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전망대>빌 게이츠의 돈쓰는 법
한해를 마무리할 시기가 다가오면 미국 사람들은 늘 한해동안 돈을 제일 많이 번 사람과 제일 많이 기부한 사람 명단발표를 기다린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더 관심을 모으는 것은 기부액 순위다. 누가 얼마를 벌었느냐보다 누가 얼 마나 가치있게 썼느냐를 더 중시하는 게 바로 미국인들인 것이다. 미국이 치열한 경쟁사회인만큼 부자들의 등락도 심하고, 기부 자의 순위도 늘 바뀐다. 그런데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은 1990년대 중반부터 부동의 1위다. 매년 돈을 제일 많이 벌고, 제일 많이 기부하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미국 지성인들이 즐겨보는 주간지 ‘뉴요커’ 최신호(10월24일자)에는 ‘과연 게이츠는 아프리카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글이 커버스토리로 실렸다. 아무리 세계 최고 부자라지만, 어떻게 한 개인이 아프리카를 질병으로부터 구하겠다는 과감한 발상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독점논란이 끊이지 않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또다른 오만이 아닐까?
마이클 스펙터 기자는 이런 문제의식으로 게이츠와 그 주변인사 들을 몇달간 밀착 취재했다. 게이츠를 따라 국제회의에도 가고, 게이츠와 접촉했던 수많은 보건전문가들을 만났다. 그중 대표적 일화는 게이츠가 90년대 중반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만 든 뒤 보건전문가들을 찾아다닐 때의 얘기다.
미국 최고의 국제보건전문가로 꼽히는 윌리엄 페지 박사는 어느 날 게이츠의 전화를 받았다. ‘보건문제에 대해 알고싶다’는게 요지였다. 페지는 부자들이 늘 그런식으로 거창하게 말만 하는 것을 익히 봐왔던 터라 관련책 82권을 추천한 뒤 나중에 보자고 했다. 몇달 후 게이츠가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페지는 먼저 ‘ 책을 얼마나 읽었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게이츠는 “너무 바빠 서 19권밖에 읽지 못했다”고 말했다. 페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어떤 책이 제일 인상적이었느냐’고 좀더 구체적으로 물었더니, 게이츠는 “장애자와 삶의 질 문제를 다룬 1993년판 세 계은행 리포트를 두번이나 읽었다”고 답했다. 게이츠의 진지함 에 반한 페지는 주저없이 재단에 동참했다. 게이츠가 200억달러를 재단에 기부한 뒤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 게 모색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게 만들어진 재단이 요즘 아프리카 질병퇴치에 가장 적극적 인 활동을 하고있는 게이츠재단이다. 게이츠는 주말마다 보건서 적을 읽으며 재단의 전략을 짜고 보건관련 국제회의에도 빠짐없 이 참석한다. 돈을 벌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에 들이는 노력만큼, 돈쓰는 일에도 열정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다.
게이츠재단은 지난 1월 유엔의 ‘백신과 예방주사를 위한 글로벌연대’ 프로젝트에 7억5000만달러를 기부했다. 이 덕분에 연간 50만명 이상에 달하는 아프리카의 질병 사망자수는 매년 15%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아프리카를 구하겠다는 게이츠의 꿈이 조금씩 구체화하고 있는 셈이다.
게이츠 부부의 사회참여에 불을 붙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의 부모다. 게이츠의 아버지는 돈버는 일에 빠져있는 아들에게 “ 지금 자선활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독려했고, 그의 엄마는 1994년 아들의 결혼식 전날 며느리 멜린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너희 두 사람이 이웃에 대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낀다면 세상을 좀더 살기좋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게이츠 가족 얘기를 이상화할 필요는 없다. 미국 부자들이 모두 게이츠와 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게이츠의 돈버는 법과 돈 쓰는 법을 보면, 그가 어떻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고, 존경받 는 부자가 됐는지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제 수백억원대 자산가가 즐비하고 매년 새로운 부 자가 탄생한다. 하지만 아직은 돈을 벌고, 보존하는 데 온 신경 을 쓸 뿐 가치있게 돈쓰는 법에 대한 모색은 뒤처져있는 형국이 다. 게이츠처럼 아프리카를 구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부자는 나오지않더라도 최소한 그의 돈쓰는 법에 대한 관심이라도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미숙 /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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