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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8년 5월 부산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소속인 양병준 감정관의 눈에 심상치않은 감정품이 보였다.
‘분청사기 상감 경태 5년명 이선제 묘지’라는 글씨가 새겨진 묘지(墓誌)였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행적, 자손의 이름, 묘지(墓地)의 이름, 그리고 나고 죽은 때 등을 기록한 글이다. 명문으로 보면 ‘분청사기 상감 경태 5년명 이선제 묘지’는 ‘경태 5년’ 즉 1454년(단종 2년) 글씨와 문양을 백상감한 분청사기로 만든 이선제라는 인물의 묘지라는 것이다. 이선제(1390~1453)는 광산 이씨 상서공파의 5세손이었으며, 세종~단종 등 세 임금을 모시면서 34년동안 학자이자 사관, 관료로 활약한 인물이다.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않은 유물이었다. 양 감정관은 “이 유물은 내 목이 칼이 들어와도 해외로 반출할 수 없다”고 버텼다. 유물 반출은 양 감정관 덕분에 일단 무산됐다.
이 유물은 도굴품이었다. 광주에 있던 이선제의 무덤에서 도굴되었지만 아무도 도굴된지 모르는 유물이었다. 도굴신고가 없었으니 양감정관으로서는 도굴품인지 몰랐다. 그랬으니 묘지를 압류할 수도,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양 감정관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유물을 압류하지는 못했지만 미술을 전공한 최춘욱 감정관에게 실측도를 그리게 했다. 또 묘지 앞쪽과 뒤쪽을 묘사한 그림을 담은 제보 조서를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과 각 공항, 항만 문화재감정관실에 보냈다.
한달 뒤 기어코 일이 터졌다. 밀매단이 서울 김포공항의 세관원을 매수한 뒤 감정절차를 아예 생략한 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이선제 묘지’를 일본으로 밀반출해버린 것이다. 광산 이씨 문중은 신문에 도난-밀반출 기사가 날 때까지 이른바 ‘이선제 묘지’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본 적도 없었다. 무덤 안에 있었던 묘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광산 이씨 문중은 신문에 난 도물 및 밀반출 기사를 보고서야 부랴부랴 묘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당연히 도굴 당한 시기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상의 분신과 다를바 없는 묘지를 잃어버렸으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1454년(단종 2년) 땅속에 묻힌 ‘이선제 묘지’는 언젠가인지도 모르는 시점에 도굴되어 유통되었고, 후손들조차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1998년 6월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던 것이다.
이 유물은 결국 뒤늦게 불법반출을 확인한 일본측 소장자의 조건없는 기증에 16년만에 무사히 환수됐고. 지난 6월17일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됐다. 이 과정에서 양병준 감정관이 기록해놓은 실측도와 제보조서는 이 유물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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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이래 언제나 묵묵히 자신의 할일을 하는 분들이 있었고
그 분들 덕분에 그나마 인류가 크게 일탈하지 않고, 진보해 온 듯 합니다.
진보인가 퇴보인가에 대해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억압과 억울함의 총량이 줄어드는 쪽으로 조금씩 나아온 것만은 사실이니까
저는 노대통령의 -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진보하는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어차피 개개인의 선택이겠죠
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1105122614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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