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miboard.miclub.com/board/board_view.php?bid=1001&aid=21910843 딸의 미소는 남성들의 판타지일 뿐 (삼성생명 TV광고 ‘인생은 길다’ 딸 편)
박희정 기자
2005-08-08 23:49:47
저녁 식사 자리, 등을 두드리는 아버지의 손길에 딸은 불편한 얼굴을 보인다. 알고 보니 처음 착용한 브래지어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장조림 많이 먹어라” 하며 다독이는 아버지의 말에 딸은 수줍게 미소를 짓는다.
삼성생명의 TV광고 시리즈 ‘인생은 길다’ 중 딸 편의 내용이다. 화면이 진행되는 동안, 광고에서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딸의 인생은 깁니다. 어느새 여자가 될 것이고, 사랑을 하고, 결혼하고 엄마가 될 것입니다” 라는 나레이션이 흐른다.
‘훈훈한’ 성장의 확인?
이 광고는 딸의 성장을 깨닫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루고 있다. 훈훈하고 감동적이어서 ‘눈물까지 흘렸다’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도 들리는 걸 보면, 많은 남성들이 이 광고의 정서에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켠에서 불편한 감정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S씨(28)는 광고를 보며 느꼈던 불편함을 이렇게 말한다. “브래지어를 한 등을 만지는 모습이나 움찔거리는 딸의 모습이 싫었어요. 그 상황에서 느꼈을 기분 나쁜 감정이 떠올라서. 실제였다면 그 상황에서 결코 딸은 웃지 못하죠.”
우리 사회에서 딸들에게 성장, 특히 ‘성적인 성장’은 훈훈한 경험이 되지 못한다. 광고 속 딸도 브래지어를 한 등에 아버지의 손이 닿자 깜짝 놀란다. 십대 여성들에게 성적 성장은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일처럼 되어있다. 브래지어 자체도 몸의 건강과는 상관없이 가슴을 보정하고 감추기 위한 것이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긴장하거나 누가 만지기라도 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딸의 모습은 훈훈하기 보다는 차라리 안타까운 모습에 가깝다.
“딸 같아서 만진다”
여성들이 이 광고를 보면서 느끼는 불편함의 한 켠은 ‘몸을 만지는’ 행위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이라든가 친하다는 이유로 타인의 몸에 손을 대는 행위가 쉽게 용납이 되는 경향이 있다. 나이 지긋한 분이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되면 “딸 같아서 만진 건데 잘못이냐?”는 변명(?)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성장을 기뻐한다는 의도로 몸을 만지는 일들이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 되기도 한다. P씨(30)는 초등학교 시절 가슴이 나오기 시작한 걸 흐뭇해하던 아버지가 맨 가슴을 만진 일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야 나쁜 의도가 없으셨겠지만 기분이 나쁘고 싫었거든요. 기분 나빠하는 걸 귀엽게 여기는 게 더 싫고 화가 났지만, 별 수 없었죠.”
“딸 같아서 만진다”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삼성생명의 광고는 많은 여성들에게 불편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광고 속에서는 의도된 스킨십이 아니었지만, 불편해하는 딸의 모습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점 자체가 이미 여성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자로서의 인생?
광고의 마지막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 딸의 모습은 그래서 불편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지도 못하다. 성적인 변화를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십대여성의 모습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남성들의 판타지일 뿐이다.
무엇보다 딸의 성장을 대표할만한 것이 어째서 브래지어가 되어야 하는가. ‘여자’ ‘사랑’ ‘결혼’, 딸의 인생을 한정 짓는 말의 진부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바꿔서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처음으로 수염이 나거나, 첫 몽정을 한 아들을 두고, “어느새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될 것입니다” 라며 흐뭇함을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은 쉽게 연상되는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아들의 성장’이 가지는 이미지는 성적 성장, 가정을 이루는 것 등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인생은 길다’ 시리즈 광고를 두고, 흔히 접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리얼리티’ 광고라 한다. 그러나 그 리얼리티 속에 실제 딸의 성장과 느낌은 박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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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ildaro.com 여자들은 이렇게 보는군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