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하게도 제 글이 베오베 갔네요.
읽어주시고 추천해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지난 글 안보신 분들은 이 링크를 한 번 봐주세요.
오늘은
지난 글에 달렸던 댓글들에 대한 나름의 답변 및 보충 설명과
지난번에 했던 상상들과 관련하여
올드보이의 플롯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
1. 글은 일단 많이 써봐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하나마나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 많이 하면 알게 됩니다.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죠.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하는 질문에 돈을 많이 벌면 되 라고 대답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소설 쓰려면 어떻게 해야되? 하고 물으면 대부분 많이 읽고 많이 쓰라고 합니다. 그 결과, 소설 쓰기를 희망하는 어린 학생들이
많이 읽기는 하지만 결국
많이 못써요. 안써져요.
저의 개인적 경험이기도 하면서
모두의 경험이에요. 안써져요.
뭔가 쓸게 있을것 같아서 모니터 앞에 앉았는데
막상 타이핑을 해보면 손가락이 앞으로 안나가요.
머릿속도 하얗고 모니터도 하얗죠. 초보 소설가가 겪는 백색의 공포에요.
그런 일을 한두번 겪다 보면
소설을 쓰려고 모니터 앞에 앉는 것 자체가 두려워져요. 그래서 결국 포기해요.
많이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이'에 대한 해답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돈의 문제구요,
그리고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편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해요.
단순히 많이 쓰는게 왕도라면
양판소 작가들은 노벨문학상을 진즉에 타야죠. 그들에게는 한 편을 잘 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그저 많이 쓸 뿐이죠.
많이 쓰느라 생각할 시간도 부족하고
다양한 책을 읽을 시간도 부족할거에요. 자신의 감정을 고양시킬 틈이 없을걸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죠.
2. 일단 한 편을 마무리 해야 한다.
많이 못쓰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마무리에 대한 강박이라고 생각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이 밥벌이가 아닌 이상에야 마무리 안해도 되요.
마무리 했다고 칭찬 받는거 아니고,
마무리 못했다고 욕먹는거 아니에요. 가다 못가면 간만큼 즐거운거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이 이야기를 마무리 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왜 지금의 나는 이 이야기를 마무리 하지 못하는가' 에 대해서 궁금해 하셔야 해요.
'지금 내가 모르는 것' 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그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는거죠.
억지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렇게 해보신 분들 있었거에요. 그런 마무리는
소설가 자신에게조차 감동이 없어요. 재미도 없죠.
그래서 조금 쉬운 이야기를 새로 시작해서 마무리 할 수도 있지만
성취감이 만족할만큼 차오르지 않죠. 물론 그것도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마무리 짓지도 못할 이야기를 도전하는거에요. 행여 억지로 마무리 짓더라도
내가 모자랐음을 인정하고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제대로 마무리 할 각오를 하는거죠.
어설프게 마무리 한 후
'습작' 이라는 라벨을 달아놓지 마세요. 밥벌이가 아닌 이상
조금 비겁한 거에요.
인생에 연습이 없듯이 소설에도 습작은 없어요.
평생 한 편의 이야기도 마무리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마무리 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마음에 담은 채
다른 작가의 소설을 보시고 영화를 보세요. 소설이 다르게 읽히고 영화가 다르게 보여요. 삶이 그만큼 풍성해져요.
어렵기만 했던 고전이 읽히는 날이 와요.
그것만으로 소설은 도전해볼 가치가 있어요.
3. 문장력(力)
문장미(美) 라고 하지 않고 문장에는 힘력 자가 따라 붙어요.
문장은 힘이 있어요. 문장은 혁명을 일으키기도 해요. 왕의 목을 자르죠.
자신의 문장을 점검할 때는 문장이 아름다운가를 보지 마시고
내 문장에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세요.
대부분 문장에 힘이 없는 경우는
그 문장을 쓴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에 힘이 없어서에요. 최민수가 넘버3에서 말했잖아요.
죄가 무슨 죄야, 죄를 지은 사람이 나쁜 놈이지.
문장을 탓하지 마세요. 문장은 죄가 없어요.
스스로의 가슴 안에 문장으로 표현해야만 할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문장이 아니고는 도저히 넘지 못할 벽을 느끼지 않는 한 문장력은 안생겨요.
문장이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한 문장력은 안생겨요.
문장으로 죽여야 할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문장을 날카롭게 다듬을 기회가 안생겨요.
소설가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에게 저는 필사를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남의 문장 베껴바야 결국 남의 것이에요. 허공에 삽질하는거에요.
땅을 파야 할 이유도 없고,
금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도 모르고,
금이 자기에게 절실하게 필요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금을 파낸 자의 삽질만 허공에 대고 흉내내는 거에요. 그거 결국 못써먹어요.
텃밭의 감자를 캐기 위해서는 호미 정도면 되는데
대가의 삽질을 흉내내요. 그런거 하지 마세요.
자신의 사상과 감정과 논리에 걸맞는 문장을 가지려고 하세요.
아이의 동시가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그 아이에 걸맞는 문장으로 표현되기 때문이에요.
4. 주제 구성 문체 인물 사건 배경
소설의 3요소와 구성의 3요소를 학교에서는 이렇게 배웠습니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저한테는 불편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소설을
스토리, 플롯, 케릭터 의 3 부분으로 나눕니다. 그냥 제 멋대로의 개념이에요.
그리고 스토리에서는 2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서와 화점. 이것도 제 멋대로 붙인 이름이에요.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엇을 나중에 이야기하는가와
어떤 식으로 말하는가 입니다.
스토리, 플롯, 케릭터, 순서, 화점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드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문체요, 문체는 이 모든 것의 한 요소이면서 또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마치
골프를 치면 제 나름대로의 스윙 폼이 몸에 베는 것과 같아요. 누구는 문체를 작가의 지문이라고도 하죠. 그래서
판이하게 다른 여러가지 문체를 가지는 작가는 거의 없어요. 다만
한두가지 문체를 유연하게 구사하는 작가들이 많죠.
운동선수처럼 작가도 문체의 유연함이 필수적이에요.
그럼 주제는요?
소설에 주제 따위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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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했던 상상을 조금 이어갔어요.
한 남자가 원룸에 갇힌다. 제 마음에 가는 부분은 방에 갇힌다는 사실이에요.
방에 갇힌 남자의 방의 원주인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갈 수 있을까요.
만약 나의 방에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갇힌다면
그리고 곳에 티비도 없고 전화기도 없으며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심심해서라도 나에 대해서 추측하겠죠. 놀이 삼아서라도.
그 사람은 나를 어떤 인간이라고 추측하게 될까요? 그 사람의 상상 속에 그려지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실제의 나와 비슷할까요, 아니면 완전히 다를까요?
고고학자가 유물을 다루는 방법으로 내 방에 있는 나의 물건들을 바라본다면
나라는 인물은 어떻게 그려질까요? 또한
그런 식으로 나를 파헤쳐가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기회가 생길까요?
임시로 상상을 해봤어요. 주인공은 40대의 중년 남자.
술을 먹고 택시를 탄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생전 처음 보는 방에 누워 있어요.
현관의 디지털 도어록이 고장나서 갇혀버렸어요.
당장 문을 두드려 도움을 요청하지는 못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전과가 있거나
혹은 뭐 다른 이유라도 상관 없겠죠. 무슨 이유로 해서 집행유예중이라면
타인의 빈 집에 있었다는 사실은 치명적이겠죠, 아무튼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있어요.
개연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하자구요.
남자는 그 방을 빠져나갈 도구가 될만한 것이 있나 찾기 위해서, 아울러 심심해서라도
그 방을 천천히 뒤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그 방의 원래 주인을 상상하게 되죠.
빈 방의 주인에 대한 상상은
주인공 남자의 회상과 겹쳐요.
하룻밤이 지나가요. 남자는 한 편 궁금해요. 이 방의 원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왜 이방의 주인은 돌아오지 않을까. 나처럼 그도 어딘가에 갇혀버렸을까?
혹은 죽었을까?
옆방에서 소리가 들려요. 여자가 살고 있어요. 고양이 한마리와.
그 다음에 몇가지 시답지 않은 상상을 해봤어요.
빈 방의 원래 주인이 여자가 사는 옆방에 시체가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실을 우연히 주인공 남자가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일본식 미스테리 비슷하겠죠. 일단 상상해보고 접어뒀어요.
주인공 남자가 빈 방의 원래 주인이 남겨놓고 간 유서를 발견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남자의 자살을
막아내고 싶다면? 작위적이에요. 일단 접어두어요.
빈 방의 원래 주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나는 이 이야기가 절정을 이루어내는 부분에서
주인공 남자가
그 방의 문을 부수고 탈출하기를 바래요. 이웃의 원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 가운데
대차게 문을 부수고 탈출했으면 좋겠어요. 웬지 통쾌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요.
주인공 남자로 하여금 현관문을 부수게 하려면
빈 방의 원래 주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어떤 사건들이 있어야 할까요. 옆 집의 여자는 어떤 여자이어야 할까요.
주인공은 그 방에 갇히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어야 할까요. 아직은 감이 안와요. 일단
방에 갇힌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올드보이를 봤어요. 10년만이네요. 마침 리메이크도 개봉했으니 복습 겸 예습으로.
제가 생각하는 스토리,플롯,케릭터의 개념을 기준으로
올드보이를 살펴볼게요.
*****
두 남자가 있어요. 오대수와 이진우.
한 남자는 다른 남자에게 복수하길 원해요.
복수의 방법은 자기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갚아주는거죠. 복수의 원형질이면서 정의의 원시적인 형태에요.
복수의 실행 단계에서만 15년이 걸려요. 길죠.
플롯을 이끌어가는 힘은 이진우가 가진 복수의 의지에서 나와요.
오대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진우에게 끌려다녀요.
플롯의 힘은 이진우에게 있는데
가장 환한 빛을 발하는 케릭터는 오대수이기 때문에
플롯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인 스토리는
많은 양의 미스터리를 가지게 되죠. (이게 이해 되시나요?)
제 식으로 말하면 이진우는 의지를 가진 케릭터이고 오대수는
반응하는 케릭터에요.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이고,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둘이 만나요. 완결성이 뛰어난 영화죠.
오대수는 이름에도 나오듯이 오늘만 대충 수습해요. 끝까지 이진우에게 끌려다니죠.
오대수의 대사중에 기억할만한 대사가 있어요.
'복수가 성격이 되어버렸다' 라는 대사가 있죠.
오대수는 의지가 없어요.
성격이 되어버린거죠.
오대수의 의지는 마지막에 딱 한번만 나와요. 최면술사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죠. 그게 오대수의 의지에요.
이진우는 근친상간으로 인해 사랑하는 누이가 죽자 복수의 의지를 가져요.
오대수는 자신과 미도의 사랑이 근친상간이라는 사실을 알자 기억을 지울 의지를 가져요.
이진우는 오대수에 대한 복수의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근친상의 경험을 되풀이해요.
이진우는 스스로에게 묻죠. 저들도 나처럼 사랑을 하게 될까? 그리고 오대수와 미도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요. 확인하고는 자살하죠.
오대수는 미도와의 근친상간을 확인한 후 자신의 기억을 죽여요. 자신 안의 몬스터에게 기억의 짐을 지우고
몬스터를 죽음으로 떠나보내죠.
플롯 속에서 캐릭터의 동선이 기하학적인 대칭을 이뤄요. 이건 아주 중요해요.
기하학적 대칭을 가진 플롯이 주는 안정감은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내적 정합성이 떨어지는 부분들을 잘 감싸줘요. 잘 기억해두시면 좋아요.
이런 대칭적 장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요.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거 아닌가요. 하는 대사가
극의 초반부에 나왔다가 극의 마지막에도 나오죠. 혹시라도 관객이 모르고 지나칠까봐 감독은
방점을 찍어줘요.
초반부의 자살하는 남자는 개를 안고 있어요.
후반부의 최면술사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데요.
근친상간은 개나 하는 짓이잖아요. 오누이끼리 붙어먹는 짓이죠.
감독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거 아닌가요. 하는 동일한 대사가
초반부의 자살하는 남자가 말했을 때와
오대수의 글에서 나올 때 서로 다른 의미와 울림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했어요.
정리하자면
올드보이에서 배울것은
의지를 가진 케릭터와 반응하는 케릭터 그리고
플롯의 대칭성이 핵심이에요. 여기서 미스터리가 발생하고, 반전이 만들어져요.
다음번에는 비슷한 방식으로 신세계를 살펴보죠.
미리 조금 얘기하자면
신세계에서는 최민수가 의지를 가진 케릭터로 나오고
이정재가 반응하는 케릭터로 나오는데
최민수의 의지가 너무 약하고 비논리적인데다가 어이없게 죽기까지 해요.
그래서 영화가 힘이 많이 빠지죠.
아 늦었네요. 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