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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10711
    작성자 : 계피가좋아
    추천 : 13
    조회수 : 3142
    IP : 121.170.***.116
    댓글 : 5개
    등록시간 : 2011/01/16 18:50:53
    http://todayhumor.com/?panic_10711 모바일
    고전펌,브금주의]노인을 위한 레고는 없다


    [AM 04:55]
    오늘도 어김없이 김씨는 새벽 5시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5분전에 잠을 깼다.
    잠을 깨 몸을 뒤척거리기 시작한지는 이미 10분전부터였지만...

    몸이 으스스한게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통합리모콘으로
    실내 온도를 5도 정도 올렸다가 곧 3도를 내렸다.
    월말에 청구될 가스비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전동 침대를 상승시켜 몸을 반쯤 일으킨 후
    정면 천장에 붙어 있는 디스플레이의 전원을 켰다.

    본격적으로 노안이 오자 오랫동안 쓰던 답답한 작은 디스플레이를 바꾸고
    몇년전에 큰맘 먹고 장기 리스로 구입한 90인치 최신형 디스플레이는
    특유의 웅~하는 구동음을 낸 뒤 빠르게 화면을 채워나갔다.

    2039년 5월 14일,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상조회사에서 날라온 생일축하메시지가 가장 먼저 도착해있었다.
    뒤이어 보험회사, 은행 등에서 온 생일 축하 메시지...

    매년 날라오는 상투적인 생일 축하 메시지는
    꼭 이 노인네가 죽었나, 안 죽었나를 체크하는 것같아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게 만든다.
    아직 74세면 그리 늙은 편도 아닌데...






    [AM 08:03]
    뒤늦은 허기를 느낀 김씨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전자 오븐에 데운 식빵 한 쪼가리에 딸기쨈을 발라 입에 쑤셔넣는다.
    메마른 식빵은 껄끄러워서 입에 잘 넘어가지도 않는다.
    식빵을 씹는게 아니라 같이 마시는 오렌지쥬스에 녹여서 겨우 배속으로 집어넣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나이가 들수록 밀가루 음식은 안 좋다던데...

    예전 마누라가 끓여주던 따뜻한 미역국 한 모금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AM 12:35]
    느릿 느릿 두드리던 타이핑 탓에 오늘도 겨우 작업량을 채웠다.
    이놈의 디지털 데이터 입력 작업은 너무나도 지루한 일이다.
    오죽 지루하였으면 공공근로 데이터 입력 작업때문에 노인자살률이 높아진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사실 로봇과 디지털 스캐닝 장비가 발전한 이 시대에 이런 일을 굳이 사람이 한다는 것도 참 시대착오적이다. 노인 일자리 창출이라는 허울뿐인 명분아래 벌이는 이런 공공근로 사업 덕분에 많은 노인들이 겨우 생활을 연명하고 있다.
    물론 김씨도 마찬가지이고...

    시간당 3만원, 하루 6시간이면 18만원, 한달에 20일을 하면 360만원.
    유기농 쌀 20kg 한 포대에 5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초고물가 시대지만
    쥐꼬리만한 연금에 공공근로 일로 버는 수당이라도 보태어
    김씨는 겨우 겨우 한달 생활을 꾸려갈 수 있다.

    공공근로 일도 끊긴다면 꼼작없이 저 멀리 촌구석에 있는 노인요양원에 들어가야할 판이다.
    예전 젊었을때 하던 게임처럼 살아있는 좀비들의 도시인 요양원에 가는 것은 상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엄청난 생활비가 들어가는 사립요양원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예전에는 노인들이 리어카 끌고다니면서 폐지라도 주웠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 그러고 다니다가는 로봇 경찰에게 적발되는 순간 바로 요양원에 보내질 일이다.

    점심을 때우기 위해 전자 오븐에 3분만 돌리면 되는 컵라면을 하나 집어넣고
    김씨는 습관적으로 MMORPG 게임사이트에 접속한다.







    [PM 02:17]
    오늘따라 아이템들이 별로 없다.
    고렙 캐릭터들을 따라 다니며 구걸도 하고 흘린 캐쉬나 아이템들을 주으러 다니는게
    김씨가 매일 게임에 접속하여 알바삼아 하는 일이다.
    물론 좋아하는 게임도 하고...

    문득 자신의 누추한 게임상 캐릭터가 몇십년전 폐지 주으러 다니는 노인네들하고 비슷한것 같아
    김씨는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목요일이라 그런지 동시접속자수도 적고 이벤트도 없다.
    유난히 눈이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아 게임을 종료하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낮잠을 한숨 때릴 시간이긴 한데 아까 컵라면을 먹고
    간만에 한잔 갈아 마신 커피때문인지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그래도 오늘 생일인데 하나밖에 없는 딸년은 전화 한통이 없다.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전화기를 들어 딸년과 손녀 사진이 끼워져 있는 큼지막한 버튼을 눌러본다.
    한참 벨이 울린후에야 딸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다.

    "아...아빠, 죄송한데 지금 제가 곧 회의가 있어서요. 나중에 제가 전화드릴께요.

    "그래...바쁜데 괜히 전화해서 미안쿠나"

    "아참 아빠 오늘 생신이시죠. 제가 너무 바빠서 연락도 못 드렸네요. 좀 있다가 제가 얼마라도 통장으로 입금..."

    입금이란 소리를 듣는 순간 김씨는 너무 짜증이 나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내가 그깟 용돈 몇푼 타먹을려고 전화를 했나...

    사실 팍팍한 생활에 용돈을 받으면 한결 여유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김씨는 용돈을 받을때마다 꼬박 꼬박 모아두었다가
    명절이나 손녀 생일날 줄 장난감이나 게임기를 사주곤 했었다.

    이제는 딸내미도 다국적 기업에 마케팅부서에서 일하느라
    싱가폴에 손녀랑 나가산지도 근 3년이 되어간다.
    5년전 이혼한 사위놈은 도쿄에서 산다나 뭐래나...

    갑자기 7살짜리 손녀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3년전 손녀 생일날 줄라고 사뒀다가 급하게 싱가폴로 발령이 나서
    미처 못전해준 로봇 곰인형을 옷장속에서 꺼내 쓰다듬어 본다.
    사람의 체온을 감지한 곰인형이 두 눈동자를 굴려 김씨를 쳐다보더니
    앙증맞은 목소리로 헬로우 어쩌구하고 인사를 한다.
    곰인형마저 자신을 처량하게 쳐다보는것 같아
    신경질이 난 김씨는 벽에다 홱 곰인형을 던져버린다.
    곰인형은 곧 울음을 터뜨린다.
    징징거리는 울음소리에 더 짜증이난 김씨는 아예 곰인형을 짓밟아버린다.

    이미 커버린 손녀가 이런 유치한 장난감을 좋아할리도 없고
    언제 전해줄지 기약도 없는 이런 쓸데없는건 갖다 버려야 한다.





    [PM 03:04]
    낮잠을 자려고 한시간 가까이 침대에 누워 뒤척거렸지만
    김씨는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역시 늙으면 잠이 준다는게 맞나보다.

    오늘은 그래도 내 생일인데
    간만에 박여사한테 전화해서 간만에 교외로 바람이라도 쐬러가자 그럴까...
    동네 노인케어센터에서 만난 박여사는 70대 초반의 나이에도
    윤기나는 피부를 가진 나이에 비해 젋어보이는 여편네였다.
    모르긴 몰라도 젊었을 때는 그 미모로 여러 남자 후렸을것이다.
    지금도 또래의 남자 노인네들하고 수시로 염문을 뿌리고 다니지만...

    박여사와의 데이트를 위해 기왕이면 교외의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렌트카도 한번 빌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통장 잔고를 보니 식사비와 렌트비를 쓰고 나면
    이번 달 생활비가 마이너스가 난다.
    물론 인생 자체가 줄곧 마이너스 통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의 지출은 너무 부담이 컸다.

    젊었을때는 김씨도 대기업에서 연봉 빵빵하게 받는 중산층이었지만,
    별 노후자금 준비없이 아파트 한채만 겨우 장만했던 김씨에게
    15년전의 부동산 대폭락 사태는 너무 큰 치명타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한테 시집와 고생도 많이 했지만,
    하나뿐인 자식 교육시키는데 남들보다 뒤쳐져선 안된다며
    자식 교육시키는데 강남식으로 올인했던 죽은 마누라가 새삼 원망스러워진다.

    한참을 궁리하던 김씨는 결국 창고방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레고를 집어든다.

    10184 타운플랜...
    레고 창립 50주년 기념판.

    그 동안 모아두었던 레고들을 야금 야금 팔아먹어 이제 거의 없지만
    유일하게 아직도 뜯지 않고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그래도 이왕 결정한거 맘 바뀌기전에 빨리 팔아야겠다는 생각에
    브릭인사이드 장터에 시세보다 몇만원 싸게 올려버렸다.
    순식간에 구매자가 나타나고 온라인입금 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자금을 마련했으니 서둘러 박여사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았다.
    처음에 좀 빼던 박여사도 생일날 혼자 세끼를 먹기는 죽어도 싫다고 하도 간곡하게 졸라대니
    마지 못해 저녁만 같이 먹어주마하고 약속을 해주었다.

    서둘러 렌트카를 예약하고, 식당을 예약하고 택배를 불러 레고를 발송하고,
    간만에 샤워를 하며 부산을 떠니 오후가 휭하니 지나갔다.





    [PM 05:11]
    퇴근시간의 러시아워에 시달리기 싫어 서둘러 집앞에 대기하고 있던 렌트카를 인수받아
    박여사의 집앞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

    이런 제길...
    박여사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며느리가 갑자기 직장에 급한 일이 생겨 손자를 맡기러 온다는 것이었다.

    첨엔 다른 영감하고 데이트 하러 가는게 아닌가 싶어
    근 10분을 넘게 박여사 아파트 현관 앞에 주차를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어떤 젊은 여자가 애 하나를 안고 아파트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자식들이 자기한테 해주는게 뭐있다고...
    급할때만 부모를 찾는 매정한 자식놈들 아직도 뒷바라지 해주는 미련한 여편네...







    [PM 07:28]
    주말의 시작이라 그런지 일찍 시작된 러시아워는
    교외의 레스토랑까지 오는데 근 두시간을 길바닥에서 허비하게 했다.

    요즘은 첨단 스마트 교통제어 시스템으로 트래픽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통제하는데도 이놈의 교통 마비는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는다...

    법으로 자가용 소유권을 모두 몰수시키던지 해야지...

    김씨가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반쯤 먹다 남긴 스테이크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로봇 웨이터를 불러 후식으로 커피를 한잔 시켰다.

    10여년전 마지막 결혼기념일에도
    이 레스토랑에 왔었지...
    건너편에서 휠체어를 탄 초췌한 마누라한테
    이번에도 항암치료 잘 견디면 꼭 나을거라고
    우리 같이 힘내자고 말했었다.

    내가 무슨 놈의 마음 고생을 그리 시켰던건지
    위암이 세번째나 재발한 마누라는 결국 다음해 결혼기념일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 앉아 있으면 주책맞게 눈물이나 흘릴것 같아
    김씨는 커피도 한 모금만 입에 대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PM 09:23]
    렌트카에 올라타 집으로 자동 경로 설정을 하려던 김씨는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경로를 재설정하여 인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짜증만 나는 하루...
    간만에 나선 외출길에 바다라도 한번 보고 와야 마음이 좀 진정될거 같았다.


    하지만 철 지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전구줄 마냥 줄지어 서있는
    퇴근길 차량들의 테일램프의 행렬은 이 시간까지도 좀체 빨리 나아가질 않는다.

    김씨는 문득 갓길에 차를 세우도록 자동 네비게이션 장치에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아직도 못 끊은 담배 한대를 빼어물었다.
    깊게 연기를 빨았다가 내뱉은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씨는 오만 상념이 다 들었다.
    이대로 차를 어디 쳐박아서 이 구차한 인생을 끝내버릴까...
    교통사고로 교도소나 들어갈까...

    실제 요즘 생활이 빈궁하고 가족들에게 소외받는 노인들 중에 일부러 범죄를 일으켜
    교도소에 들어가는 노인네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감방에 가면 최소 삼시 세끼는 해결되고, 친구들도 많으니까...

    그러나, 상념은 결국 상념일뿐
    두 가치를 연이어 피운 담배 때문인지 어지러움을 느끼고
    다시 차에 올라탄 김씨는 차를 출발시켰다.
    더군다나 김씨는 수동 운전으로 모드를 전환시키는 방법도 모른다...

    렌트카 회사에서 메시지가 하나 날라와 있었다.
    현재의 목적지라면 예약된 사용 시간을 넘기게 되는데
    추가 사용 신청을 하고 연장 요금을 내라는 안내였다.

    김씨는 돈도 돈이지만 끝도 없는 러시아워의 차량 정체에 질려버려
    목적지를 다시 자기 집으로 변경한 후 급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시트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 잠시 선잠에 빠져버렸다.







    [PM 11:49]
    평상 시 같으면 10시쯤 잠에 빠져들었을 김씨는
    돌아오는 길에 잠깐 졸았던 탓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하루 종일 썼던 렌트비, 식사비가 무척이나 아까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은 라인에 사는 이씨나 불러서
    동네 술집에서 닭발에 소주나 한잔 마실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낮에 급하게 팔아치운 타운플랜의 빛바랜 박스가 눈에 아른 아른 거렸다.
    30년을 넘게 뜯지도 않고 고이 간직해온 걸...
    팔지 말고 진작에 뜯어서 만들어나 볼 걸...
    하긴 이제 눈이 침침해서 레고같은건 조립도 하기 힘들지만...


    한여름 땡볕이 내려쬐는 아스팔트위를 지나는 달팽이보다
    더 느릿느릿하게 김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잔잔한 얼굴의 주름살을 마디 마디 지나면서...















    슬남이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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