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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의 허위성
어떤 사안을 두고 관련된 당사자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사람이 “너도 나쁘지만 너도 나쁘다.”고 무차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겉으로 공평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매우 불공평하고 편파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태도는 불공평성이나 편파성을 넘어 반지성적(反知性的)이고 반이성적(反理性的)인 사회 풍조를 조장한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작게 잘못한 약자를 크게 잘못한 강자와 똑같이 매도(罵倒)함으로써 마침내 강자를 돕고 싶어하는 의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은 양비론(兩非論)이 계속되면 약자는 설 땅을 잃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두고 깊은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은 크든 작든 서로 차별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일은 지성과 과학과 정의가 해야 할 일이니, 그것을 은폐하는 일이야말로 반지성적이며 비과학적인 것이며 마침내 불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물의 차별성이 제대로 인식되고 각각의 행위가 지닌 차이가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 때에 사회 성원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사회와 과학의 발전도 기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의 차별성을 안다는 것은 사물 낱낱의 본질과 특성을 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며, 복잡하고 다양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는 현실 세계, 곧 자연과 사회를 종합해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얼마만큼 더 크고 작으며, 어느 곰팡이가 사람에게 유익하고 어느 곰팡이가 해로운가, 또 누가 잘했고 누구는 얼마나 잘못했는가, 그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은 무엇에서 연유하는가, 누가 나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고 누가 그것을 부수고자 하는가에 대한 냉철한 대답이 사물을 차별하는 엄격한 과학 정신의 탐구 대상이자 지성이 성찰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성질과 그 특수성을 잘 알아야만 기본적으로 인간 생활이 가능해진다. 또 이 기초 위에서라야 과학도 발전할 수 있고 그 발전의 덕택으로 인간 생활이 더 풍요로워 지는 것이다. 이 논리는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회의 중요한 사건을 두고 국민의 여론을 대변할 언론이나 지성인들이 시시비비를 하지 않을 때에 정치 행위가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여당과 야당의 정치 행위를 두고 옳고 그름과 그 가볍고 무거움을 분별하지 않고 늘 똑같이 비난해서는 정치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사회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면 그 사회를 움직이는 요인들, 또 그 사회가 오염되면서 나타내는 현상들의 미세한 차이와 그 차별성의 연관 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사회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요컨대 사물의 차별성을 정확히 분별하려는 진지한 태도를 버리고서는 자연 과학도 성립할 수 없고 사회 과학도 성립할 수 없다. 사물을 차별하겠다는 과학적인 태도를 버리고 나면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세계는 단순히 혼란스러운 것이거나 모두가 똑같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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