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위해서 다시 여러 책들을 찾아보다가 조선상고사를 다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역사 인식에 대한 말들이 있었는데, 참고 삼아 올려봅니다. 다시 보니까 재밌는 게 정말 많네요.
제가 임의로 발췌한 것이므로 그 전문을 살펴보고 싶다면 시중에 조선상고사 책이 많고 도서관에도 있으므로 찾아 보셨으면 합니다.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습니다.
제목에 적었듯 신채호 선생의 역사 인식을 다룬 것이므로 조선상고사의 세부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총론의 역사 인식 부분을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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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론
1. 역사의 정의와 조선 역사의 범위
그러나 만일 묘족, 한족 등 비아인 상대자가 없었다면 조선이란 국명을 세우거나 삼경을 만들거나 오군을 두거나 하는 등 아의 작용도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후천적인 것에 속한 것이다.
2. 역사의 삼대 원소와 조선 구사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쓰는 것이고, 역사 이외에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쓴 것이 역사이지,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지우지하거나 덧보태거나 혹은 바꾸고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연개소문을 그리려면 얼굴 모습이 크고 준수하게 생긴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을 그리려면 몸집이 작고 못생긴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약 한쪽을 억누르려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서로 바꾸면, 화가의 직분을 어길 뿐만 아니라 본인의 얼굴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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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있는 것이 그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 중 일부입니다. 한족이라는 비아, 우리가 아닌 것이 있기에 이와 투쟁하면서 조선이라는 국명이 생겼다는 것이죠. 참고로 묘족은 치우의 후예입니다.
저기서 잘 살펴볼 것은 "객관적으로 쓴 것이 역사이지,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바꾸고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로 연개소문과 강감찬의 예를 드셨죠. 실제 강감찬은 작고 못생긴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목적을 위해 속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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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로 되는 것은 박 석 김 세 성과 돌산고허 등 육부 사람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경상도라는 그 땅과 고구려 백제와 동시대인 그 때로써 신라가 되는 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서 2천년 이전의 왕검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년 이후 오늘날의 우리와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의 성지와 육부 사람들의 질박하고 곧은 성품에 계림 지역의 땅을 가지더라도, 당시에 되었던 신라와 꼭 같은 신라가 될 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구라파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더라도 또한 다른 모습의 나라는 될 수 있었을지언정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지극히 명백한 이치이거늘, 이전의 조선의 사가들은 언제나 그 쓰는 바 역사를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위하여 희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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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가 경상도에서 세운 신라" 이것은 그 때 그 지역에 있었기에 신라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목적을 위해 사실을 바꾸면 안 되는데 조선의 역사가들은 목적을 위해 사실을 희생시켰다고 하셨죠.
신채호 선생이 쓰신 책 중에 "일목대왕의 철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역사에서 패한 궁예를 재조명하는 책이었죠. "목적"을 위해 "사실"을 바꾼다.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실제 삼국사기나 고려사 내에서도궁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결론은 언제나 포악해서 왕건이 그것을 없애고 왕이 된 것이다라고 서술돼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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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사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그 뒤에 세조는 (중략) 조선의 문헌들을 정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불경을 인쇄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사료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과 조선의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고, 그 외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다대한 공헌은 으나 미소한 공적은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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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후 역사서들을 편찬하는 등의 행위에 대한 고찰입니다. 세조의 경우 사료들을 모으는 데 주력했고, 여러 책을 편찬해서 작은 공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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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한 참고
(4) 위서의 변별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서적들을 불살라 없앤 적(이조 태종의 분서 같은 것)은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없었다. 근래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처음으로 출현하였는데, 아무도 그것을 변박한 일이 없었음에도 그것을 고서로 믿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서적은 각씨의 족보 중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진위의 변벌에 그리 신경 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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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서를 만든 일이 없으므로 최근에 나온 책들은 반박할 필요 없이 위서고, 개인 가문의 기록은 의심해 봐야겠지만 보통 한국에서 나온 사료들은 진서, 위서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조선의 사료에 대한 믿음이 크시네요. 이후는 일본, 중국의 위서들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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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서의 개조에 대한 소견
(3) 감정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모년(연도를 잊어버렸으므로 뒤에 말하기로 한다)의 영국 해군성 보고서에 "세계 철갑선의 비조는 1592년경 조선 해군대장 이순신"이라고 한 기록이 영국사에 올랐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당시의 배가 철갑이고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고 하면서(일본인이 이 말을 하면서 든 각종 조선사의 그 책 이름들을 잊었고, <이조 오백년사>에도 이 말이 나와 있으나 그 저작자의 성명을 잊었으므로, 나중에 다른글에서 밝히기로 한다.) 그 보고서가 틀렸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를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서를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조선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먼저 철갑선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암암리에 논쟁거리가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거짓 주장인지라 반박할 가치조차 못 되거니와, <이충무공전서>에서 설명한 거북선의 제도를 보면, 배를 목판으로 덮었지 철판으로 덮었던 것은 아닌 듯하므로, 이순신을 장갑선의 비조라고 할 수는 있어도 철갑선의 비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철갑선의 창제자라고 하는 것이 장갑선의 창제자라고 하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창제하지 않은 것을 창제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의 단계를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지, 고려의 어떤 명장이 증기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신용할 수 없는 것은, 남들을 속일 수 없으므로 그럴 뿐만 아니라, 곧 스스로를 속여서도 안 되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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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감동한 부분입니다. 실제 현 학계에서 철갑선 설은 부인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부인한 분이 신채호 선생님이셨군요.
철갑선의 창제자라는 것이 더 명예롭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왜곡하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와 연결된 것이 "남들을 속일 수 없으므로 그럴 뿐만 아니라, 곧 스스로를 속여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입니다.
조선상고사는 일본인의 간섭 없이 나온 근대적인 첫 역사서입니다. 현대에는 많은 부분이 반박되고 있다 하나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볼 수 있듯 그 정신은 지금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안타까움이 많이 느껴집니다. 괄호로 돼 있는 부분은 제가 따로 달거나 책에서 단 것이 아닌, 신채호 선생께서 직접 다신 주석입니다. "책 이름들을 잊었다" "책 저작자의 성명을 잊었다"는 것은 신채호 선생께서 가난하셨기 때문에 책을 직접 외운 후 적으셨던 것이 큽니다. 하지만 강직한 분이셔서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절대 거절하셨죠. 그 분의 남은 편지를 보면 "돈이 조금만 있다면 이 책을 구할 수 있을 텐데"라는 것이 많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이상 조선상고에서 나타난 역사 인식을 간단히 간추려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서적들을 불살라 없앤 적(이조 태종의 분서같은)은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처음으로 출현하였는데, 아무도 그것을 변박한 일이 없었음에도 그것을 고서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지, 고려의 어떤 명장이 증기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신용할 수 없는 것은, 남들을 속일 수 없으므로 그럴 뿐만 아니라, 곧 스스로를 속여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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