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집에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는 지방출신 학생이다.
게다가 우울하게도 고1 입학 당일부터 시작해서 밤 10시까지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하고
고3때에는 일요일과 방학중에도 자정까지 자습을 해야만 했던 나의 모교는
소위 말하는 스카이대에 1년에 5명 이상 진학하지 못하는 지방의 전형적인 학교였다.
그러나 운 좋게도 수능은 내게 딱 맞는 시험유형이었고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수능형"이라는 교사들의 기대(?)를 받으며
가사, 체육 등 수능에 나오지 않는 과목들은 완전 무시하고 3년 내내 오직 수능만을 위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공부했다.
그리고는 그렇게 쉬운 것도 시험이냐며 선배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01학년도 수능에서 98%의 정답률로 오직 수능성적만으로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렇게 수능 하나만을 바라보고 공부했지만 허무하게도 내린 결론은 '수능은 쓸데없는 시험'이라는 것.
일단 물질주의, 학벌주의 대한민국에서 돈이 없어도 이 로열클럽(?)에 끼워준 이 학교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보다 역사의식이 있고, 나보다 문학에 조예가 깊고, 나보다 창의력이 뛰어나고, 어쩌면 나보다 두뇌회전이 빠를 어느 누군가를 떨어뜨리고 굳이 나를 선택한 점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들보다 나은 점은 오직 수많은 문제풀이로 인해 "5가지 중에 어떤 것이 그동안 보아온 답과 가장 유사한지를 알아내는 것"외에는 없었다. 아, 답안지에 틀리지 않고 빠르게 마킹하는 스킬도 그들보다 나은 점이었던듯.
그리고 객관식이라고는 없는 대학에 들어온 나는 12년간 지속해온 유일한 특기인 "5가지~"를 더이상 발휘할 수 없다는데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아마 그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더욱 무력해질것이다.
교양수업시간에 예로 든 프랑스의 바깔로레아 문제가 생각난다.
"과학과 신앙은 절충될수 있는가".. 거의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듯.
우리나라에서 이런 문제가 나온다면 분명 모범답안을 기초로한 고액과외가 판을 치고 학생들의 답안은 천편일률적으로 나오겠지.(논술답안이 이미 그렇지 않은가.)
그 수많은 서술형 답안지를 채점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채점할 수 있는 교수들도 많지 않고,
만약 채점을 하더라도 "객관성"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프랑스는 바깔로레아를 그냥 자격시험화하지 않는가.
중요한 차이점은 프랑스의 사회는 우리나라처럼 대학의 이름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겠지.
아직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평준화는 이상향일뿐 현실화 하기에는 갭이 좀 큰것같다.
아마도 평준화가 실현되려면 소위 일류대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상당한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는 각계 지도층이라는 이들의 찬성표가 없으면 불가능할테니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문제가 되는 학교들은 모두 입학정원이 정해져있는 관계로 원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
(사실 학교측에서는 많은 학생을 뽑을 수록 돈을 많이 벌어 유리하다. 하지만 교육부에서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대학에서는 "우수한 학생을 뽑을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사실 학교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제비뽑기로 학생을 선발할 게 아니라면 좀 더 우수한 학생을 뽑아서 훨씬 우수한 학생으로 길러내는게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논의의 대상이 되는 수시로 입학할, 혹은 입학한 후배들은 아마도 꽤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선생님이 찍어준 문제와 답을 잘 외우는 '암기력'(이게 내신 아닌가),
'경제력'(대학학비도 스스로 벌어서 납부해야만 하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최소한 과외비와 학원비는 대줄 수 있는 부모님을 가지고 있지않은가),
그리고 감사하게도 선배들과 주위 환경이 잘 닦아놓은 '명문고'라는 타이틀까지..
그럴바에는 차라리 예전처럼 5지선다형 인간을 뽑는게 낫지 않은가.
그들은 쓸모없는 암기력과 명문고라는 타이틀 대신에
'5가지 중에 출제자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를 찍을 수 있는 능력은 있지않은가.
그런 학생들은 "진리와 자유의 뜻에 따라 겨레와 인류에 이바지할 인재"가 되어 학교를 빛내는 것은 힘들지 몰라도
예전처럼 최소한 고시합격률과 토익점수로는 학교를 빛낼 수 있을테니까..
사실 지금에야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인데...
원서접수할때 담임선생님이
"너희가 대학을 잘가야 후배들이 편하다. 이제부턴 너네가 대학 간 수대로 후배들도 그 대학에 넣어준댄다."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아마도 일선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이미 몇년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이번 사태는 새삼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대학들에 책임을 미루고 있는 교육부도 어이가 없다.
수시모집을 늘리라고 각 대학에 압력을 넣으면서
수시모집의 학생선발에 관해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해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이제와서 등을 돌리고 원칙이 아니라며 칼날을 들이미는지..
가장 우스운 것은 언론의 플레이이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무조건 강남과 비강남의 대결구도로 비약시켜서 국민들의 반감을 몰아가고 있다.
도대체 입학전형 어느항목에 "강남지역 고등학교에 가산점을 준다."라고 규정되있는지 묻고싶다.
베스트로 간 글중에 "차라리 이 학교들에 가산점을 주라"라는 글을 보고 놀랬다.
그러나 이내 '언론이 하는 말만 듣는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그 글쓴이에게 미안하지만 그 학교들에는 이미 강남의 모고교들보다 더 큰 가산점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시사만평이나 기사에서 '특목고(외고,과고)'와 비평준화 명문고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오직 강남과 비강남/지방 으로만 양분화해서 이간질시키고 있다니...
도대체 어느나라 언론인지..
완전 당나라 언론이 따로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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