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나라당이 미쳐가는구나"
[한나라당 전당대회 복기] "이런 것 처음이었어요"
[조선일보 인턴 기자]
21일 한나라당 새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전당대회가 열린 잠실학생체육관은 ‘파란나라’의 희망으로 가득찬 축제 한마당이었다. 전당대회에 참석한 당원과 대의원들은 “놀랍다”, “통쾌하다”, “월드컵 분위기다”, “변화를 느낀다”등의 느낌을 토해내며 한껏 들뜬 모습들이었다.
■ 13:00 풍물패와 기차놀이
잠실학생체육관은 전당대회가 벌어지기 1시간 전부터 ‘경제는 한나라’ 구호가 적힌 파란색 점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각 후보 진영은 체육관 입구서부터 대의원들의 표심잡기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권오을 후보 진영은 대학생들 시위에서 자주 등장하는 “풍물패”를 동원, 눈길을 끌었다. 안동의 평화동 풍물패 소속의 김순희씨(여, 50)는 “평소 지역의 축제나 어르신들 행사에 자주 참석해 지역에서는 인기가 꽤 높다”며 “전당대회가 한나라당의 축제인만큼, 누가 대표가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신나게 놀아보자”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박진 후보는 ‘기차놀이’를 이용, 기동성을 높이고 젊음과 혈기를 강조했다. 박진 후보를 선두로 두 줄로 늘어선 당원들이 “박진돌풍, 총선승리”라는 구호에 맞춰 체육관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닌 것. 김문수, 박근혜, 홍사덕 의원 진영은 열을 갖추고 구호를 외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치열한 홍보전을 펼쳤다.
■14:10 떠나는 자
오후 2시 체육관 실내는 당초 썰렁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3000여명의 한나라당 당원과 대의원들로 가득찼다. 파란색 연단은 “파란나라 희망나라”라는 구호 문구가 걸렸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었다. 성원보고, 국민의례 등의 행사가 끝나고 최병렬 당대표가 인사말을 하기 위해 연단에 서자 소란스럽던 실내가 순간 고요해졌다.
특히 최 대표가 “눈보라 치는 광야에 후보들을 알몸으로 내놓고 떠나는 마음은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눈앞이 깜깜하다”며 당의 위기를 언급하자, 좌중은 숙연해지는 분위기. 하지만 곧이어 최대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통령 탄핵은 옳은 선택이었다”, "이대로 가면 250석의 열린우리당 독재가 시작된다“며 지지를 호소하자, 사람들은 ”옳소“,”최병렬“등의 구호를 한목소리로 외쳤다.
제주시에서 비행기값만 15만원을 들여 행사에 참석했다는 김종언씨(60, 남)는 ”당이 어려운 것 같아 자비를 들여 ‘박수부대’를 자청했다“며 ”최대표가 옳은 일을 했지만, 사람들이 항상 옳은 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최대표를 두둔했다.
광주에서 오전 8시 차를 타고 올라왔다는 김풍식씨(48, 남)도 ”광주에서 한나라당 지지자는 공산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독립투사의 심정으로 서울에 왔다“며, ”김수환 추기경도 관권선거라고 한 마당에 최 대표가 무슨 죄가 있느냐!“며 최대표 퇴진에 대한 억울한 감정을 비쳤다.
■14:40 남는 자
이날 후보자 연설은 추첨에 의해 김문수 의원이 먼저 시작했다. 탄핵철회논란의 중심에 섰던 김 의원에 대해 대의원들은 연설도중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문수 의원이 “차떼기와 탄핵역풍으로 당이 망가졌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라고 말하자 일부 대의원들이 “시끄럽다”, “내려와”, “탈당해라” 등의 고성과 야유를 외쳤다.
박근혜 후보는 “누가 대표가 되는 것이 당에 한 표라도 도움이 되겠는가”며 자신의 대중성을 호소했고, 연설 도중 “아시다시피 저는 부모님이 없다... 하지만 보릿고개를 넘어온 피와 땀, 눈물을 저는 잘 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무너지도록 만들 수는 없다”며 간접적으로 ‘박정희 향수’를 자극했다.
박진 후보는 연설 도중 양복 상의를 벗고 드레스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는 등 젊음을 과시하며, 40대 기수론을 외쳤다. 권오을 후보는 “남상국 사장, 안상영 시장의 죽음을 언급하며, 그때엔 탄핵 외 무슨 방법이 있었겠냐”며 당원들의 감정에 호소했다.
홍사덕 후보는 “겁먹은 리더십, 자기비하 리더십, 투항주의 리더십에서 얻을 것은 없다”며 ”대표가 되면 광화문 촛불시위 연단에 서겠다. 돌팔매를 맞고 쓰러지거든 저를 들쳐 업고 총선에 나가 승리할 것“이라고 말해,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당원과 대의원들은 후보자들의 연설에 집중하는 모습이었고, 후보자들의 말이 대의원들 가슴에 와닿을 때면 후보자의 이름을 연호했다. .
■15:20 어르신들의 소풍회
투표가 시작되자 대의원들은 미리 찍어둔 후보가 있다는 듯 주저 없이 투표장을 향했다. 투표를 일찍 끝낸 사람들은 체육관 주변에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준비해온 간식을 먹거나 인근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오늘 매상이 어떠냐’는 질문에 포장마차 주인은 “보면 모르냐, 바쁘니깐 손님하고 이야기해라”며 기자에게 면박을 줬다.
대구의 한 지구당에서 왔다는 이모씨(여, 39)는 “친구들과 소풍 온 것 같다. 간만에 수다를 풀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말했다. 구미에서 혼자 기차를 타고 올라와 지하철로 잠실에 왔다는 최모씨(여, 40)는 먼 길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가게문 열어봐야 장사도 안된다”며 “이대로 가면 나라가 뒤집힐 것 같아 직접 행사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포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왔다는 최모씨(여, 59)는 “차떼기 돈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내돈 내고 이런 행사 와보기도 첨이다”며 한나라당의 달라진 풍토를 이야기했다. 자신을 박근혜씨의 지지자라고 밝힌 박모씨(의정부, 여, 47)는 “혼자오기가 심심해서 보디가드로 남편을, 수다 상대로 친구 4명을 데리고 왔다”고 자랑했다.
서울시의 김기철 시의원은 “예전에 이런 행사를 할 때면 차도 대절하고, 점심값에, 술값까지 수천만원이 깨졌는데 이번에 전혀 그런게 없었다”며 “당원들의 애당심과 애국심에 어찌 보답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한편 행사장에서 젊은이들을 찾아보기는 극히 어려웠다. 이재진 부천시의원(37, 남)은 “평일날 전당대회가 열려 직장다니는 친구들을 초청할 엄두도 못냈다”며 “지금 전당대회의 흥겨운 분위기와 지역 민심간에는 다소간 괴리가 있다”고 자신의 느낀 점을 말했다.
이 의원은 “젊은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 당에서는 공감은 하지만 정책에 반영이 잘 안된다”며 “현재 여론수렴(Feed back)시스템을 그대로 갖고 간다면 한나라당에 젊은 사람들은 모이기는 힘들지 않겠냐”고 말해 한나라당의 미래를 걱정했다.
■ 17:00 “저희는 미치고 싶습니다.”
투표가 끝나갈 무렵 장내는 결과를 예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어수선했다. 이런 분위기를 흥겨운 축제의 한마당으로 바꿔 놓은 것은 방송인 출신의 한선교씨. 한선교씨는 “한나라당에 부족했던 것은 함성과 기백이다. 이제 우리도 광화문 4거리로 뛰쳐나가 우리의 목소리를 외쳐야 한다”며 대의원들에게 ‘10초간 함성’을 주문했다. 이에 대의원들은 실내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한선교씨는 연단을 내려오면서 “기호 6번 한선교입니다”라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이어 체육관 내에 한나라당의 홍보곡인 ‘태극기 휘날리며’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 열렬히 태극기를 흔들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고조된 것은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 나오면서부터.
갑자기 광주·전남지역 자리에서 여성 당원이 나오더니 일명 ‘관광버스’춤을 선보이자 체육관은 곧 흥분의 도가니로 빠졌다. 뒤이어 당원들 대여섯 명이 합세하면서, 무대는 디스코장으로 보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중앙 연단쪽 호응도 남달랐다. ‘젊은 그대’ 노래가 나오자 박진 의원은 아예 마이크를 잡고 연단을 돌아다녔다.
최병렬 대표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슬며시 눈물을 닦았다. 앙코르송으로 설운도의 ‘차차차’가 나오자 한선교씨는 “야! 한나라당이 미쳐가는구나”, “저희는 미치고 싶습니다”고 외치며 불을 질렀다. 노래가 끝난 후 사람들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했고,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광주쪽 스탠드에서 ‘관광버스’ 춤을 함께 췄던 고동수 제주 도의원은 쉰목소리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다”며 “나도 모르게 흥이 나서 무대로 올라갔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천 시지부의 박미정씨(27, 여)는 “오늘 직접 와보니 한나라당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통쾌하다”, “시원하다”, “놀랍다”는 말을 반복했다.
■17:40 국민은 앞으로 지켜볼 것이다
박근혜 새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최병렬 대표와 후보자들 이름 하나하나를 일일이 호명하며 “고통받는 서민을 대표하고,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하여 한나라 당을 진정한 국민 정당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당원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분위기였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온 박영희씨는(48, 남) “대단히 바람직하다. 결선투표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게임이었다”고 감회를 말했다. 춘천에서 온 임화열씨(50, 남)는 “당직자들이 하나로 뭉쳐 화합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고 밝혔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 당원은 “앞으로 지켜봐야 알 것”이라며 “국민의 눈은 매섭다”고 비교적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좌동욱 인턴기자
[email protected] )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