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대량 학살은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국가의 정책에 의한 것이고
둘째는 공식적인 권력으로 통제되지 않는 집단적인 증오와 광기에 의한 것이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전쟁에서 승리한 측이 학살의 가해자일 경우에는 학살의 모든 기억들이 조직적으로 은폐된다.
기억은 조작되고 학살의 역사는 승리의 신화로 정착된다.
한국전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공고해질수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단단한 기반에 서면 설수록 양측의 학살신화는 신성불가침의 영향력을 가진 승리의 신화로 조작되었고 이에 대한 객관적인 반론이나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실제의 사실(Fact)들은 과연 얼마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자랑스러운(?) 신화를 제대로 뒷받침하고 있는 걸까?
1.학살의 실상 1-1.학살의 개념 19세기의 전쟁까지만 하더라도 전쟁은 군대와 군대의 일이었고 권력을 가진 왕조와 왕조의 대결이었다. 물론 전쟁이 발발하면 다수의 민중이 동원되기는 하였으나, 그 양상과 개념은 20세기 총력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국가의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하는 총력전으로 치러진 제 1차 세계대전부터 상대방 군사력의 근간을 유지시켜주는 민간인들과 제반시설에 대한 피해가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상대방의 무력 그 자체보다 그 근간을 이루는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에 더 치중한다.
그 결과 전투행위를 빙자한 사실상의 학살 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은 그 어떤 전쟁보다 민간인들의 피해가 급증했던 전쟁이었다.
그리고 5년도 채 되지 않아 발생한 한국전쟁은 전쟁사상 군인들의 사망자보다 민간인들의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더 많았던 최초의 전쟁이 되고 만다.
그 원인에는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여러 유형의 학살이 존재했다. 학살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현대전의 양상을 예고한 전쟁이기도 했다.
프랭크 철크와 쿠르트 요한슨의 정의에 따르면 “학살”이란 ‘국가와 여타 권력체가 ‘악’을 저지른 것으로 간주되는 집단이나 구성원이 포함되어 있는 특정의 집단을 파괴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살해하는 양상‘이다.
학살을 가하는 측에서 보면 이는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적에게 공포심을 확산시키며, 경제적 부를 획득하고 특정의 신조나 이론,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정의에 따른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은 ‘정당한 법적절차나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가권력 및 그와 연관된 권력체가 정치적 이유에 의해 자신과 적대하는 비무장 민간인 집단을 일방적 이고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 이러한 학살의 학문적 정의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의 양상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닌 미성숙국가의 형성시기였던 관계로 그 실상의 양태가 매우 모호하며 해석하기 복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학살의 유형과 외연을 좀 더 명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1-2.한국전쟁 시 학살의 유형과 외연 45년 해방이후 50년까지의 우리 정치의 과정은 국가의 형성사이자, ‘무력 기구의 중앙 집중과 국가독점화‘의 과정이었다. 국가의 형성은 법과 제도가 완비되는 ‘문명화의 과정’이기는 하나 남과 북 모두가 정부 수립 후 2년은 국가가 폭력기구를 완전히 독점하고 감정중립적인 조직으로 안정화하기엔 너무도 짧은 기간이었다.
따라서 50년 전면전 발발 후 국가기관에 의해서 저질러진 학살 역시도 다분히 50년 이전 발생했던 정치테러와 사적보복의 연장선상속에 있었고 여전히 병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한국 전쟁 시 학살의 유형과 외연은 다음과 같다.
①군사 작전의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로 군 수뇌부 혹은 명령권자의 공식적인 지시로 수행된 작전 중에 학살이 수행되고 그 학살을 명령권자가 묵인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거창양민학살과 80년 광주학살이 대표적인 예다.
②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수행되지만 군 수뇌부의 명령이나 암묵적인 동의 혹은 묵인을 거치지 않고 산하 군부대나 경찰이‘적’을 공격하고 예상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일시적이고 비공식적으로 ‘위험한’주민을 마구 학살하는 경우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시 자주 발생하였다.
③군사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후방에서,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적과 내통했거나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을 사람들을 ‘사법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처형으로서의 학살’이 있다. 남의 보도연맹원 처형과 북의 반동분자 사전제거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며 권력이 극도의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곧잘 발생한다.
④위의 경우에서 언급된 처벌로서의 처형이 민간인들 간의 사적인 보복의 형태로 전개되면서 상호간의 학살이 훨씬 더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에 기초하여 진행된 경우다.
한국전쟁 시 점령과 수복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남과 북의 비공식적인 청년조직 혹은 단체 등이 빨갱이 색출 혹은 반동분자 색출의 명분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고 위의 3경우처럼 공식적인 처벌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 학살주체의 통제되지 않는 분노와 광기에 의해 매우 감정적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학살의 양상이 그 어떤 경우보다 매우 잔인했다.
학살의 유형과 외연을 간단히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대략적인 분류에도 불구하고 유형별 학살들 간의 경계선은 한국전쟁의 상황에서는 사실 매우 애매한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가 공식적인 의도인지 비공식적인 의도이고 사적인지 애매하며 어느 정도가 작전이고 처형인지도 판단하기도 어렵다.
또 처벌의 규모가 작았음에도 그 잔인성에 따라 원한의 깊이나 상처가 훨씬 더 큰 경우마저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네 가지 유형을 기초로 학살의 양상을 살펴보면 한국전쟁의 성격과 배경을 추론할 수 있고 또 학살이 왜 발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학살은 공식적인 전투 이면에서의 또 다른 전투이자 전쟁이었다.
전투 그자체로 인한 살상의 규모나 비극성보다 더 심각한 한국전쟁 시 학살의 양태를 분석하는 일은 한국전쟁시의 전투양상만큼이나 중요한 한국전쟁사의 주제가 아닐 수 없다.
2. 학살의 전개 2-1.작전으로서의 학살의 시작 4.3과 여순 전투 시 모든 군사행동은 작전명령의 틀에서 이루어지고 적을 향해 총을 겨누지만 그 총구가 적과 내통한다고 간주되거나 적이 활동하는 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발생한 제주도 4.3 항쟁이나 여순 순천 사건에서 보여준 군경의 진압작전과 학살은 가장 대표적인 작전으로서의 학살의 전형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후 전면전으로 비화된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양상을 미리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수립과정에서 발생한 좌우익의 대립과 좌익의 불법 지하당화 그리고 단정수립에 따른 민중의 저항은 4,3과 여순사건에서처럼 피의 유혈참극을 유발시켰고 이는 이미 사실상 한국전쟁의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학살의 시각에서 4.3항쟁과 여순사건은 한국전쟁사의 한 부분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주도 4.3 항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제주도민의 저항을 그저 좌익의 책동으로 몰아 강압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극이 시작된다.
이 승만 정권은 제주도를 적성지역으로 몰아 초토화 작전을 시도하려 했으나 당시 제주도 주둔 9연대장 김 익렬 중령에 의해 거부된다. 김 익렬 중령(예비역중장)은 그의 유고 회고록에서도 밝혔듯이 4.3 의 촉발이 좌익의 책동이 아닌 경찰과 우익 단체들의 잔인한 진압작전과 학살행위에 있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 군정과 이 승만 정권은 무차별 진압을 거부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던 김 익렬 제주도 계엄사령관을 해임시킨 후 여수의 14연대를 동원 하여 제주도를 완전히 초토화하려 하였다.
여순 순천 사건은 바로 제주도 진압의 명을 받은 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니, 기실 이 두 사건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 원인이 과거 냉전담론이 주장해온 것과 같이 일부 좌익의 선동책동이 아니라 이 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무리하고 잔인한 진압과 학살에 있었다는 점이다.
김 익렬 연대장에 의해 일시 중단되었던 제주도 초토화 작전은 결국 48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신임 연대장 박진경, 송요찬등과 조병옥이 지휘하는 경찰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토벌군은 좌익빨치산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제주도 100여 곳의 중간 산마을을 모조리 불태우고 파괴했으며 노인에서 젖먹이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제주도민을 학살하였다.
이 들 중에는 제주도 내 교사와 공무원 등 우익 인사들 상당수가 포함된, 사실상의 무차별적인 학살이자 초토화 작전이었다. 당시 군경에 저항했던 빨치산의 숫자는 군의 정보로도 500명 내외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 중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은 최소 3만 명 에서 최대 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을 뿐 아직도 정확한 학살의 규모를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아직도 제주도 마을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들이 무수하다.
제주도민 중 당시 사건에서 혈육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4.3은 끔찍했다.
자신의 처자와 노모를 빨치산들에게 볼모로 내주면서까지 불필요한 충돌을 막고 평화를 지키려고 했던 김 익렬 당시 9연대장이 후일 4.3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4.3 봉기에 참여했던 제주도민들이 좌익 빨갱이가 아님을 분명하게 기록했던 이유도 또 그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그토록 애썼던 이유도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진압과 학살작전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했었는지를 반증하는 대목이다.
이 양상은 여순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순 사건은 흔히 좌익 군인들의 반란과 지휘관 살해 그리고 지역좌익들의 우익인사와 경찰 살해와 인민재판만이 강조되어 기록되고 있으나, 정작 더 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좌익과 반란군들이 여순을 떠난 후에 발생하였다.
여수와 순천에 진입한 경찰과 진압군은 이미 그 지역을 빠져나간 반란군과 좌익뿐 아니라 사실상 전체 ‘시민’을 ‘진압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4.3과 같은 방식의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미 반란군 거개가 도주한 상황에서 누가 부역자인지를 판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 읍민을 학교 등 공공시설에 모아놓고 집, 외모 혹은 우익인사들의 지적만 가지고 그 자리에서 즉결 타살, 총살 혹은 참수하는 인간사냥이 벌어졌다.
후일 군은 49년 1월 10일 여순사건 관련자 재판결과로 총 2,810명이 재판을 받아 410명이 사형되고 568명이 종신형을 나머지는 무죄 석방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재판이전에 학교 운동장과 공공시설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당시 일부 일본군출신 장교들에 의해서 일본도로 희생자들의 목을 치는 시합까지 벌였다고 하니, 그 잔인성이 중일전쟁 시 남경대학살에 필적하고 있었다.
4.3 제주도 학살과 여순 학살을 통해서 이승만 정권과 미국은 확고한 단정수립의지와 미국후원하의 반공정권을 수립하려는 정치적 포석을 견지한 것이다. 우여 곡절 끝에 대한민국이 출범하고 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좌익의 정치활동은 완전히 불법화되었고 이후 좌익은 사상정치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다.
그 결과 ‘빨치산’‘야산대’ 혹은 ‘산사람’으로 불리는 무장정치투쟁이 대한민국 건국이후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지리산 주변과 태백산맥 산간지대는 ‘적’과 ‘우리’가 제대로 구분되지 못했고, 그 결과 적과 내통하거나 한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 거주민들은 무차별적인 토벌대의 학살에 희생이 되는가 하면, 빨치산들 역시 자신들을 신고하거나 비협조적인 지역민들을 반동분자로 처단하는 보복을 가하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사실상의 내전상태로 접어든다.
괜찮으시다면 이후에 계속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