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지심 깊은 사무사(思無邪)의 정치인 유시민 이해찬이라는 사람을 안 지 28년이 되었다. 나에게 그는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선배였다. 나는 그에게서 현실 정치와 입법의 원리를 배웠다. 그는 내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귀한 가르침을 주었고, 지금도 주고 있는 인생의 스승이다. 그런 만큼 그를 평한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이나 두렵고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해찬이 사심 없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마음에 간사함이나 삿됨이 없는 사람이다. 20년 동안 다섯 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송사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격한 정치자금법이 도입되기 훨씬 전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정치자금 모금 규모와 집행 내역을 스스로 공개했다. 지역구 개업행사나 초상집에 화환과 조화를 보내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유권자들은 이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내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겨우 7천만 원 정도의 선거비용만 쓰고도 무려 2만 표 차이의 압승을 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해찬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나는 1988년 봄부터 2년 동안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몇 차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한 번은 어느 유명한 건설회사가 지역구인 신림동에 조합아파트를 지으면서 불법을 저지른 혐의가 있었다. 게다가 안전 조처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인근 주민의 대규모 민원을 야기했다. 나는 이 민원과 관련한 사실관계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자 그 회사의 중역 한 분이 커다란 서류 보자기를 들고 의원회관을 찾아왔다. 면담이 시작된 지 5분 남짓 되었을까, 의원실에서 큰 소리가 터지는가 싶더니 이해찬 의원이 문을 벌컥 열고 말했다. “이 사람 끌어 내!” 나는 황급히 그 중역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한 마디가 더 들렸다. “콩밥을 먹일까 보다!” 알고 보니 그 큼직한 보자기는 민원 관련 자료가 아니라 현금 뭉치였던 것이다. 그때는 대기업 중역이 무슨 일이 있으면 현금 보따리를 들고 국회의원 회관으로 찾아오는 게 다반사인 세상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주말 오후에 그 사람이 이해찬의 19평 아파트를 찾아왔다. 지난번보다 더 큰 ‘서류 보따리’를 들고서. 아마도 보따리가 너무 작아서 그랬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한 시간 후 골목시장 정육점과 과일가게 사장님이 엄청난 양의 쇠고기와 과일을 들고 찾아왔다. 고객이 연락처를 남기지 않아 돌려줄 수도 없게 된 두 사장님은 요즘 말로 ‘대략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이런 궂은일을 현명하게 처리하는 게 보좌관의 직무 중 하나인 만큼, 나는 동네의 여러 경로당에 쇠고기와 과일을 돌린 다음 또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뇌물공여죄로 수사기관에 고발하겠다고 통보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지금 같으면 선거법의 기부행위 금지 조항에 걸리는 불법행위가 되겠지만, 그때는 그 정도는 괜찮은 시절이었다. 이해찬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사무사(思無邪)의 정치인’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삿되거나 간사한 언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매 순간 선택을 요구받는 것이 정치인데, 그는 스스로 정당화할 수 없는 타협이나 아부를 절대 하지 않는다. 1991년 첫 지방의회 선거 당시 그는 평민당 지도부가 돈 공천을 하면 탈당하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자 예고한 대로 탈당했다. 2002년 여름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한 노무현 후보를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낙마시키려는 반칙 행위가 민주당을 정치적 파산상태로 몰아넣었을 때 이해찬은 노무현 후보 선대위의 핵심 요직을 맡아 승리를 일구어 냈다. 선거에 지더라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정치인의 바른 도리라는 단순한 원칙에 따른 행동이었다. 이런 선택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할 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사람의 삿된 행위에 대해서도 묵인하거나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정치인이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해찬이 국무총리직을 사임하는 계기가 되었던 소위 삼일절 골프 사건을 돌아보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들은 그 골프 모임에서 불법을 저지른 기업을 봐주는 부도덕한 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비방하고 모함했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자세가 약점으로 지적되는 그가 아무 근거 없는 정치 공세에 휘말려 총리직을 사임했으니, 이런 참혹한 아이러니가 달리 또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고 지금도 묻는다. 이해찬 같은 사람하고 어떻게 일을 했으며 도대체 왜 좋아하느냐고. 마음에 삿됨이 없는 정치인인 건 인정하겠는데 너무 차가운 사람 아니냐는 것이다. 이미지란 무서운 것이다. 특정한 이미지가 한 번 덧씌워지면 진실을 드러내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이해찬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깊은 사람이다. 측은지심은 맹자가 말한 4단(四端) 가운데 하나로서 인(仁)의 실마리가 되는 본성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어진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해찬은 어진 사람이다. 이해찬은 1998년 국민의 정부 첫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나는 그가 장관의 권한을 행사해 누군가를 취직시키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우선 내가 그랬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독일 유학을 하던 나는 졸지에 생활고에 빠졌다. 생활비는 모두 한국에서 나오는 인세와 원고료인데, 원화 가치가 반 토막이 났으니 아무 대책이 없었다. 막 착수했던 박사학위 논문을 접고 아내와 딸을 남겨 둔 채 빈손으로 귀국했다. 신문과 잡지를 가리지 않고 매당 7천 원, 매당 1만 원짜리 원고를 닥치는 대로 쓰고 번역도 해서 번 돈을 아이 키우며 학위논문 쓰는 아내에게 보냈다. 이해찬은 장학금을 알아봐 줄 테니 다시 돌아가 학위를 마저 하라고 권했다. 나이 마흔에 어딘가 신세를 지면서 학위를 하는 게 자존심이 상한 탓에 나는 그 고마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이해찬 장관은 엉뚱하게도 자기 일을 도와 달라며 나를 한국학술진흥재단 전문위원으로 취직시켰다. 기획실장 자리를 맡아 학문 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BK21사업 기획단 일을 도와주고, 기존 학술진흥사업 예산을 신규 사업과 맞게 구조조정하라는 것이었다. 월급 250만 원에 1년 계약직이었고, 일이 너무 많아 매일 7시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돈을 더 벌어야 했기 때문에 주말에는 정신없이 잡문을 쓰고 번역을 했다. 일곱 달 동안 장관이 요청했던 일을 다 끝내고 학술진흥재단을 나왔다. 그런데 내 취직은 이해찬의 측은지심 덕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측은지심 때문에 장관을 도운 것이 진실이다. 학술진흥재단을 나온 뒤 내 소득이 두 배로 늘었으니, 그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이해찬의 측은지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는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내 친구 하나를 교육부 산하기관 홍보 분야 3년 계약직으로 취직시켰다. 장애를 가진 그 친구는 전두환 정권 때 불편한 몸으로 민주화운동을 했고 징역을 살았다. 민주화시대를 맞은 그는 참한 색시를 만나 혼인하고 작은 문구점을 열었으며 예쁜 아기를 낳았다. 친구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했지만,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문방구가 망했고 그도 나처럼 닥치는 대로 원고를 쓰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능력은 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그를 이해찬 장관이 전문 분야인 홍보 담당으로 취직시킨 것이다. 부인 김정옥 여사가 밤늦게 귀가한 남편의 윗도리 호주머니에서 날마다 여러 장의 이력서를 꺼내 남편이 시킨 대로 보지도 않고 파기하던 때였다. 이해찬 장관이 취직시킨 인물이 또 있다. 7년 전 별세하신 김병걸 선생이다. 함경남도 출신으로 수많은 리얼리즘 작품을 발표한 김병걸 시인은 전두환 정권에 당한 모진 고문과 두 차례의 감옥 생활로 건강을 잃고 극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던 분이다. 이해찬은 김병걸 선생을 교육부 산하의 조그만 장학재단 이사장으로 모셨다. 굴곡 깊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냈던 김병걸 선생은 자기 인생에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는 이사장실 창밖으로 낙엽이 지기 시작하던 2000년 가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쓰다가 한 권의 유작 시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 두 사람 말고 이해찬 장관과의 개인적 인연에 힘입어 좋은 자리에 취직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해찬은 자기 힘으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야박하다는 욕을 많이 듣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측은지심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장관의 권한을 활용해 누군가를 취직시키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해찬의 측은지심이 개인적으로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이해찬 총리의 제청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보건복지부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국민연금 개혁이었다. 장관 지명 직후 만났을 때 그는 무슨 수를 쓰든 국민연금법 개정을 성사시키라고 지시했다. 나는 국민연금의 최대 약점인 고령자 빈곤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재산과 소득이 없는 노인에게 최소 연금을 지급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국민연금 재정안정화 개혁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건의했다. 그런데 여기에 연간 2조 원이 넘는 재정이 새로 들어가는 만큼 총리와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해마다 2조 원이 넘는 돈을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면서 건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해찬 총리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한 번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돈이 그보다 더 많이 들더라도 어르신들에게는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그 폐허 위에서 산업화를 이루고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어르신들에게 이제는 국가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국민에게 설명하여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보자는 말이었다. 길고 지루한 야당과의 공개 비공개 협상, 여당 의원들의 이해부족과 비협조를 극복하기 위한 집요한 설득, 언론과 국민을 향한 절박한 호소, 숱한 고비와 우여곡절을 거쳐 2007년 7월 국회 본회의에서 국민연금 재정안정화를 위한 법률 개정안이 의결되었다. 나라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아무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은 어르신들에게 국가가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고 한 이해찬 총리의 ‘측은지심’이, 결국 2008년부터 300만 명이 넘는 65세 이상 가난한 어르신들에게 매월 10만 원 수준의 기초노령연금을 드리는, 연간 3조 원이 넘게 들어가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어진’ 결실을 맺은 것이다.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과 뒤를 이은 한명숙·한덕수 국무총리의 일관성 있는 추진력이 함께 작용한 덕분이지만,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이 일을 기획하고 추진할 용기와 확신을 나에게 준 것은 바로 이해찬 총리였다. 지금 대한민국에 어떤 지도자가 필요할까? 나는 깊은 측은지심을 지난 사무사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금을 줄여 주고 규제를 풀어 주고 성장률을 올리고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모순된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인들에게서 나는 마음 가득한 간사함을 본다. 반세기 누려 온 권력을 잃어버린 이유를 진솔하게 자성하기는커녕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방과 모욕을 퍼부어 반사이익을 노리는 데 몰두하는 정치인들에게서, 나는 국민을 위하는 한 조각의 측은지심도 읽을 수가 없다. 지식정보화와 세계화라는 문명사적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 대한민국을 일류 문명국가로 발전시키려면 국가권력을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사하는 사무사의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라는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려움에 처한 국민에게 용기와 새로운 기회를 주는 데 진력하는 측은지심 깊은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해찬이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리더라고 확신한다. 선택의 날이 임박해 주권자인 국민이 진지하고 심각하게 리더십 문제를 생각하는 시기가 오면, 정치인 이해찬의 진면목이 만인의 눈길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