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교섭 결렬
대일 전략물자 금수조치─ 곧 ABCD 포위망은 1941년 완성되었다. 전략물자를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에 있어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의 압력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전쟁에 필수적인 전략자원인 석유를 전부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었는데, 그 수입량 중 8할을 미국에서 들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석유를 쥔 미국이 직접 나서서 전쟁 중지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극단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이 비축한 석유는 전시에 1년 반 동안 사용할 분량밖엔 없었다. 일본군은 선택을 해야 했다. 전쟁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1년 반 안에 전쟁을 끝내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 미국의 석유 금수조치를 해제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쟁을 포기하는 방안은 고려될 수조차 없었다. 4년간 소모한 전비 그 자체가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비축유가 남아 있을 때 전쟁을 끝내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1937년 개전 당시 3개월 안에 중국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호언장담했던 육군은 당당하게 떠벌린 3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상하이上海를 점령하는 데에 그쳤다. 1941년까지 일본군의 점령지는 서부 연안지대와 철도로 연결된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점에 지나지 않았고, 각지에서 중국인 게릴라가 일본군에 파괴공작을 가했다. 미국과 영국의 전비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은 가끔씩 일본군을 패퇴시키기도 했으며 공산당군은 민간으로 침투해 줄기차게 일본군을 괴롭혔다. 4년간 하지 못 한 일을 1년 반, 그것도 석유의 제약에 시달리는 1년 반만에 달성할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일본에 남은 길은 대미 협상에 나서 ABCD 포위망을 푸는 것이었다. 코노에 수상은 히로히토 텐노裕仁 天皇에게 "일본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여의치 않으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취지의 <제국국책수행요령帝国国策遂行要領>을 설명하며 어전회의에서 이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텐노는 대미 결전과 남방작전에 대해 질문한 후,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제국국책수행요령>을 정식으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코노에 수상은 '대미 결전'을 회피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성과가 미진하자 코노에 수상을 비롯한 내각이 붕괴했다. 10월 18일 토조 히데키東条英機 수상이 새로 취임하며 토조 내각이 성립되었다. 육군 출신인 토조가 수상으로 취임했다는 사실은 사실상 일본이 개전을 결심했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11월 5일 어전회의에서는 "무력을 행사할 시기를 12월 초로 정하며 육해군은 이를 위하여 준비한다"는 내용의 개정 <제국국책수행요령>이 승인되었다. 이에 따라 11월 6일 남방작전을 위한 부대가 편성되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대미 교섭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재미 대사 노무라 키치사부로野村吉三郎와 11월 5일 파견된 특명전권대사 쿠루스 사부로来栖三郎가 미국에서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고 미국의 협상안을 본국으로 송달했다. 11월 20일 쿠루스 사부로는 일본의 입장을 담은 협상안을 전달했는데, 여기에는 대일 압박을 멈추고 석유 수출을 재개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다.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은 일본의 협상안을 거부하면서 거꾸로 <헐 노트>라고 알려진 미국의 대일 협상안을 11월 26일에 제시했다. 헐 노트는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의 철수 요구 및 삼국동맹 (=추축국) 탈퇴 요구를 담고 있었다. 협상이 타결되면 미국에 있는 일본 자산의 동결을 해제하고 최혜국 대우가 포함된 새로운 통상협정을 제정하기 위해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제안이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석유 수출 재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새 통상조약'을 위한 협정을 언제 하겠다는 것인지 확정하지 않았다. 사실상 미국이 약속한 것은 자산의 동결 해제가 전부였던 것이다.
헐 노트에는 회답기한이 없었고 잠정적일 뿐 확정된 것이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헐 국무장관의 협상안은 미국의 강경한 태도 (와 아주 약간의 타협을 향한 의지) 가 드러나 있었다. 일본은 이것을 사실상의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 미국 역시 일본이 이 협상안을 받아들일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밖에 없었다. 양국은 고조되는 개전의 분위기 속에서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다 일찍 준비를 끝마친 것은 일본이었다.
헐의 협상안이 전달된 11월 26일 아침, 일본의 공모 기동부대는 진주만을 향하여 발묘發錨했던 것이다.
1. 니이카타를 향하여
일본이 본래 설정했던 '외교전'의 시한은 10월 중순까지였다. 토조 수상은 이를 11월 말까지 약 6주간 연장했고 이것이 결렬될 경우 곧바로 군사행동에 나서기 위한 준비가 외교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육군은 남방작전을 위한 파견군을 조직했으며 남방 파견군의 총사령관으로는 테라우치 히사이치寺内寿一 대장이 임명되었다.
해군은 11월 1일부터 연합함대連合艦隊 사령장관司令長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이 입안한 진주만 공습작전을 채택하고 공습에 참가할 함선을 훈련시켰다. 공습에 참가한 것은 제1 항공전대, 제2 항공전대, 제5 항공전대 (공모 총 6척) 와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이 포함된 호위함대 및 급유선, 유조선 등의 31척이었다. 함대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에토로후 섬択捉島*1의 히토캇푸 만単冠湾이었다. 11월 22일 히토캇푸 만에 집결한 기동부대는 함대 사령관 나구모 츄이치南雲忠一 중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기함期艦 「아카기赤城」 의 함장은 11월 26일 오전 8시, 출항을 앞두고 아카기의 전 장병을 갑판에 집합시켜 야마모토 제독의 훈시를 대독했다. 내용은 「諸子十年養うは、一日これ用いんが為なり」였는데, 이는 손자병법의 <養兵千日 用兵一時>에서 따온 말이었다. 본래 의미는 "병사를 천 일간 훈련시켜 한 때에 사용한다"는 것으로 평시에도 국방이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야마모토 제독의 훈시는 "그대들을 10년간 훈련시킨 것은 하루에 쓰기 위함이다." 곧 기동부대 전 함정이 Z기*2를 게양한 채 출항했다.
12월 1일, 대미 선전포고를 진주만 공습 30분 전에 전달하기로 대본영이 결정했다. 12월 2일 오후 5시 30분에는 대본영이 보낸 암호전문이 아카기에 도착했다. 전문은 「니이카타 산에 올라라 1208 (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이었다. <니이카타 산에 올라라>는 진주만 공습이 확정되었다는 뜻이며*3 1208은 공습일을 12월 8일로 정했다는 의미였다. 12월 7일에는 기동부대의 이伊호 잠수함에서 특수잠수정 갑표적甲標的이 진주만을 향해 발진했다. 이들은 항공 공습과 더불어 진주만에 정박중인 함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렇게 12월 8일이 다가왔다.
2. 12월 8일
0030
기함 아카기로부터 총원 기상 명령이 하달되었다. 기동부대는 하와이 북부 230해리, 약 430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하와이 시간으로는 12월 7일 오전 5시였고, 음력으로는 19일에 해당했다. 초속 13미터의 강풍이 동북동 방향에서 불어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공모의 함체가 최대 15도에 이를 만큼 흔들렸다. 파도 역시 높게 쳐서 공모의 비행갑판까지 바닷물이 솟구쳤다.
0100
기동부대에 속한 중순양함 「토네利根」와 「치쿠마筑摩」가 각각 영식 수상정찰기를 한 기씩 발진시켰다. 두 정찰기는 곧장 오아후 섬을 향해 비행하며 정찰을 실시했다. 공모의 비행갑판엔 이미 진주만 공격에 나설 함재기들이 도열해 있었다.
함재기를 가득 싣고 항해하는 제2 항공전대 기함 「소류蒼龍」
0120
공모가 일제히 동북동을 향해 변침하면서 24노트까지 증속했다. 발진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0130
아카기의 함교 위로 발진 신호기가 올랐다.
가장 먼저 출격한 것은 아카기의 비행갑판 선두에 있던 영식 함상전투기로, 이는 제공대 지휘관 사카타니 시게루坂谷茂 소좌가 탑승한 전투기였다. 사카타니 소좌 휘하의 전투기 43기가 발진한 다음에는 수평폭격대와 뇌격대 (97식 함상공격기) 가 비행갑판을 떠났고 마지막으로 급강하폭격대 (99식 함상폭격기) 가 발함했다.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라는 악조건 속에서 183기의 공격대는 무사히 이함에 성공했다. 이함이 끝나기까지 약 15분이 걸렸다. 높은 숙련도가 이끌어낸 성과였다. 공격대는 잠시 공모 상공에 머무르며 편대를 구성했다. 공격대 총지휘관 후치다 미츠오淵田美津雄 중좌가 편대 선두에 섰다. 그의 뒤로 수평폭격대 40기가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으로 500미터, 고도 200미터 아래에는 뇌격대 40기가 무라타 시게하루村田重治 소좌의 지휘 아래서 비행했다. 반대편에는 타카하시 카쿠이치高橋角一 소좌의 급강하폭격대 51기가 있었다. 사카타니 소좌의 제공대는 이들 3개 편대의 500미터 상공에서 편대를 엄호했다. 총 4개 편대는 고도 3,000미터까지 상승한 뒤 하와이를 향해 비행했다.
출격하는 97식 함상공격기와 건승을 기원하는 제5 항공전대 기함 「쇼카쿠翔鶴」의 수병들.
0245
앞선 공격대가 기동부대 상공을 떠난 후 1시간 후 시마자키 시게카즈嶋崎重和 소좌가 총지휘를 맡은 2차 공격대 167기가 추가로 발진했다. 2차 공격대는 1차 공격대가 놓친 군함 및 진주만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0319
1차 공격대가 하와이 남서쪽에 이르렀다. 43기의 전투기가 먼저 진주만 상공으로 진입했지만 미군의 요격기가 이륙하지도, 대공포화가 쏟아지지도 않았다. 기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후치다 중좌는 1차 공격대 전 기체에 돌격 명령을 하달했다.
USS BB-39 애리조나Arizona(제일 앞/침몰), USS BB-43 테네시Tennessee와 USS BB-48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어뢰 공격을 받고 착저 (선체 하부가 해저에 닿음) 한 USS BB-44 캘리포니아California
대폭발을 일으키는 USS DD-373 쇼Shaw
3. トラトラトラ
하와이의 미군은 일본의 공격징후가 발견되었음에도 이를 간과하거나 무시했다.*4 하와이의 미군은 진주만에 어뢰와 폭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그것이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습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진주만에 정박중인 군함이 공격을 받자 미군은 급하게 일본 공격대를 요격해야 했다. 당연히 요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미군 전투기와 비행장이 공격받았다. 얼마 뒤 사령부 방송실로부터 총원 전투배치General quarters 명령과 함께 방송이 흘러나왔다: "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drill." 이는 워싱턴의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됐다.
1차 공격대가 이탈한 후 30분 뒤에 2차 공격대가 들이닥쳤다.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미군은 2차 공격대가 접근하자 대공포를 쏘고 전투기를 이륙시켜 맹렬히 저항했다. 2차 공격대는 결국 -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 항공모함과 함께 - 본래 공격목표였던 군함과 군사시설 공격에 실패하고 각 편대가 임의로 설정한 목표에 폭격을 가하는 데에 그쳤다. 1차 공격대 지휘관 후치다 중좌는 공습이 성공하자 아카기에 <토라 토라 토라 (トラトラトラ)>라는 전문을 보냈다. 공습 성공을 뜻하는 암호였다.
그때 아카기의 함교에서는 3차 공격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제3 항공전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三川軍一 중장은 3차 공격대를 편성해 재차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공격대의 전과가 충분치 않으므로 한 번 더 공습을 가해 치명타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제2 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타몬山口多聞 소장은 "제2 차 공격 준비 완료"라며 은근슬쩍 재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제독은 공격 중지를 명령했다. 2차 공격대가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은 미군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군 항공모함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추가 공격을 시도했다간 함대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이 나구모 제독의 생각이었다.
0830
공격대가 차례대로 공모에 귀환했다.
0900
기동부대가 해역을 이탈했다. 다만 올 때 (북부 태평양 루트) 와 달리 이번에는 중부 태평양을 곧바로 가로질러 일본으로 돌아갔다.
귀환하는 제1 항공전대 「카가加賀」(앞)과 제5 항공전대 「즈이카쿠瑞鶴」(뒤) 사진은 제1 항공전대 기함 아카기의 함미에서 촬영됨
12월 16일
야마구치 소장의 지휘 하에 제2 항공전대와 호위함 4척이 웨이크 섬 공략작전을 위해 기동부대를 이탈했다.
12월 23일
기동부대가 하시라지마柱島 정박지에 도착하며 작전이 종료되었다. 3일 뒤엔 이례적으로 좌관급 장교들이 히로히토 텐노에게 작전 성과를 보고했다. 1차 공격대 지휘관 후치다 미츠오 중좌는 함선 공격 성과를, 2차 공격대 지휘관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는 항공기지 공격 성과를 각각 나눠서 보고했다.
함선 공격을 통해 미 해군의 전함 5척*5, 경순 1척, 기뢰부설함 1척, 표적함 1척이 격침됐다. 대파와 중파는 각각 3척, 소파는 4척이었다. 미 항공기는 도합 500여 기의 손실을 입었으며 사상자는 3600여 명에 이르렀다. 반면 일본 해군의 손실은 함재기 29기, 사망자 64명, 갑표적 5척 격침이라는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다. 공모가 기간이 된 기동부대가 새롭게 해전의 지배자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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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릴 열도의 섬 중 하나. 현재는 러시아령 이투루프Итуруп 섬.
*2 러일전쟁 당시 토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이 츠시마 해전을 앞두고 기함 미카사三笠에 게양한 깃발로, 의미는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달렸으니 각자 한층 분발 노력하라(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였다. 러일전쟁 이후 Z기가 다시 게양된 것은 약 36년만이었다.
*3 반대로 <토네 강에 들어가라 (トネガワクダレ)>는 공격 철회를 의미하는 암호였다. 일본은 의외로 외교적 해결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두지는 않았다.
*4 공격대보다 하루 앞서 발진했던 갑표적이 미군 구축함에 걸려서 격침됐다. 또한 하와이의 지상 레이더 기지가 대량의 항공기가 하와이 북서부에서 이동중인 것을 탐지했다. 전탐병은 그것을 미 본토에서 오기로 한 B-17 편대라고 생각해서 무시했다.
*5 격침된 다섯 전함 가운데 세 척은 훗날 인양되어 수리를 받은 뒤 다시 현역으로 돌아오게 된다. 실제 손실은 전함 2척이었으나, USS BB-36 네바다Nevada가 1943년에 복귀하고 나머지 두 전함이 1944년이 되어서야 복귀하는 등 5척의 전함이 일시에 전력에서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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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개월만에 올리는 글입니다. 처음부터 비정기연재물이라고 생각하곤 있었는데 이렇게 비정기적일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orz
하여간 이번 편은 아카기/카가 파트의 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사실 다음 편이 해당 파트의 끝이긴 할 테지만 말이죠. 쓰다 보면 길어질 수도 있으니 이렇게 밑밥이나 깔아둬야겠습니다.
참고 삼아 말씀드리는데, 이 글은 고유명사를 최대한 살리려고 하며, 국립국어원의 외국어표기법보다 영어식 표기를 더 참조합니다. <히로히토 텐노 (혹 쇼와 텐노)>를 표기할 때 '일왕'이라는, 일종의 멸칭을 사용하지 않고 민족적 감정을 고려해 천황이라는 존칭 역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저 나름대로 고유명사를 살리려고 한 노력입니다. 영어식 표기를 참조했다는 것은 한국에 익히 알려진 한국식 표기 (예컨대 '도조 히데키', '도고 헤이하치로', '도라 도라 도라', '나구모 주이치' 같은) 보다도 원어와 알파벳 표기를 우선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토조 히데키', '토고 헤이하치로', '토라 토라 토라', '나구모 츄이치'라는 다소 어색한 표기를 사용하게 됐습니다. 영어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시게 된다면 이런 표기가 더욱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