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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를 탄생시킨 16세기 종교개혁의 3대 지표중의 하나가 오직 은혜였습니다.
수도사들의 대부분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했지만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이 배운 신학, 그들이 속한 교회늬 가르침 수도원의 계율
그 어떤것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절망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오직그리스도의 은혜로 살리라!
그들은 벅찬감동을 만납니다. 오직은혜! 정죄함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다!
나는 구원받으리라 오직 은혜로 구원받으리라!
그후 개신교는 언제나 은혜를 강조합니다. 개신교의 모든 교파가 은혜를 강조합니다. 개신교에서
은혜는 중요한 언어이며 종교개혁을 시기하는 중요한 상징 입니다.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이고 그러기에 귀한 것입니다.
은혜는 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녀 은혜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평범하고 아무런
감동과 감격없이 말해지는 생활 언어가 된것입니다.
인사말로 사용하거나 다른사람과 자신의 의견이 맞지않으면
은혜가 안된다라고합니다. 아니면 다툼이 생기면
은혜롭게 합시다 라고도 합니다. 까다롭게 하지말고 대충 넘어가자는 뜻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 일상의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은혜는 귀한 단어입니다. 또한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과 피조물에 대한
구원사역을 은혜로 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과 피조물에 대해 값없이 베푸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은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구원받을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갖는 한계이며 이 한계가 바로 인간의 죄성입니다.
은혜가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받았다고
은혜가 가치가없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의 값이 없는 이유는 인간이 노력해서
획득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나 은혜가 강조되면 인간은 수동적이 되고 인간의 책임성이 약화된다는 생각은
은혜에대한 오해에서 기인합니다. 성경은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이 행하는 일방적인 것이며
언제나 인간의 노력에 앞서는 우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방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이 될수 없다는 말이고
우선적 이라는것은 은혜를 받기 위한 어떠한 신체적 노력이나 자격이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중 포도원의 일꾼을 보면 주권자가 세상의 가치체계와 전혀다른 새로운 질서를
보여줍니다. 은혜는 주권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이렇게 일방적입니다.
뒤늦게 포도원에 온 일꾼처럼 탕자처럼 1만 달란치 빚진자 처럼 간음한 여인처럼 더이상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대가 없이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구원에 대한 책임성은 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 마지막 순간에 은혜를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책임성과 같은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무능한 곳에 은혜가 임합니다. 은혜가 커진다고 인간의 책임성이 작아지는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책임성은 은혜에대한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은혜의 놀라운 체험이후에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은혜가 크면 책임성이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가 큰 곳에 책임성도
크게 나타납니다.
은혜가 귀하게 되는 것은 은혜에 순종하는 따름이 있기 때문입ㄴ디ㅏ.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에 응답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책임성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은혜에 들어간 신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명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은혜를 체험하면 그에따른 소명이 올것입니다.
이때 소명은 채임감으로 나타납니다. 자기자신, 가족,이웃,민족,역사에 대해명확한
기독교적 책임성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은 삶을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자신을 새롭게 관계합니다.
기독교인의 책임성은 건조한 의무감과는 다른것 입니다. 어쩔수엇이 행하는
실천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책임성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므로 언제나 감사의
모양을 가집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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