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부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10년동안 지지고볶았던 세월들은
책으로 내도 모자랄 정도랍니다.
저도 어렸고.. 신랑도 어렸고....
10년동안.. 아이들이 크는만큼 저희도 크고 성장했지요.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다음달 초면 딱 결혼 10주년이네요.
사실 결혼생활에 차츰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저희 신랑은 가정환경의 영향으로(저라고 좋았던 건 아니지만..)
자존감이 굉장히 낮고 오해와 몹쓸 추측을 정말 잘 하며 자의로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남자랍니다
굉장히 이기적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전 그 남자의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요.. 엄마요.. 아내입니다.
어쩔 땐 나만 바라보는 안쓰럽고 귀여운 강아지 같기도 하지만...
가끔 목줄 풀린 사나운 개처럼 이해할 수 없는 기준으로 저를 할켜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이 남자에게 절대 잃어선 안 되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전 요즘 자폐성향이 있는 딸이 최근 틱이 와서 머리가 많이 아픕니다.
제가 아이들 같이 키우자고.. 최소한 공감이라고 해달라고 아빠가 있는데도 혼자 양육하기 힘들다고 말 하면
신랑은 한마디 하지요.
"난 여보가 든든해 고마워"
전 든든한 사람이 아니예요.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이렇게 살고 있는것 뿐입니다.
토요일 낮에 전 우리 애들 찜질방 한번도 안 가봤다고 내일 한번 데려가 보자고 말했고
신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주 이러니까.. 전 간다고 생각하고 애들하고 찜질방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욕조에서 물 트는 소리가 들리네요.
잠시 후 가보니 신랑이 욕조에 물 받고 목욕을 하고 있더군요.
참 슬픈 것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내일 찜질방 안 갈꺼냐는 싸움을 걸 마음도 안 나더라는겁니다.
지쳤으니까요.
일요일...
찜질방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갑자기 집 정리를 시작하는 신랑.
오순도순 같이 청소를 할 마음이 도저히 안 생겨서 집을 나와 차에 2시간을 앉아 있었고 집에 들어와서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 책장이 텅 빈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저분해서 책 다 갖다 버렸답니다.
우리 아이들의 기록들.. 그림들.. 제 양육의 역사들..
소중해서 몇년 째 보관하고 있었던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서 그린 그림들.... 수료증들....
제일 대박인 건.. 몇년 전에 우리가 같이 상의해서 산 40만원 가까이하는 영어동화책전집..
첫째 아이때 잘 썼고 둘째아이 슬슬 시작해야지.. 하고 생각한 걸 홀랑 내다 버렸답니다.
왜 버렸냐니
그거 쓰냐고 되묻습니다. 한번도 안 보지 않았냐고..
아이들과 같이 있는 시간이 하루에 1시간남짓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티비나 폰 보기에 바쁜 사람이
보는 지 안 보는 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리고 안 보는 거면 아이들 물건 마음대로 갖다 버려도 되냐고 물었더니
집 좁은데 어떻게 할거냡니다.
그동안.... 그냥 지쳐서 포기한 건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차곡차곡 쌓여있었나봅니다.
울분이 차올라서 회사에 있는 신랑에게 전화로 화를 냈습니다.
나는 여보가 몇년 째 안 쓰는 거도 버리지 말라고 해서 보관중이라고 했더니...
내것도 버려 랍니다.
전 이성보다 감성적인 사람이라..
이 말에 제일 화가 났습니다.
신랑한테 필요한 물건인 거 같아서 몇년 째 보관한 제 행동이, 제 마음이 일순간 쓰레기가 된 거 같더라구요.
그 후로도 몇번의 대화가 오고갔으니 신랑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40만원 줄테니 다시 사라더군요.
감정이..
꾹꾹 눌러왔고 이성만은 지키려 했던 감정이 마른장작에 불 붙힌 것 처럼 겉잡을 수 없이 타오르더군요.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아이들을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곧 있으면 아빠 올 테니 침대에 누워있어라 하고 아이들만 놔두고 집을 나왔고(신랑 곧 퇴근시간)
신랑의 전화를 네통 무시하고 다섯통째에 받아 다신 그 집 안 들어갈꺼야. 하고 끊었습니다.
우습죠? 애들 책 버렸다고 가출이라니......
결국 그 날 집에 안 들어갔습니다.
평일이었는데도요.
10년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만은 케어했던 제가.. 결혼 10년만에 처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다음날.. 큰 아이에게 영상통화가 옵니다.
엄마. 아빠가 엄마한테 전화하래요. 아빠는 회사 갔어요. 저 학교 갈 준비 하고 있을께요~
신랑한테 전화해서 이번엔 결혼 10년만에 처음으로 나만 듣고 나는 신랑에게 한번도 하지 않았던 욕설을 하게 됩니다.
야 이 또라이 새끼야 그 집 다신 안 들어간다고 했는데 자식새끼만 놔두고 회사 갔냐. 굶기던지 살리던지 너 알아서 해.
지금껏 싸워도 몸만은 전혀 불편할 게 없었던 신랑은
10분 후에 와서 아이들을 차례로 보낸 후 회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저희 엄마한테 전화를 하죠.
싸우고 집 나갔다고..... 제 전화는 안 받으니 전화 좀 해 보시라고.....
혹시 시간 있으시면 와서 애들 좀 봐주시라고.....
놀라서 전화 온 엄마.... 거기서도 울분이 터지고....
결혼 10년만에 처음으로... 엄마한테 이 사람이랑 못 살겠다고.... 울게 됩니다.
10년동안 친정엔 사위 칭찬만 했던 제가요.
아빠, 엄마가 어디가서도 사위 칭찬만 하고.... 저한테도 행복하게 잘 살아줘서 좋다고....
그렇게 10년간 이 사람 칭찬만 했던 제가 10년만에 처음으로 엄마한테 이혼 소리를 꺼냅니다.
물론 복에 겨워 요강 찬다는 소릴 들었지요.
하루 안 봤더니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엄마가 어제 밤에 재워주지도 않고..
아침에 챙겨주지도 않아서 아이들도 저를 많이 보고싶어 할 것 같았어요.
집으로 가서 큰 아이 간식을 준비한 후 하교한 큰 아이를 으스러지도록 안고 볼에 뽀뽀해줍니다.
둘째는 직접 유치원으로 가서 신랑이 데려오더군요.
아무 말 없이 설거지를 마친 후
얘기 좀 하자고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이번 제 행동에 많이 놀랐는 지.. 수척하고 풀 죽은 모습이 안쓰럽더군요.
대화를 나누고..... 평소와 같이 화가 날대로 나고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사과를 받고...
그 때 신랑이 컴퓨터에 앉더니 한글을 열고 말하더군요.
" 각서 쓸께 "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라 10년동안 단 한번도 쓰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쓴 각서 1번 항목에는
10년 째 가장 많이 싸우는 이유고, 신랑의 고질병인...
" 잘못했을 땐 즉각 미안해 라고 말한다" 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2번 항목에는 아내의 제안을 무시하거나 화내지 않고 그 때 그 때 솔직담백하게 대답한다는 내용
(ex - 나 몸이 좀 피곤한데 다음에 가면 안 될까?)
3번 항목은 제가 썼습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머지 항목도 자발적으로 채워 6개 조항의 각서가 완성되고
신랑이 직접 인쇄해서 본인 옷장 안 쪽에 붙이더군요. 매일 보겠다고...
그렇게 신랑은 결혼 10년만에 처음으로 각서를 썼고...
각서가 뭐라고...
대체 이 각서 한장이 뭐라고
그동안 울분에 차 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사르르 녹아버렸드랬더랍니다........
죽은 줄 알았던 마음도 살아나고...
다시 신랑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언제까지 가나 두고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요 신랑이나 저나...
하지만 전보다 어여삐 여길랍니다.
신랑의 행동이 그걸 가능하게 했어요.
저도 더 잘할랍니다.....
정신없이 써내려 왔는데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할 지...
또 10년...
오순도순..은 아니더라도.. 아이들 함께 키우면서
잘 살아볼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족 - 다음달에 결혼 기념일 10주년 기념으로 둘이 경주 여행 가는데 여긴 꼭 가야한다!!!!!!!!!!!!! 하는 장소나 맛집 있을까요? (답 안 주셔도 무방합니다 ㅠㅠ) 신랑이 엄마 놀래킨 덕분에 애들 맡기고 둘이 여행도 가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