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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초반 아재입니다. 대학교 학번으로는 85학번이기도 하지요. 얼마 전 영화 1987을 봤는데 그 당시 상황이 너무도 생생해서 참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습니다. 디테일이 정말 좋더군요. 특히 김태리와 가족들이 교도관인 삼촌이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고문당할 때 그 앞에서 항의 시위하다가 강제로 차에 태워져 어딘가 멀리 끌려갔다 내려져 비 오는 날 추적추적 힘없이 걸어오던 장면 기억나시죠?
배우 김태리가 비맞으며 추적추적 걷는 그 길의 뒷배경에 이정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화정이라고 써있었죠. 네. 맞습니다. 그 당시 항의 시위를 하다가 구속까지 시킬 상황이 아니면 다시 시위에 합류하지 못하게 하려고 멀리 갖다가 내버리곤 했습니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고양시 화정 부근이기도 하고, 그곳 가는 길의 난지도 쓰레기장 부근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저도 몇 번 당해봤네요.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죽은 사실을 듣고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당시 우리 대학에서는 총학생회가 완벽하게 붕괴되었습니다.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전원 제적, 구속 되었던 상황이었거든요.
당시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던 시기인 저는 그런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제가 다니던 동아리방(KUSA= 유네스코학생회)에 박종철 열사 분향소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학교 곳곳에 대자보를 붙여서 박종철 열사 분향하실 분들은 KUSA 동아리방으로 오세요라고 안내를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분향을 와러 왔습니다. 그 때 학보사 기자도 와서 취재를 한 후 학보에 냈는데 그 기사를 본 학생처에서 호출을 하더군요. 당시 학생처는 거의 공권력 수준으로 학생들을 탄압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은근히 협박도 많이 하고 공작도 많이 하던 곳이예요. 학생회와 동아리에 프락치를 심어놓기도 했답니다.
학생처에서 은근히 협박을 하더군요. 너 재적당하고 싶냐, 왜 이런 짓을 하냐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넌 앞으로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 같은 것에서는 다 제외 대상이다라는 치사한 얘기까지 하면서 겁을 주더군요.
그 때 쫄기보다는 화가 났습니다. 이 자들이 정말 나를 뭘로 보고. 그 때 붕괴된 총학생회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저는 3학년으로 총학생회장에 출마했습니다. 2명의 후보가 있었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제가 당선됐습니다. 처음에는 기호 1번 후보인 선배형이 당선되면 그 총학생회에 합류해서 사회부장(= 투쟁국장) 같은 것을 하려고 했다가 졸지에 당선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5월 18일에 광주항쟁 추모대회겸 총학생회 발대식을 하고, 그 이후로는 쭈욱 거의 매일 같이 데모를 했습니다. 그 때 슬로건이 전두환이 군부의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그 음모를 부수고자 했던 구호, 바로 ‘호헌철폐, 독재타도’ 였던 것입니다.
6월 10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한 학생 총궐기를 위해 학교 강의실 앞에서 단식투쟁하는 모습.
영화 1987의 그 장면처럼 거의 매일 같이 짱돌과 최루탄이 공방전을 벌이는 전쟁 같은 격렬한 시위를 했었네요. 학교는 늘 와사비를 한 숟갈 퍼먹은 것 같은 눈물 쏙빠지는 매운 최루탄 냄새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어요.
결국 노태우의 항복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대통령 선거의 승리로 잇지는 못했네요. 당시 막 대학에 입학했던 후배들인 87학번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87학번 후배들은 대학교에 입학해서 3학기나 연속해서 기말고사를 보지 못했던 학번입니다. 87년 6월 항쟁으로 1학기 기말고사, 87년 12월 대선투쟁으로 2학기 기말고사, 그리고 88년 1학기 남북학생회담과 통일투쟁으로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또 못봤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88년 상반기에는 전국의 각 대학이 ‘남북학생회담이라는 이슈에 몰입했습니다.’ 88년 6월 10일에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이라는 것을 개최하자'는 것이죠. 바로 다음 달이면 판문점에서 있을 남북정상회담이 그래서 더욱 뜻깊게 느껴집니다.
결국 88년 6월 판문점에서의 남북학생회담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남한의 대학생들은 걸어서 판문점까지 가려고 하다가 홍제동 사거리에서부터 막혀서 수만명의 학생들이 사거리에 누워서 연와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진압하는 경찰을 뚫고 판문점이 멀지 않은 임진각까지 가서 하기도 했었죠.
임진각에서의 연와 시위
당시 구호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그 구호는 88년에 만들어진 구호가 아니라 1960년 4.19혁명 직후에 만들어진 구호였습니다. 한국전쟁을 치룬 지 10년 밖에 안됐던 그 때 통일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안고 교수, 지식인, 학생들이 내걸었던 구호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로 완벽하게 진압됐었죠. 그 이후 28년만에 부활한 것이 88년의 남북학생회담 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30년이 지나서 드디어 가슴 설레는 판문점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평양을 다녀온 우리 특사단이 문재인 대통령님께 보고를 한 후 다시 기자회견을 할 때 4월 말에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설렜는지 모릅니다.
“이야, 드디어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구나”
가슴 설레는 그 소식에 이어 미국을 방문한 특사단을 통해 5월에는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20대 뜨거운 열정의 대학생 시절부터 그토록 바랐던 그것이 이제야 비로소 실현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점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요즘은 다른 어떤 뉴스보다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관련 뉴스를 찾아보고 또 찾아봅니다. 이명박과 그 떨거지들 어서 구속시켜서 감옥안에 쳐넣고 난 다음에 맘 편안히 남북정상회담을 기분좋게 즐기고, 한 달 후의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위대한 변곡점이 시작됐으면 좋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실현하고자 구상은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던 대륙횡단열차. TSR(시베리아횡단열차)와 TCR(중국대륙횡단열차)가 이제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만 같습니다. 러시아로부터 이어지는 천연가스를 나르는 파이프가 북녘땅을 거쳐서 한반도의 남쪽에 공급되어질 그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반도 공동번영과 평화정착의 매우 견고한 안전판이 될 것입니다.
20대의 뜨거운 열정이 30년의 시간을 거쳐 50대가 된 요즘, TV 뉴스가 꼴도 보기 싫어 끊고 살았던 이명박근혜의 치욕적인 9년을 견뎌낸 보람을 느낍니다. 요즘은 생명존중의 마음으로 유기동물 구호활동가로 일하고 있지만 20대의 그 뜨거웠던 열정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제 삶의 가장 기분 좋은 이벤트는 서울역에서 출발해서 중국과 러시아를 관통하여 유럽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차곡차곡 모아둔 적금을 깨서라도 꼭 가고 싶네요.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을 기대하며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요즘의 하루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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