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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media.daum.net/v/20180422220552606
ㆍ“여운형 친일·반역 혐의는 ‘상상’…그에 대한 명예훼손” 결론
보고서 “일본에 봉사 증거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독립과 연결 안되면 협력 안 해
여운형의 친일행위에 대한 1947년 1월11일자 최종 조사보고서는 “여운형이 비밀 요원으로서 일본 정부를 위해 봉사했거나 다른 외국 정부의 밀사로서 활동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였다. 이하 그의 친일 활동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 또는 총독부와의 협력에 대해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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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1940년 고노에 내각이 있는 동안 도쿄를 방문했고 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난징에 파견되어 장제스를 만난다면 만족스럽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로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1944년 가을 고이소 내각하에서 우가키가 중국에 파견되었고 그는 여운형과 가까운 친구였다. 거기에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을 때 여운형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운형을 찾을 수 없었고, 우가키는 여운형 없이 상하이로 떠났다(우가키는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에 전범재판을 받지 않았고, 1950년대 일본의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했다).
많은 경우에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을 그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했다. 1921년 봄 여운형은 도쿄에 초대를 받았지만, 그 회의는 성과가 없었고, 여운형은 상하이로 돌아갔다. 1933년 여운형은 우가키에 의해 귀국했고, 그의 안전과 활동을 보장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이끌어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여운형이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의 절대적 독립을 위한 그의 노력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본과 협력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우가키와 협력을 하기는 했지만 우가키는 일본의 자유주의자로 한국의 자치를 원하고 있었던 일본인이다. 우가키의 기억으로는 여운형은 한국 독립이라는 목적을 잊은 적이 없다. 물론 반(半) 정도는 받아들인 적이 있다. 미나미가 우가키의 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여운형의 협력을 이끌어내려고 했지만, 여운형이 그렇게 하지 않아 실망했다고 말했다. 모든 일본인 총독이 그를 반일주의자라고 했지만, 그가 폭력을 음모하지 않았고 한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몇몇 사건을 빼고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여운형은 일본 항복 이후에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협력했다. 항복 전에 엔도 니시하라와 이소자키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여운형과 논의했다. 여운형은 러시아인들이 서울에 오기 전에 정치범들을 석방할 것을 제안했다. 만약 러시아인들이 들어온 이후에 이들이 집단적으로 석방된다면 여운형은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그가 유혈사태를 막아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여운형은 폭력을 삼가고 평화를 지킬 것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몇 차례 했다. 일본인들은 그의 연설이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믿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여운형이 올바른 길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일본 행정부가 생각했던 바를 따르지 않았다. 일본이 원했던 것은 평화유지위원회의 장이었고, 연합군이 올 때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실질적으로 정부로 여겨질 수 있는 정치적 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경찰국장 니시히로는 여운형에게 100만엔을 주었고, 이는 평화 유지를 위해 여운형의 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모든 결정이 도쿄의 지시 없이 서울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여운형이 연안이나 러시아와 접촉하는 시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나 친러시아파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민족운동을 대표하면서 반일주의자였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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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말미엔 그의 공백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 더 이득 될 것” ‘미국 성공에 필요한 사람’ 언급
보고자는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밑으로부터’ 남과 북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공백으로부터 더 이득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미국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잘 도망다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친일조사 6개월 후 여운형 암살 미군정이 배후로 의심한 이승만 38선 이남 단독정부 대통령 취임 버치 문서엔 축하 내용 전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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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친일 경력 조사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인 1947년 7월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그 직후 모스크바 3상 결정도, 좌우합작위원회도 모두 좌초했다. 그리고 미군정의 요원들이 그 암살의 배후로 의심하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던 이승만은 1년 후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버치 문서군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 중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을 환영하는 내용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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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시기, 미군정기에 온갖 음해공작과 물리적인 정치테러를 수십여차례 겪고도 계속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해왔던 몽양 여운형...
미 8군(존 하지 중장)이 한반도에 입성했을때, 김성수를 위시로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뭉친 한민당 세력들이 '여운형이 일본 총독부로부터 돈받아먹은 친일파다'라고 미군 정보부에다가 허위보고를 했었죠. 그때문에 미8군 사령관 존하지는 여운형을 처음 만나보자마자 '너 친일파지? 일본으로부터 돈 얼마받아먹었냐?'이런 모욕적인 소리 듣고 그랬던..
나중에 미군정에서 여운형이 어떤인물인지 궁금해 직접 정보부내 조사단을 직접 꾸려서 일본 G-2 사령부로간다음, 과거 조선총독부 고위직에 있던자들 여러차례 만나 여운형이란 인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심문하면서 내린 최종조사는 '여운형에 대한 친일혐의는 아무것도없음'.. 그리고 미군정은 여운형을 자기네편으로 끌어들이도록 굉장히 많은 노력을할만큼 호감을 가졌었죠...
실제 여운형이 암살당일(1947년 7월 19일)에 미군정에서 그에게 민정장관직을 제안했고, 여운형은 그 민정장관직 제안을 받아들일려했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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