
"당신도 후회할수 없고 당신 주변도 후회할수 조차 없다..."
자살은 왜 나쁜가? 친구와 친족들에게 괴로운 상처를 지니고 살도록 하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R. 슐러
"지금 떠나면 당신 부모님과 친구들에겐 커다란 상처가 평생 갈것이다..."
자살이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카뮈
"그렇게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는가? 아니다 있다...그것은 당신만이 찾을수 있다..."
자살은 심각한 고민이 낳는 가장 두려운 '증상'이다. -타가다 아키가즈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크나큰 위로이다. 그것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끔찍한 밤을 성공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끔찍한 밤들은 당신에게 인생에서 가장 긴 밤들이었을것이다...그런 생각들을 버리고 한번 살아봐라..."
자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멜로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종의 고백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 A. 카뮈 [시지푸스의 신화]
자살할 힘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 A. 테니슨 [티소나스]
죽으려고 하기보다는 살려고 하는 편이 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련이다. -안피에리
참으로 위대한 철학의 문제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을 괴로워하며 살 값어치가 있는지 없는지의 판단을 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 A. 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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