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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취임한 유시춘 EBS 이사장 인터뷰 글.
누이의 마음은 알겠지만, 이미 알게모르게 시민들은 유시민을
마음속으로 부르고 있는지도...
이 사회와 미래를 위해 추구하는 한결같은 가치가
멋진 오누이 같네요...ㅎㅎ
유시춘 EBS 이사장
1985년 서울 장훈고에서 해직된 이후 ‘유시춘’ 이름 앞엔 온갖 ‘민’자 돌림 단체의 직함이 붙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결성식 사회를 보고 왔더니 경찰들이 교장 멱살을 잡고 “빨갱이 선생을 데리고 있다”고 소란을 피웠다. 곧바로 해직됐다. 15년 교사, 작가 ‘유시춘’(67)은 그 뒤 민가협 총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민화협 공동의장을 거쳤다. 2001년 말부터 2004년 초반까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도 맡았다. 어떤 자리든 ‘의분’이 끌고 왔다. 지난 9월 17일 이후 또 하나의 이력이 더해졌다. EBS 신임 이사장. 유 이사장은 “작가, 인권운동가, 교사, 엄마의 이름은 미래세대를 위해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소신이었다. 다 쏟아붓겠다”고 다짐했다.
노무현재단 설립부터 관여했던 유 이사장은 2016년부터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최근 ‘10·4 남북공동선언 11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평양을 다녀왔다. 2007년 5월 고 리영희 선생, 박용길 장로, 고은 시인과 함께 경의선 개통식에 참석한 이후 11년만의 방북이지만 평양행은 처음이었다. 1972년 7·4공동성명부터 시작된 남북의 약속을 북측은 잊지 않고 있었다. 유 이사장은 “90%의 큰 희망이 10%의 작은 절망을 덮었다”고 방북 소회를 밝혔다.
동생 유시민 전 장관은 ‘운명’이라고 했다. 업어 키우고, 자전거도 사주고, 독일 유학도 뒷바라지 했던 피붙이 동생이지만 민주화운동 동지로 고난의 행군을 함께 했다. 최근 유 전 장관이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선임되면서 정치 복귀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유 이사장은 “누나로서, 정치하길 바라지 않는다. 정치할 때 너무 힘들어 했다”고 했다. 지난 9일 경기 고양 EBS 신사옥 20층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EBS 이사장 ‘유시춘’
유 이사장은 EBS 애청자다. 평소 텔레비전을 자주 보지 않지만 EBS 채널은 즐겨찾기로 저장해 뒀다. 다큐, 문화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편이다. 애청자가 이사장이 됐다. 유 이사장은 “교사였던 때나 민주화운동가였던 때나 내 삶을 관통하는 핵심은 후세대를 정의로운 시민으로 길러서 좋은 국가,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취임 소회를 밝혔다.
-취임을 축하한다. ‘EBS 이사장’ 스스로 적임자라 생각하나.
“내 돈 내고 민주화 관련단체 일을 할 때도 나랏돈을 받고 일할 때도 내 소명은 분명했다. 어른으로서 미래세대를 위한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90년대만 해도 시민학교 청년학교 예술학교 등 재야에선 ‘학교’가 유행했다. 사회 구석구석마다 민주적 가치를 일깨우자는 차원에서 학교를 만들고 강사로 활약했다. 그때도 훌륭한 국가, 민주주의 성장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표가 강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국민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공익방송인 EBS에서 일하게 된 것 역시 일관된 내 소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라 여긴다. 적임자라 생각한다. ”
-EBS 사옥 곳곳에 리스타트 운동이란 문구가 붙어 있다.
“새로운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진화했다. 신인류다. 지적으로도 뛰어나고 문화 예술적 기량도 뛰어나다. 언론 시장에서 높은 수준의 공급집단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성 사유화에 대한 분노로 탄생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정비됐다. 문명사적으로 의미 깊은 국가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새 세대들은 엄청난 자부심을 갖는다. 그런 수요자들 수준에 상응하는 컨텐츠를 생산하자는 운동이다.”
EBS 일하는 건 내 소명…1조원 사교육비 줄이는데 수신료 70원뿐
아이들에 묘향산 두만강 야생화 보여주고파, 통일부가 도와줘야
-‘좋은’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의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다. 구상하는 방향이 있나.
“세계테마기행, 다큐 프로그램 등 지적인 즐거움을 주는 측면에선 EBS가 국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사회가 최고의결기구이기는 하나 프로그램 적절성 여부에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교육도 시대와 국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남북 평화프로젝트가 세계적 관심사로 부상하는 시점에 남북 교류에 신경쓰고 싶다. 북한 테마기행을 생각하고 있다. 통일부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70년째 못가본 묘향산, 개마고원, 원산앞바다, 두만강 백두산의 야생화 등을 찍어서 보여주고 싶다. 북한 올레길(이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과 ‘피스코리아 올레’라는 이름도 지어놨다)도 만들고 싶다. 북한이 그리운 산하라는 것에서 출발해 한반도 평화의 당위성과 기대,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데 EBS가 기여하고 싶다.”
-취약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신임 이사장의 과제일텐데.
“EBS는 1조원 사교육비 절감,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 등 엄청난 공익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재정의 공공성은 너무 취약하다. 2500원 수신료 중 70원(3.7%)만 수익으로 갖고 온다. 이 불합리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 방송법의 ‘KBS 수신료’ 규정을 ‘공영방송 수신료’로 바꿔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가‘공영방송 수신료 산정 및 검증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안다. 수신료의 합리적 배분, 지출 검증 등을 투명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다. EBS가 시민교육에 기여한 측면이 큰데 재정은 KBS에 너무 종속적이다.”
-취임하자마자 장해랑 사장 퇴진을 둘러싼 노사갈등과 마주하게 됐다.(전국언론노동조합 EBS지부는 현재 장 사장의 ‘UHD 밀실각서’ 의혹을 제기하며 퇴진운동을 벌이고 있다.)
“장 사장은 사장 공모 당시 심사위원 9명 모두 1등을 준 국내 최고 다큐 피디다. 그러나 빼어난 역량을 가진 PD와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경영능력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UHD 문제는 절차상 하자를 인정했고, 문서로써 구속력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데서 빚어지는 갈등도 없지 않다. 노사 대화를 통해 잘 풀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11년만의 방북, ‘안개너머 평양’
유 이사장은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자 마자 23년 전 출간했던 중편 <안개너머 청진항>을 떠올렸다. 비전향 장기수 김 노인의 삶을 다룬 유 이사장의 소설이다. 김 노인은 고향 청진에서 만난 의형제 손광목씨를 보고 싶었지만 손씨는 끝내 김 노인을 외면했다. 니편 내편으로 갈렸던 한국 사회가 김 노인을 빨갱이로 낙인 찍었고 의형제 손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빨갱이’라는 주홍글씨는 그후로도 오랫동안‘종북’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이 소설로 200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 초안 정리위원회에 합류했지만 비전향 장기수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유 이사장은 보수단체의 표적이 됐다. 순안공항이 보일 때부터 역사의 파랑새가 다시 어깨 위에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안개너머 평양’은 김 노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청진의 또 다른 고향이었다.
-11년만의 방북 소회를 들려달라.
“평양은 처음이다. 방북 전날 설레서 잠을 2시간 밖에 못잤다. 첫 세계여행을 앞둔 심정이었다. 서해 직항로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며 비행기 창밖으로 본 첫 풍경은 마치 강화 교동도에서 서해의 작은 무인도를 내려다 본 느낌이랄까. 백령도에서 황해도 장산곶까지 14㎞다. 일산 우리 집에서 신촌 정도 거리에 불과하다. 옥류관 오찬장 밖 베란다에서 대동강변, 능라도, 평양시내 신축건물 빌딩이 보였는데 마치 강변북로 카페에서 여의도를 보는 느낌이었다. 전직 통일부장관들과 같이 다니며 일정을 소화했다. 모두 10·4, 6·15 선언 실무총괄자들이었다. 김대중정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평양이 달라졌다며 감격해 했다. 정 전 장관은 옥류관 오찬에서 평양냉면을 3그릇이나 비웠다.”
90% 희망과 10% 절망 안고 방북…큰 희망이 작은 절망 덮기를
미국, 스스로 만든 세계인권선언 가치 존중해 북에 인류애 보여야
유 이사장은 옥류관에서 문익환 목사를 생각했다. 1989년 문 목사가 감옥을 나오자마자 어깨를 치면서 “내가 생전에 옥류관 냉면 먹여주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유 이사장은 인터뷰 중간중간 남측 인사를 맞이하는 북측의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전했다. 평양대극장 공연에서 홍도야 우지마라, 황성옛터 등의 노래가 메들리로 나오는 등 모든 행사에 남측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조평통과 통전부 소속 직원 5명이 방북단 1명을 맡았다. 한 40대 북측 인사는 “유시춘 선생님이십니까, 유시민 이사장 누납니까”라고 물었다. ‘어찌 아냐’고 했더니 “남측 뉴스를 많이 본다”고 했다. 남북정상회담, 미국 대응 등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고 전했다.
-방북단 대부분이 평양의 변화를 말한다. 노무현재단 이사로 본 느낌은 달랐을 것 같다.
“90%의 희망과 10%의 절망이라고 할까. 2박 3일 내내 큰 희망이 작은 절망을 덮을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 왔다.”
-90%의 희망은 무엇이었나.
“폐쇄국가를 벗어나 국제사회라는 광장으로 나가고자 하는 갈망을 온몸으로 느꼈다. 1972년 7·4공동성명부터 2018년 4·27 판문점선언까지 남북이 합의한 기본원칙을 확고하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10·4 선언 11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한 북측 인사들 모두 ‘이행’을 강조했다. 1972년 7·4공동성명을 시작으로 노태우정부 7·7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정부의 6·15 선언, 노무현정부의 10·4선언, 그리고 문재인정부의 4·27 판문점선언까지 남북의 약속은 확고하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다. 특히 10·4 선언은 이 원칙을 이행하는 내용을 구체화했다. 이행에 대한 촉구와 갈망, 이것만한 희망이 있겠나.”
-10%의 작은 절망은 어떤 것이었나.
“남북은 영광과 오욕을 함께 한 운명공동체이자 500년 살다가 70년 떨어져 산 민족이다. 북한은 아직 외로운 섬이었다. 남한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통해 경제강국으로 성장했고 지난해 촛불혁명에서 확인했듯 시민 모두가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란 걸 자각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아직 취약한 편이다. 다양성이 부족한 사회다. 정치적 통일 이전 문화공동체라는 동질성을 회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부터 찾았으면 좋겠다.”
-적대관계 청산 과정에서 미국이 키를 쥐고 있는 점도 10%의 절망에 포함될 것 같다.
“그렇다. 미국이 스스로 만든 세계인권선언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북한이 이제 핵을 버리고 풍요로운 국가로 가겠다고 하지 않나.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문서이자 인류의 성찰이 담긴 문서다. 세계인권선언을 관통하는 핵심은 강자는 약자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남한이 동포애를 발휘해야 한다면 세계의 제국 미국은 인류애가 필요할 때다. 그런 면에서 지금 미국이 북한에 가하는 경제재제는 치명적이다. 미국 스스로 만든 세계인권선언의 가치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북을 도와야 한다.”
■유시민의 누나 유시춘, 유시춘의 동생 유시민
너나 없이 먹고살기 빠듯한 시절, 교사였던 아버지는 장녀인 유 이사장에 지극정성을 쏟았다. 방학이면 학교 도서관 책을 모두 빌려 와 읽혔다. 대구로 유학(대구여고)보낸 장녀를 제대로 돌보기 위해 아버지는 아예 경주에서 대구로 전근을 자청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당시 대구중 제자였다. 아버지는 동양사학, 사주, 역학에 밝았다. 차남 유시민은 굶어죽기 딱 좋은 사주라 민첩해지라고 ‘민’(敏)을 넣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킨 장군 이름이 김시민이라 더 좋았고, 나라 위급할 때 쓰임새있는 사람이 되라는 마음도 있었다. 네째 동생(유시민)이 태어난 1959년 여름, 장녀 유시춘은 아버지 손을 잡고 염매시장에 가서 가물치 두 마리를 사왔다. 해마다 오뉴월이 되면 그때 뽀얀 가물치 국물을 먹고 니가 이만큼 자랐다고 누이는 큰소리친다. 유 이사장 6남매 중 4명이 운동권이다. 둘째 동생 유시정은 전교조 해직교사, 서노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막내 유시주는 희망제작소 소장이다. 6남매에게 유신체제는 피와 감옥이 섞여 있던 시대였다. 특히 누이 유시춘과 동생 유시민은 함께 그 시절의 광풍을 버텼다.
-공직을 맡을 때나 이력이 소개될 때 늘 유시민 누나로 소개된다. 달갑지 않은 꼬리표일 것 같다.
“유시민은 동생이지만 동지이자 내가 고난에 처한다면 가장 먼저 기대고픈 기둥이다. 그런 의미에서 운명이다. 1985년 시민이가 쓴 항소이유서를 내가 인쇄해서 뿌릴 때부터 예견된 운명같은 관계일지 모르겠다. ‘유시민 누나’로 불리는 거 별로 불쾌하지 않다.”
동생이 26살 때 쓴 항소이유서는 내가 을지로서 500부 찍어 배부
경향신문 여론조사 결과는 의외…정치 안 한다는 사람 왜 넣었나
유 이사장은 1985년 민가협 총무를 맡았던 즈음 유시민의 변론을 맡았던 이돈명 변호사가 건넨 먹지 한본을 서울 덕수궁 안에서 읽었다. 동생 유시민이 쓴 ‘항소이유서’였다. 혼자 읽기 아까울 정도로 잘 썼다는 느낌이 들어 즉시 서울 을지로 인쇄소를 찾아 500부를 찍었다. 당시 제록스 복사기계 막 나왔을 때다. 500부를 서울대 총학생회, 법조출입기자실, 민추협·민통련·민가협 사무실에 각 100부씩 뿌렸다. 항소이유서는 온순했던 26세 청년이 투사가 되기까지 심정을 담은 글이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네크라소프의 시구가 인용된 항소이유서는 동아일보 황호택 기자의 칼럼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세상에 퍼졌다.
-유시민 전 장관이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정치권 안팎에선 정계 복귀로 해석하고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적극 권유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도 흡족해 한다. 정치적 사부인 이 대표 권유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미 본인은 정치 안한다고 하지 않았나. 오는 15일 재단 이사회에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지지자들은 ‘정치 안 한다는 말만 절대 하지 마라’고 하고 있다.”(유 전 장관은 연초 한 사석에서 ‘인간관계를 더 좁힐 것’ ‘정치 안할 거라는 거 시청자들이 믿으니 작가로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유 전 장관 주변에선 정치 얘기만 나오면 강하게 손사레를 치는 경우가 줄었다는 말도 들린다.)
-자꾸 유 전 장관 얘기 물어서 미안하다. 그 많은 제의 다 거부하다가 한 소주회사 광고에 출연하고 있다.
“소주광고는 사연이 있다. 그 회사 사장이 호남 사람인데 유시민의 오랜 팬이라며 삼고초려한 거다. 유시민 책 내용을 다 외울 정도였다. 선뜻 출연했다고 이를 정치 재개 계기로 보는 건 과도하다. 그런데 경향신문 여론조사는 정말 의외다. 정치 안 한다는 사람을 왜 후보로 넣었나.”
-유 전 장관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나.
“지식소매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정치도 마찬가지겠지만 공화국 주인인 시민들의 지적 성장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정치를 다시 하게 될 경우도 있지 않을까. 지지층의 ‘호출 요구’도 나오고 있다.
“혈연 관계로만 생각하면 정치 안 했으면 좋겠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0130600035&code=910100&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t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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