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이라든지 안창호, 안중근 서재필박사. 김구선생님 할것없이 상당수가 카톨릭이거나 기독교인들 이었다
물론 개신교의 친일행각자료도 무척 많다 그리고 지금의 기독교가 마음에 안드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개신교=친일 이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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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安昌浩) 1878(고종15)~ 1938
독립운동가· 교육자. 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97년 서울 구세학당(救世學堂)을 졸업한 뒤, 그 교원이 되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에 가입하였다. 99년 고향에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02년 미국으로 가서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이갑(李甲), 양기탁(梁起鐸)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을 하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최남선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다. 10년 미국으로 망명, 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하였다. 3· 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가, 국무총리서리를 지내면서 대외선전· 문화사업에 착수하였다. 21년 임정각료를 사직하고, 28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32년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한 후 가출옥하였으며, 37년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되어 이듬해 경성대학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안도산전집(安島山全集)》 등이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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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1904~1920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 출신. 1919년 4월 2일 이화학당 재학 당시 고향인 아오내 장터에서 시위를 지휘하며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의 항소심 법정에서 검사에게 걸상을 집어던져, 법정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도 만세를 부르다가 갖은 고문을 받고 옥사하였다. 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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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 (1) 초기 민족주의 운동, (2) 삼일 만세운동, (3) 항일 독립운동, (4) 태극기의 유래 (5) 무궁화의 보급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조금 길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론]
구한말과 일제시절 그리스도인들의 나라사랑은 한국 현대사의 영광이다. 당시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역사도 일천했던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영향력은,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숫자도 몇 십 배로 많던 불교나 천도교인들, 또는 무종교인들을 무색케 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당대의 애국자들 대부분은 개신교인들이다. 김구, 안창호, 류관순, 서재필, 이상재, 이준, 조만식, 남궁억 등등. 그들이 겨레의 등불이 되어 일제의 폭압적이고 간교한 통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을 통해 정의와 자유의 개념을 배웠기 때문이다.
105인 사건과 3.1. 운동의 주동자중에 개신교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으며, 3.1 운동의 피검자의 종교적 분류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았고, 여성 피검자의 경우 기독교인이 65.6 퍼센트였다. (당시 총인구에서 기독교인 비율은 1.5 퍼센트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다) 또 독립협회의 다수 회원은 개신교 신자였으며, 기독교인은 그 외에도 흥사단, 신민회, 대한 자강회, 대한애국부인회,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적십자회, 반석대한 애국여자 청년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체를 세워 독립운동 및 시민계몽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므로 서울대학교의 최종고 교수 같은 이들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던 주역으로 기독교를 꼽는다. (최종고, p. 192)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던 시절 교회는 민족의 보존과 발전을 이루기 위해 뚜렷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 교회가 민족주의 운동의 거점이 됨으로써 신앙적 중심에서 이탈할까봐 서양 선교사들이 우려했을 정도였다.
[1. 초기 민족주의 운동]
대한제국 시대의 교회는 꺼져가는 국운을 되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탄일을 비롯한 교회명절 마다 십자가와 태극기를 동시에 게양하곤 했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 3-1호, 1899년 1월 14일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 역시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게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장로교회는 1901년부터 나라사랑의 요체를 담은 <국가문답>, <국가성쇠문답>등의 자료를 제작・배포・활용하는 한편, 한국의 역사와 위인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보성: 1986), p. 40; 유준기, p. 140
교회들은 해마다 국왕 탄신일이 되면 대중 집회를 열어 애국독립의식을 고취했으며, 교회조직을 활용해서 민중계몽운동과 정치적 결속을 도모했다.
당시 국가적 자주의식을 고취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협성회, 독립협회 등도 개신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이광린, “구한말 옥중에서의 기독교신앙” <東方學志> 제47・48집, 1985. pp. 477-500; 최종고 p. 193에서 인용
독립협회의 지도급 인사를 포함한 회원의 다수가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므로 일본 공사관은 “신교측의 이 두 교파(장로교, 감리교)는 서로 전후해서 새로운 선전(宣戰)을 시도하고 다른 교파의 선두에 서서 이른바 저 독립협회와 밀접한 연락을 갖고 있다” 고 기록했던 것이다. [일본공사관기록, <기독교상황>; 민경배 p. 231에서 인용]
독립협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국가의 자주의식, 민권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각종 개화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민경배, p. 231]
독립협회의 개혁건의에 대해 고종과 보수파 정부는 처음엔 자성의 기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점점 완고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협회의 중진들을 미워하여 체포・투옥시켰다. 이들 중 이상재, 남궁억, 이승만, 유성준, 이원긍 등은 수감 중에 회심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일제의 강점 야욕은 거칠어지고 조선의 멸망 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윤병구 목사는 을사보호 조약이 임박한 것을 눈치 채고 1905년 6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고 한국독립을 위해 미국이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때는 늦었다.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날 전국은 비통에 잠겼으며,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조지훈, <한국민족운동사>, 민족문화사대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제1권, 1964, p. 585
김하원, 이기범, 차병수 등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수국권(死守國權)”을 쓴 경고문을 종로 네거리에 게시하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통렬한 구국 연설을 했다. 정교, <大韓季年史> 下 p. 191, <大韓每日申報>, 1905.12.2.
일경과 헌병은 그들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힌 후 감금시켰다.
기독교 청년회(YMCA)는 월례 강연회를 할 때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기도로 폐회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강연회를 감시했던 한 일본경찰조차 감동하여, “애국가의 뜻은 우리나라 삼천리 강토와 오 백년 종사(宗社)를 천주께 맡겨 독립을 회복해 주십사는 내용으로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이라고 썼다. 1907년 기밀서류, 甲, 사법계에 수록된 일련의 청년회 상황보고; 민경배 p. 225에서 인용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청년회는 친일 일진회의 기관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대한문 앞에 나가서 거기 꿇어앉아 통곡하며, 기우는 나라와 사라져야 하는 황제의 비운을 목메어 통곡했다.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이 노골화됨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항일 민족의식이 고조되었고 마침내 항일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교회는 예배의식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반식민・반수탈 투쟁에 나섰다. 교회는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금연운동・도덕윤리 생활운동 등을 이끄는 핵심세력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민족운동사 연구회장인 유준기는 “그리스도인들의 국민계몽운동과 기독교계 학교의 민족교육은 국권을 회복하려는 민족의식 형성에 촉매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이를 대중화시키는 중심세력이었다”라고 밝힌다. 유준기, p. 136
교회가 일제의 무단 압제 기간에도 꾸준히 민족의식을 보급시켰기 때문에 3.1 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방관할 수 없었다. 1907년부터 일본은 “반일저항의 거점이 한국 교회”라며 노골적인 비난을 시작했다. 일본 공사관의 기록에는 기독교인이 “이제까지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을 야기해 왔는데, 장래에도 각종 귀찮은 일을 야기할 것임에 틀림없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공사관기록, 1905년 本省往, 기독교청년회의 동정에 관한 件, pp. 69-70
일본 공사관은 교회의 격증 원인도 “일본의 압박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들이 와서 십자가에 모여 십자가 보호 밑에 크게 세력을 양성하여 장차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본의 세력을 한국에서 축출하자는데” 있었다고 분석했다. 위의 글; 민경배 pp. 226f에서 인용
실제로 교회 전도사였던 이동휘는 의병을 일으켜 반일 무력투쟁에 가담했다. 대표적 친일 인사였던 스티븐스(D.W. Stevens)를 1908년 미국 오클랜드에서 암살했던 장 인환도 기독교 신자였고, 민족반역자 이 완용을 암살하려던 이 재명도 열렬한 신자였다. 상동 감리교회의 담임목사 전덕기는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을 대표하는 밀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위해 파견했다. 김홍기, p. 226
이준 열사 역시 유배생활 중 그리스도를 만난 신앙인이었다. 그는 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조선 강탈 야욕을 규탄하는 연설 후 장렬히 자결했다.
한국침략의 주범 이토오 히로부미를 1909년 가을에 사살했던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였다. 신자가 살인을 할 수 있느냐는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그의 애절한 나라사랑과 신앙이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여순(旅順)감옥에서 장남 분도를 신부로 키워달라고 유언했으며 2분간의 조용한 기도를 올린 다음 사형당했다. 묘지에 묻혔을 때 그의 가슴은 한 폭의 성화(聖畵)를 품고 있었다.
● 105인 사건
1910년 한일합방이 되었을 당시 우리나라엔 백성의 힘을 결집할만한 전국적 연합체라곤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기독교회만이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데다 의식이 깨어있었다. 합방이 되자마자 일본이 기독교를 억누르려고 꾀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본의 경찰과 군대는 1910년 테라우치 총독의 평안도 순시를 이용, 105인 사건을 조작하면서부터 기독교 탄압을 본격화했다. 일본은 총독 살해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대표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체포, 가혹하기 짝이 없는 고문으로 체포된 이들 중에 전덕기 목사를 비롯 김근영, 정희순, 한필호 등은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최광옥은 병사했다.
사건을 날조, 기독교를 뿌리 뽑으려고 했으나 피고인들의 용기 있는 반증으로 좌절되었다. 공개된 재판정에서 피고인들은 저마다 일어나서 고문 받은 사실을 폭로했는데, 얼굴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 교활한 방법의 고문을 받았던 이들은 일어나서 옷을 벗어 보이겠다고 대들었다. 지독한 형고를 치뤘던 이들이 풀려 나와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시민 9천여 명이 광장에 운집, 울먹이며 환영했다고 한다. 민경배, p. 286-288
한국 기독교청년회의 총무였던 질레트(P. L. Gillet)는 이 사건의 재판 진행 중 서신과 자료를 해외에 발송,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기 때문에 1913년 국외로 추방당했다. 미국 북장로교의 해외 선교부에서는 이에 대한 보고를 들은 후 당시의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에게 항의서를 보내 “조선 사람이 비밀 심문으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는 기별에 놀랐다”면서 조선 총독이 그런 야만적 방법을 쓴 사실을 항의했다. Extracts from Statement given to the Press, 1912. 7. 29. Presbyterian Library, New York; 민경배, pp. 288f.
일본의 한국 강점이 국제적으로 묵인되고 있었던 시절 서구에서 선교사들은 일본의 인권유린을 지적하는 유일한 양심세력이었다.
[2. 삼일 만세운동]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중추 세력은 국내외에서 모두 일곱 군데나 있었다. 상하이에서는 김규식, 여운형 등의 신한청년단이, 미주에서는 안창호, 이승만 등의 대한국민회와 흥사단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이동휘 등이, 동경에서는 조선 YMCA 회관에서 이광수를 대표로 한 유학생들의 조선청년독립단이 1919년 2월8일 그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국내외에 이를 천명하여 독립을 호소했다. 이 모든 주동체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이영헌, p. 152
특히 기미년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하여 벌인 운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독교회의 전국적인 유기적 조직망 덕택에 연락과 비밀보장, 그리고 거사의 동시다발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 총독부도 “독립소요의 주동자는 대부분 기독교・천도교의 신자였으므로 엄중한 취체 탄압을 이들 신자에게 가했다”고 밝혔다. 제국지방행정학회 편, <朝鮮統治秘話>, 1937, pp. 290-291, 한기역-2 p. 39에서 재인용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구한말 이래의 기독교 민족운동의 전통과 민족구원을 열망하는 애국적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인으로 동양평화와 인류복지를 부르짖게 했으며 이 저항운동이 시종 평화적 방법에 의지하도록 만든 것은 기독교 복음의 정신이었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면서 "속박되어 천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는 연설을 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읽기와 교회생활을 통해 정의・자유・평등・해방 등의 이념을 앞서서 잘 체득한 까닭에 이교적인 일본의 압제에 굴종하기를 거부하고 항일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만세운동에 기독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은 통계자료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이들과 함께 운동계획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17인 중에서도 기독교인이 여덟 명이었다. 문인현 <3・1운동과 개신교지도자 연구> (史叢, 20호, 1976)
일제 헌병대가 1919년 말까지 3・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적 상황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총 피검자 19,525명의 17.6 퍼센트를 차지했다. 3・1 운동 피검자 종교적 상황 (1919년 말)
특히 여성 피검자의 경우 기독교인이 65.6 퍼센트였다. 당시 총인구에서 기독교인은 1.5 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기독교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지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운동이 실패하면 교회에 끔찍한 핍박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민족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이 운동에 가담했다. “三一運動秘史” <기독교사상> 1966년2월호; 김해연, p. 143
물론 끝까지 지조를 지키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의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정신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이들을 우리가 오늘날 안락의자 위에 앉아 함부로 삿대질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문을 받다가 죽지 않으면 정신이상이 되거나 중병환자가 되어 들것에 실려 돌아오던 일이 비일비재하던 상황에서 끝까지 버틴다는 것은 말이 쉽지 육신을 가진 보통 인간에게 기대할만한 일이 아니다. 잔인한 보복을 예상하면서도 항일운동을 벌였던 사람이라면 그 용기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리라.
3・1운동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어, 조국독립을 위한 국내외의 활동을 일치시키고자 연통제(聯通制)를 설치, 국내외의 효율적 연락과 운송을 도모했을 때 의지했던 연락망도 기독교회였다. 연통제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 서북지방에서 특히 순조롭게 시행되었던 이유도 이 지역이 기독교사상에 의해 민족의식과 시민정신이 다른 지역보다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연통제와 밀접히 관련되었던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종종 그 사실이 적발되어 고초를 당했다. 한기역-2, p. 51
그리스도인들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도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이 무렵 대한애국부인회,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 적십자회, 반석대한애국여자청년단 등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들이었으며 핵심인물들도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0) p. 53
[3. 항일 독립운동]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제의 통치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었다. 일제의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반일적 성향은 매우 강하다"고 평했다.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思想彙報>, 16호, 1938.9, pp. 9-10 윗글을 “한국 기독교의 역사II"에서 재인용
특히 장로교는 일본이 회유하던 ‘애국적 운동’에 극히 냉담하여 일제당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기독교인 가운데 반전(反戰)・반일(反日)적 언동으로 처벌받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강요하는 궁성요배나 신사참배를 거부하거나 일제 경관들이 주최하는 시국 좌담회때 예배당의 사용을 곧잘 거절하곤 했다. 위와 같음
기독교인의 이러한 반전・반일적 경향은 일제가 황해도 지역에서 수집한 기도문, 설교문의 분석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총 76점을 수집했는데, 적극적으로 일본의 전승을 기원한 것은 한 점도 없는 반면, 평화주의 내지 박애주의에 기초해서 빠른 전쟁종결을 기원한 것은 20점에 달했다는 것이다. 위의 책, pp. 10-13
사실 당시 한국교회는 일제의 불의에 맞서는 거대한 항일조직의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한 남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공개 선언하면, 일본경찰이 종종 그를 찾아가서 반일운동 하는 단체에 개입하면 그와 그 가족은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하곤 했다. YYK, p. 144
그러므로 서울대학교의 국사학자 한우근은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통치에 저항했으며 가능한 저항운동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HWK, p. 459; HOK, p. 148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들은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는 장소였다. HWK, p.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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