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내향적이고 인간관계도 좁게 만드는 아이예요
부모님과 누나들의 억압 속에서 자라다 보니 잘 하는 것이라곤 참는 것 공부하는 것 그런 것 밖에 없어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어요
스스로 하고 싶은 것도 목표도 되고싶은 것도 없이 그저 현재만을 열심히 참고 사는 사람이예요
부모님 결정에 따라 학교를 썼고 네임밸류 제일 높은 곳으로 갔대요
피상적인 인간관계는 잘 만들고
겉으로는 사교적이고 친절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정과 깊은 속내를 나누는 것이 아닌 필요해서 만든 친구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선 연락을 다 끊을 거래요
여자친구인 제가 남자애들만 만나지 말고 여자애들도 만나서 놀라고 해도
만날 남자애도 없다고, 자기는 여자고뭐고 그냥 관심이 없대요
그런 애가 어쩌다 저에게 반했는지
사귀자고 해서 사귀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일 수가 없었어요
취향도 식성도 정말 잘 맞았지만 제 말이라면 다 좋다 옳다 하고
제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난 날 당일에
넌 정말 부모님께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는 말을 했을 정도예요
사귀고서도 한동안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예쁘다고 했고
무언가 제가 불만을 표시하면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하며 안절부절하던 그런 아이였어요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하며 보듬어주어야 겨우 벗어나는, 그런 아이였어요
제 기분이 상하면 안절부절 못하고 절 어떻게 대해야 할 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였어요
제가 그 아이에게 하고싶은 말들을 메일로 정리해서 보냈다고 하니
혹시라도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할까봐 무서워서 메일을 열어보지도 못 하던 아이였어요
저도 참 그 아이에게 잘 했고 그 아이도 저를 참 많이 좋아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리는 일 없이 제게만 잘 하는 모습이 너무 좋고 고마웠어요
그 순둥순둥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에 끌려 사귀게 되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아이의 마음이 점점 식어가면서 본색을 드러냈어요
자기는 자발적인 외톨이래요 혼자 있는 게 좋대요
가끔 외로워지긴 하는데 잠시뿐이래요
나랑 사귀는 게 피곤하대요.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 곁에 있든 그건 마찬가지였을 거래요
자기가 가장 원하는 건 주변에 아무도 없고 해야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거래요
그 말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이나 윗사람에게 순둥이였던 그 모습은 사실 그냥 받아들이고 참고 포기한 모습이었고
다정다감한 모습은 연료처럼 저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고갈되면서 싹 사라져 버렸어요
그런데 저는 어쩌나요. 처음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바뀌어버리니..
그래도 저는 그 아이가 드러낸 그 모습마저 좋아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이해하고 받아주고 보듬어주고 지켜주고 싶었어요
그 아이는 저를 점점 피하고 귀찮아하기 시작했어요
그 아이의 조건 이런 거 하나도 없어도 좋으니 그 아이 자체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무진 노력하고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그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찾기 위해,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그 아이 속에는 자신밖에 들어가있지 않았어요
결국 저도, 제가 주는 관심도 그 아이에게는 불필요한 거지만 이미 일을 벌려놓아서 주어진 책임처럼
그저 안고 가야 할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그 아이는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참고 책임감으로 저를 만났던 것 같아요
그렇게 1년여를 더 만났어요
그리고 최근에 헤어졌어요
바쁜 것을 핑계로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제가 먼저 해야만 성의없는 답이 돌아왔어요
그에 관해 화낸 것도 아니고, 부탁을 했어요
내게 네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잘해줄 필요는 없고, 그냥 네가 가능한 선에서 내게 관심을 갖고 그걸 표현해 달라고
그랬더니 그 아이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안 들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해요
제 관심이 사랑이 귀찮고, 자기가 뭔데 날 그렇게 망쳐놓나 하는 미안함만 들었대요
그러면서 예전에 들었던 말을 또 반복해요
자기는 완전하게 혼자가 되고 싶다고..
제가 주는 사랑이 별로래요
누가 자기에게 관심가져주는 게 별로래요
관심 좀 가져달라고 안달하는 날 보면서 측은하고 마음이 안 좋았을 뿐이래요
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냐고 물으니
내가 맘에 들고 안 들고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는 그냥 혼자가 되고 싶대요
어떤 사람이 자기 곁에 있든 그건 마찬가지였을 거래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혼자 있고 싶을 뿐이래요
그래서 헤어졌어요
사귀면서 처음 그 때 말고는 별로 좋은 기억도 없고
처음과 최근까지의 그 아이의 갭이 너무 심해서 연애 초기의 모습은 그냥 비현실 같아요
그래서 헤어졌지만 많이 힘들지도 않고 어딘지 올무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그런데 정말이지, 600일 가까이 사귄 사람이지만
내 남자친구였던 아이를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서운하기도 하지만, 딱하고 측은하기도 해요
저도 사람들 만나는 것보다는 혼자 조용히 노는 걸 더 좋아하는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그동안 어떻게 살았기에 그렇게까지 혼자이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저조차 이해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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