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05년의 한 봄학기, 캐나다 토론토의 어느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백인, 중국인 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토론토 땅에서 한국에서 온지 3년이 채 안 되었던 내가 처음
느꼈던 것은, 이곳 학교 유학생들의 폐단 이었다. 항상 자기들끼리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공부도 열심
히 안할 뿐더러 운동, 예술 분야에서도 뒤지고 친구 관계도 소홀히 해 학교안에서 완전히 자기들 세계만
을 만든, 외국학생들이 보면 소위 찌질이 그룹이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보고 난 내가 한국인으로서 학교에 무엇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언제나 생각하곤 했지만, 번번히 실
패 하고 말았다.
농구 팀에 소속되려 해도 흑인들의 타고난 야성에 밀리고, 한국에서 수학을 배워 오긴 했어도 영어가 뛰어
난 게 아니라서 날 때부터 캐나다에서 자란 중국인 학생들을 월등히 뛰어넘을 수 없었고, 게다가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라서 이곳 학생들에게 나의 자랑, 나의 모국인 한국을 표현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다가왔다.. 적어도 한국, COREA를 조금이라도 나타낼 기회가 말이다..
역사 시간, 2차 세계 대전의 원인과 결과를 배우는 도중, 존스 선생님은 말했다.
"이번 단원은 영화 한편을 자료로 끝내려고 합니다. 전쟁이 나타내는 잔혹성, 희생, 갈등 등을 표현해줄 수 있는 영화를 추천해 보세요"
난 기회는 이때다 하고 손을 들어 선생님께 '태극기 휘날리며' 를 추천했다.
물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선생님이야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듣도 본적없는 한국 전쟁영화를
이곳 학생들이 달가워 할 리 없었다. "선생님 그걸 보느니 차라리 진주만을 봐요" "그딴거 알지도 못하는데" ...
하지만 나의 고집으로 태극기(자막 DVD)가 영화로 선택 되고, 다음날 영화가 시작 되었다.
원빈, 장동건.. 영화 컨셉상 잘 꾸미고 나온건 아니지만 오히려 순수해 보이는 그들 이미지가
아이들의 관심을 돌렸다. 특히 원빈이 웃을때 백인 여자아이들의 환호성이란, 나를 뿌듯하게 했다.
역사의 단편을 보여주는 태극기.. 민족간의 갈등과 형제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 사람들은 몰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한 명 불온분자가 있었으니.. 바로 브랜던이란 녀석이었다.
독일 출신의 갑부 아버지에 허구한날 마약이나 하지만, 건장한 체격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학교의 일진 같은 녀석이었다.
이녀석이 선생님 없는 사이에 일어나더니 나의 멱살을 잡았다.
"너같은 옐로우 칭크(chink -중국인을 비하할때 쓰는말)가 갖고온 영화를 보자니 유치하고 눈꼴 시린다"
그가 말했다.. 자신의 영화 진주만이 채택되지 않은게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나같은 녀석이 영화로 인해 잠시 인기가 많아지는게 눈꼴 시렸는지, 아님 공산주의 (이녀석은 자신이 공산주의자의 후손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가 잠시라도 무시되는게 기분이 나빴던지 모르겠지만.. 난 저항 할 수 없었고.. 영화를 끝까지 보고 말하자는 말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때였다, 마지막 장면.. 장동건이 머신건을 잡고 원빈에게 도망치라고 하는 감동적인 장면..
폭음과 총소리에 파묻혀 장렬하게 전사하는 장동건.. 그리고 그 유해를 부여잡고 우는 할아버지 원빈
가장 감동적인 장면.. 영화가 끝나고 아이들은 더 이상 브랜든의 편이 아니었다. 영화는 최고였다며
장동건, 원빈 너무 멋지다며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는 녀석들. 브랜든이 설 곳은 없었다.
난 브랜든에게 말을 걸었다.
"싫어하는 영화를 보여줘서 미안했어"
쑥스러운 듯이 브랜든은 대답했다.
"아니다. 내가 너무 심했어.. 내가 미안하다"
정적이 흐르고 나는 다시 말했다
"아냐.. 이러지 말고 우리 다음 자습 시간에 낚시나 하러 가자"
"그래.. 인생에 언젠가는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