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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101245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3
    조회수 : 2546
    IP : 72.83.***.206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20/03/27 12:18:32
    http://todayhumor.com/?panic_101245 모바일
    21세기 무림인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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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무림인으로 산다는 것



    무림삼형제

    로스앤젤레스에서 바닷길로 팔십 리 떨어진 카탈리나. 산타 카탈리나 섬. 석달 전에 그 섬의 인구가 세 명 늘었다. 그들이 1년에 백만 명의 여행객이 몰린다는 그 작지 않은 섬에 산 페드로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것은 관광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3년을 주민으로 살기 위해 간 것이었다. 이미 4천 명이 넘는 주민이 살고 있는 그 커다란 바위섬의 자치정부가 하나같이 백수인 그들을 특별히 초빙했을 리는 만무했다.

    민공, 대협, 도사. 무림인사들인 세 사람은 로스앤젤레스같은 번잡한 대도시를 떠나 조용한 심산유곡에서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 그 황량한 바위섬으로 온 것이었다. 이십대인 그들은 부모의 슬하에서는 진작 벗어났고 돌봐야할 가족은 아직 만들지 않았으며 온라인 대학에 적을 두고 있어 자유롭고 호기롭기 그지 없는 영혼들이었다.

    무림인사, 그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고대 무림기사들의 이야기인 초인문학을 실제로 구현하겠다고 덤비는, 기본소득 시대에 생겨 무수히 많은 낭만파 무리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쯤은. 그래도 편리한 사이버 가상세계로 도피하여 이중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리는 오타쿠와 히끼코모리가 많은 다른 낭만파들과는 달리 몸을 쓰고 몸을 만들어서 몸으로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무림인사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매우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세 사람이 딱 그랬다. 카탈리나 최고봉인 오리자바 산 정상을 아침마다 오르며 기초체력을 단련했고 오후에는 본격적인 무공수련에 전념했다. 민공은 권각술, 대협은 검술과 비검술, 도사는 궁술의 고수를 꿈꿨다. 그리고 무공수련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에서 몸을 덜 쓰게 만드는 도구나 기술은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었다.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어떠한 형태의 근육강화제도 투여하지 않은 팔과 다리를 쓰는 권각술, 서로의 위치와 속도 정보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한 쌍의 칩을 검과 소뇌에 심지 않는 검술과 비검술, 그리고 레이저 조준장치와 스마트 화살을 쓰지 않는 궁술은 물론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있어 외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도구는 일절 쓰지 않았다. 21세기에는 흔치 않은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은 그들이 오로지 기본소득에만 기대어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고기 먹고 싶네."

    민공이 모닥불에 콩줄기를 구우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협과 도사는 약속이나 한듯 민공 대신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모닥불 옆에 콩줄기를 수북히 쌓아놓고 한참을 먹었지만 포만감은 쉽게 오지 않았던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은 신기하게도 겉배만 부른 공복감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거였다.

    "고기, 먹지 뭐."

    대협이 활기차게 대꾸했다.

    "나보고 토실토실한 야생 새끼 염소라도 한 마리 쏘아 잡아오라는 뜻?"

    도사의 말에 민공과 대협은 물론이고 도사 자신도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콩줄기에 다시 전념하게 되었다.

    도사도 두 손에 콩줄기를 들고 있어 손짓 발짓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하루 동안 그들이 나눈 말들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그의 말에, 생생한 소리와 영상과 느낌이 각자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화살촉이 살을 헤집고 들어가는 느낌, 목뼈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 중간에서 싹뚝 잘려버리는 염소의 단발마, 아직도 버지럭거리는 사지, 밑에 깔린 잡목 줄기와 잎사귀를 타고 흘러내려 누런 먼지와 흙과 돌바닥에 홍건히 고이는 피 웅덩이, 어느새 빛을 잃고 동태의 것처럼 되어버린 눈동자. 거기다가 가죽을 벗기고 기름덩이를 떼어내고 척추를 마디마디 잘라내고 허리를 끊어내는 사등분까지.

    모닥불에 걸어 노릇하게 구워도 좋고 가마솥에 풍덩 빠뜨려 푹 삶아도 좋겠지만, 고기로 한번 포식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그 모든 세세한 과정들이 너무 적나라하다 못해 아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사냥당하는 염소에게 가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아니라, 염소 사냥하는 자기자신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무기에 벌어지는 참혹이었다. 적중시켜야 할 우주의 핵심을 한참 벗어나 염소 목뼈에 박힌 화살의 떨림, 허공을 움키고 전신경맥을 자유자재로 운기하는 권각술을 펼쳐야 할 두 손과 두 팔에 팔꿈치 위까지 피할 수 없는 피칠갑, 바람을 가르고 무명을 꿰뚫어야 할 유성 단검이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관절을 자르느라 온통 뒤집어쓴 기름범벅, 탐진치와 오욕칠정을 끊는 검술을 펼쳐야 할 장검 작두처럼 밟히고 소 잡는 칼로 내려쳐지는 그런 참혹.

    "엄마가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먹고 싶지 않다" 라고 어떤 마음씨 좋은 현자가 설파하기도 했지만, 기본소득제도는,동료 동물에 대한 생명경시를 부추기고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지목받는 육식을 지지하지 않았다. 채식만을 지원하는 기본소득제도 아래에서 구태여 육식을 하겠다면따로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물론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함을 의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그 대신 억지로 해야 하는 일. 어쨌든, 기어이 육식을 해야겠다고 한다면 그 또한 당연히 가능했다.

    무공수련을 육식의 댓가로 지불할 생각이 전혀 없는 그들은 그렇게 조용히 저녁을 마쳤다.

    바다낚시

    사냥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허가를 받아 사냥할 수 있었다. 구석기 시대의 혈거인의 도구로만, 그리고 당장의 긴급한 필요로 당국을 설득할 수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가능했다.

    그래서, 세 사람이 바다낚시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모닥불에서 콩 구워먹으며 육식을 논한 날로부터 무려 백일이나 지난 뒤였다. 먼저 나무와 갈대를 엮어 조각배를 만들어야 했고 가시나무로 낚싯바늘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목숨과도 같은 무기를 더럽히는 육지 사냥보다는 낚시로 물고기를 잡는 쪽이 낫겠다 싶어 바다낚시로 선회한 것이다. 카탈리나 자치정부로부터 받는 낚시허가도 며칠을 잡아먹었다.

    전동 도구나 상품이 아닌 구석기 시대 기술과 도구만을 써서 배와 돛과 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눈먼 효율을 지속적인 재미로 바꾸는 것은 원래 기본소득시대의 황금율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두어 달이 훌쩍 지나가는데도 불만은 없었다. 원래의 목표는 채식에 질려 생선을 먹어보자는 것이었는데, 그 준비를 하다 보니 작은 돛단배를 설계하고 만들기, 통나무에서 노를 깎아내기, 낚싯바늘에 적당한 가시 찾기, 돛대 세우기 등을 하다 보니 세 사람은 어느새 그 과정 하나하나에 몰입하기 시작했으며, 낚시나 생선구이 자체는 잊어버린 듯했다.

    구석기 시대의 방법으로 결국 쓸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돛의 재료, 곧 범포였다. 아마나 삼의 재배는 고사하고 그로부터 실을 뽑고 천을 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기 때문에 그 세계는 나중에 천천히 음미하기로 하고 그들은 일단 카리나의 중심인 아발론 시장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 나간 김에 낚싯줄, 나침반, 비상식량까지 마련함으로써 바다낚시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바다에서는 해보다는 달과 별을 더 보게 된다. 땅과 같은 붙박이 없이 모든 게 출렁거리는 바다 위에서 하늘에라도 기준점을 박아두지 않는다면 방향을 잡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을 골라 출항했다. 목표로 잡은 곳은 카탈리나 섬에서 거의 정서쪽으로 70리쯤 떨어져 있는 산타 바바라 섬. 계획대로라면 밤에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부는 육풍 돛을 펴고 다음날 아침까지는 목적지에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날이 밝아 바람이 잔잔해질 때쯤 돛을 이용해 산타 바바라 섬에 상륙하여 베이스 캠프를 세우고, 보름 정도 야영하면서 바다낚시를 마음껏 한다는 것이었다.

    꼼꼼한 민공은 출항한 첫날 밤새 달과 사분의를 들여다보며 돛의 방향을 수시로 바꾸어, 거의 자동항법 장치 구실을 해냈다. 대협과 도사는 그런 민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좀 붙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헛수고란 걸 기에, 아예 자정부터 번갈아 가며 민공을 돕기로 했다.

    등 뒤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의 달빛과 부드러운 육풍을 돛폭에 한껏 받아 안고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광경은 황홀해 미칠지경이었다. 등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작은 돛단배는 바다 한 가운데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느낌이었다. 양력 대신 음력 달력을 놓고 출항일을 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캘리포니아의 7월 태양을 피할 수 있었음은, 모든 것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햇볕 대신 낮의 열기를 말끔하게 씻어내리는 서늘한 달빛뱃전에 가득 실을 수 있었음은 놓쳐서는 안 자연의 축복이었다. 달빛, 출항하는 작은 돛단배의 화물 목록에서 가히 첫째 가는 중요 항목이라 할 수 있었다.

    "술 마시고 싶네."

    사분의를 한쪽으로 밀쳐 놓고 달 쳐다보던민공이 말했다.

    "술도 익고 달도 떴는데, 님이 없네."

    "술이 익었다는 거야, 있다는 거야?"

    대협과 도사가 말장난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달과 술만 찾고 님은 나 몰라라 하겠다는 건가? , 운치가 반쪽들이구먼."

    대협이 선미쪽을 덮고 있는 갈대 지붕 아래에 내려갔다 올라오면서 말했다. 그의 손에는 술병과 술잔이 들려 있었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대협의 뜻밖의 선물이었다.

    ", 한잔씩 하자구. 달과 술을 반쪽짜리로 만들어버린 무정한 님이지만."

    "달 보고 술 마시면 없는 님도 맘 속에 떠오르는 법."

    "이 사람들, 마시기도 전에 취했나 보네."


    표류

    회전체 지구의 표면 위 유체인 바다는 지난 45억 년 동안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막대한 태양 복사 에너지에 의해 지각이라는 고체, 해양이라는 액체, 대기라는 기체에 가해지는 불균일한 가열 효과와 지구 형성 순간부터 역시 한번도 멈춘 적이 없는 지구 회전에 의한 코리올리 효과를 통한 천기와 지기의 어우러짐의 결과, 태평양의 남과 북, 대서양의 남과 북, 그리고 인도양에 형성된 다섯 개의 거대 소용돌이를 비롯한 무수한 국지적인 소용돌이들, 그리고 거기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해류의 뒤얽힘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바다낚시를 떠난 민공, 대협, 도사 세 젊은이의 작은 돛단배를 하룻밤 사이에 먼바다로 실어간 것은 바로 다섯 개의 거대 소용돌이 가운데 하나인 북태평양 소용돌이와 캘리포니아 해안을 알래스카쪽에서 바하캘리포니아 남쪽까지 훑고 내려오는 캘리포니아 해류였다.

    바다 위에서 보름달이 떴다 지도록 계속된 술자리가 끝나고, 달에 이어 해가 떴다 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세 사람의 눈 앞에는 목적지 산타 바바라 섬은 온데 간데 없이, 망망대해만 펼쳐 있었다. 바람도 없어진 바다에서 다시 며칠을 그렇게 떠도는 사이에, 사위어 가는 달과 사분의를 들여다보며 장시간 계산을 거듭한 끝에 민공이 내린 결론은 그들이 북적도 해류에 올라탔다는 거였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중국해로 흐르, 북적도 동서 해양 고속에스컬레이터에 무임승차한 거다.

    적도의 바다는 무척 평온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바다인 태평양을 횡단하는 장대한 해류지만 그 흐름은 깊고 넓게 흐르는 강 같은 느낌이었다. 별이나 달을 보고 사분의로 면밀히 관측하기 이전에는 얼마나 빠르게 흐르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높은 수온으로 바닷물의 점성도 떨어진 것인지 바람 없는 밤에는 마치 육지에 있는 커다란 호수에 배가 떠 있는 듯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시각각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멀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세 사람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물고기도 없는 따뜻한 바다에서나마 어쨌든 그토록 소원했던 바다 낚시를 하면서 가끔 올라오는 이름모를 생선과 비상식량으로 그런대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문제는 마실 물이라고 그들은 걱정했다. 그들이 준비한 물은 20여일분.

    생각해보면 아래위로 물과 바람만 성하고 땅과 불 기운이 약한 바다의 해수와 해풍은, 지수화풍을 고루 갖추고 특히 단단한 땅과 달달한 담수를 담고 있는 육지에서 살아가는 포유류인 인간에게는 그 척박함으로 볼 때 뜨거운 모래 위로 뜨거운 바람만 불어대는 사막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바닷물은 짜긴 해도 비열이 높아 낮에는 불처럼 달아오르다가 밤에는 얼음처럼 식어버리는 모래와는 달리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지 않도록 해주었고. 거칠기로 유명한 해풍도 적도무풍대로 들어서며 잠잠해졌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육지의 큰 호수보다도 더 온화하고 잔잔한 수면이었다.

    그처럼 고요한 수면 위로 불쑥 올라와 있는 바위 같은 물체를 발견한 것은 도사였다. 민공과 대협은 바다에 나와서도 줄곧, 그 작은 배위에서 아침마다 무공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권각법과 검술, 심지어 비검술마저 가능했던 것이다. 다만 궁술만은 어떻게 연마해볼 수가 없었다. 쏜 화살을 회수할 수 없다는 것도 그랬지만 도대체 쏴 맞출 과녁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바다새도 없고 수면 위로 날아오를 날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민공과 대협이 팔과 다리와 칼을 휘두르는 동안 도사는 홀로 뱃전에 앉아 아무것도 없는 바다만쏘아볼 뿐이었다.

    그날은 해가 떠오를 동녘 하늘을 엷은 구름이 살짝 덮고 있는 그런 아침이었다. 해가 뜨고 나면 갈대 지붕 밑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해 뜨기 전 한 시간이 바로 몸을 쓰기 딱 좋은 때였다. 도사는 그날 역시 하릴없이 활과 화살을 손에 쥔 채 뱃머리에 앉아 서서히 밝아오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술 대신 명상이나 하자는 심산이었다. 맨눈이라고는 하지만 360도 사방팔방으로 쭉 이어져 있는 수평선이 금간 곳을 그의 눈이 놓칠 리가 없었다. 20여 미터 떨어진 수면 위로 영락없이 거무튀튀한 바위 질감의 뭉툭한 물체였다. 높이는 3 미터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다 수평면과 수평선으로 낮게 가라앉은 그 잔잔한 바다 한 가운데에서 중력을 거스르며 홀로 만유의 평면 위로 솟아오른 3 미터는, 육지에서라면 평지에 우뚝 솟아 올라 숱한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안겨주고 있는 월출산이나 태산 정도의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민공! 대협! 이리 나와봐! 저게 뭘까?"

    도사는 고개를 반쯤 돌리고 목소리를 죽여 외쳤다. 갈대 지붕 아래에서 그리고 선미 쪽에서 뛰쳐나오는 두 사람을 팔을 뻗어 제지하면서도 그의 눈은 수면 위 물체에서 한 순간도 떼지 않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의 양옆에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의 손아귀에 뭔가가 들이밀어졌다. 민공이 어느새 쌍안경을 가지고 나온 거였다. 그는 허둥지둥 쌍안경 접안 렌즈를 눈에 붙였다.

    "고래! 고래!"

    그는 목소리를 더더욱 죽였다. 얼마나 흥분했던지 쉰 목소리가 목에 걸려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쌍안경을 대협에게 넘겨주었다. 맨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맞네. 고래가 맞아."

    대협의 확인이었다.

    그 순간 뱃전의 바닷물이 살짝 출렁인다 싶더니 선체 여기저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파장이 몇 백 미터는 되는 느린,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기만 하는 그런 파도가 지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조심성 많은 고래를 쫓기에는 충분히 큰 소리였던 것 같았다. 고래가 머리를 내밀고 있던 그 지점에는 깨진 거울 같은 수면만 요동하고 있을 뿐 그새 고래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그리고 첫번째 위치보다 두 배나 멀리 떨어진 수면에서 다시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두 개였다. 큰 것과 작은 것.

    "새끼 고래!"

    민공이 쌍안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태평양의 동서쪽 끝, 캘리포니아와 한국 해안에서 볼 수 있는 귀신고래였다. 야만의 시대였던 19세기에 남획되어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던, 그리고 실제로 북대서양에서는 멸종되기도 했던 바다의 거인, 바다의 경이, 신의 작품이었다.

    "엄마 고래.. 아기 고래.."

    그들은 45억년 지구 생명의 대서사의 마지막 대사를 읊조리듯, 그들 세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뱃전에 앉아 고래의 이름과 노래를 불렀다.

    무인선

    돛도 접은 채 해류에 떠내려가고 있던 조각배가 거대한 바지선과 조우한 것은 비가 오지 않는다면 며칠 안으로 마실 물조차 없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중이었다. 새벽 어스름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 배는 사방 백 미터는 족히 될 만큼 컸다. 가까이에서는 3층 높이의 긴 장벽으로 보였지만, 바로 옆에 올 때까지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위에는 아무 구조물도 없이 납작한 겉모양 때문에 어둠 속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걱정 하나 없이 낙관적으로 살아온 그들이었지만, 길지 않은 평생 처음 맞는 위기, 시시각각 조여오는 파국에 서서히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바지선이 출현했으니 그들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무인지경에 빠져 헤매다가 다시 문명세계의 끝에 간신히 도킹한 기분, 되살아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바지선은 무인선박이었다. 모서리에 설치되어 있는 철제 사다리로 올라가본 바지선 위쪽은 철제 난간만 빼고는 대부분 평평한 갑판이었다. 사방의 벽을 따라서 일정한 간격으로 로봇 팔이 달려 있고 카메라로 보이는 장치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갑판 네 모서리 가까이에서 위로 튀어나와 있는 납작한 사각기둥 모양 돌출부에는 문달려 있었는데, 갑판 아래 선실로 통할 것 같은 그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

    대양을 건너는 화물선이나 유조선도 무인선박이 많았기 때문에 그 바지선에 승무원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할 것은 없었. 다만 화물선도 유조선도 아닌 바지선이라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선박 인양과 같은 제한된 기능만을 수행하는 특수 선박이라 할 수 있는 바지선은 주로 육지 가까이에서 운용되는 배로서 먼 바다 항해용이 아니었는데,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만난 바지선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무인선박이라 하더라도 주인 없는 배는 아닐 테니, 결국 어딘가 목적지를 향해 갈 것이고 결국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그들은 일단 그 바지선에 붙어있기로 했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바지선이지만 바람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작은 돛단배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똑같이 떠다니는 처지이긴 해도 바지선의 널찍한 갑판은 그래도 어느 정도 육지의 느낌까지 났던 것이다. 그들은 배를 바지선 한쪽에 있는 쇠고리에 묶고 가까운 돌출부 옆에 천막을 치고지내기로 했.

    바지선에서의 생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먹고 빗물을 받아 마시고 새벽마다 무공수련을 했다. 바지선의 갑판은 조각배에 비할 수 없이 드넓었으나 활쏘기에 관한 한 매 한가지라, 도사는 활쏘기 대신 달리기 기초체력 훈련을 했.

    민공의 계산에 따르면 바지선은 북적도 해류에 편승하여 똑바로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큰 배이니 지나는 배나 비행기에 발견될 확률도 높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상황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한 달이 다 도록 조각배 한 척, 복엽기 한 대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다가 태평양을 다 횡단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게. 이제 육식도 할 만큼 한 셈인데 말이지."

    "무선통신장비는 챙겼여야 한 건가?"

    무풍지대에 돛단배 띄운, 당장 목숨이 위협받을 일은 없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일 전혀 없는 그들은 서서히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

    "이게 무슨 소리이지?"

    한밤중에 세 사람은 이상한 소리에 모두 잠을 깼다. 바지선의 갑판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고, 갑판 아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바지선의 긴 뱃전에 부딪히는 작은 파도 소리에 묻혀 잘 들을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들을 수 있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바지선에 오른 뒤 처음 발생하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진동 소리는 다른 단속적이고 불규칙한 금속성 소음과 뒤섞여 몇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다가 사라졌다. 그날부터 그 소리는 불규칙적으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짐승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한. 나만 그런가?"

    민공의 말에 대협과 도사는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라면 좋겠는데 죽어가는 소리처럼 들린단 말이야."

    민공의 수수께끼같은 말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두 사람은 느꼈다.

    무인 바지선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그날은 스콜 치고는 천둥번개가 없는 조용한 비가 하루종일 내린 다음날이었다. 하늘이 개면서 해수면에 반사된 햇빛이 유난히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상하게 여긴 대협이 그들의 돛배에 내려갔다가 한참만에 올라와서 말했다.

    "바닷물에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떠다니는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네."

    지금까지 못보던 것이었지만 그 크기나 밀도로 봤을 때 별로 특별한 것은 없다 싶었는데, 다음 날엔 도사가 갑판 위에서 잡은 갈매기가 심상치 않았다. 갈매기는 도사가 다가가도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화살을 맞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갈매기 뱃속은 플라스틱 조각과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먹이로 착각하여 삼키고 마침내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 이제야 알겠네."

    민공이 대표로 상황을 정리했다. 몇 개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지구 5대 바다 소용돌이 가운데 하나인 북태평양 소용돌이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25만 평방마일, 곧 텍사스만한 태평양 쓰레기섬의 한 가운데에서 지금 그들은 인류가 오염시킨 바다의 참상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플라스틱 쓰레기로 산 채로 박제된 것은 바다새뿐만아니었다. 수면 아래에서는 플라스틱과 그물 조각을 몸 안과 밖으로 휘감고 기형으로 죽 물고기들이 많았다.

    인류가 한 해에 쓴다는 1억 톤의 플라스틱, 그 가운데 십중팔구는 육지에 쌓이고 나머지는 결국 바다에 이른다던가. 또 그 가운데 7할은 가라앉고 표면에 떠다니는 3, 극히 일부가 만든 것이 지금 그들이 들어가 있는 쓰레기의 섬, 쓰레기의 바다가 무려 텍사스 크기라는 것이다. 일단 들어서면 자동차로 온종일 달려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 바로 텍사스인데 말이다.

    "저 많은 쓰레기들 대부분이 플라스틱 봉지, 플라스틱 병뚜껑, 플라스틱 물병, 스티로폼이라는 거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크기의 플라스틱 조각이 더 많고 더 문제라는 거고."

    "플랑크톤과 크고작은 물고기를 통해 결국 우리 입으로 들어와 피와 살 속에 녹아들 거라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속도가 느리니까 믿고 싶지 않으니까 우리가 외면해버리는 진실까지도."

    바다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늘어날수록 크기가 커질수록 무인 바지선 속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더 잦아지고 더 커져갔다. 바지선이 지나간 자리는 표면이 깨끗해지는 것으로 봐서 무인 바지선은 다름아닌 바다를 청소하는 로봇이란 결론이 나왔다. 물론 주변의 쓰레기가 흘러들어가 금방 다시 채우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많은 쓰레기를 일거에 다 없앨 수는 없겠지만, 이런 바다 진공청소기를 수만 대 수십 만대 바다 구석구석에 뿌린다면 잘 될 것도 같은데. 누구 작품일까? 공해상이니 당연히 국제연합이겠지?"

    도사의 희망섞인 관측이었다. 그같은 무인 바지선을 운용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한 개인이나 이윤을 쫓는 기업이 할 것 같지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선의를 효과적으로 모으는 비정부기구 단체라면 혹시 모르지만. 더군다나 영해도 아닌 공해 상에서 그런 거대 공공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일개 국가 또한 상상하기 어려웠다. 자칫 잘못하면 극소수의 지배층이 전체 국민들의 탐욕만을 자극하고 그러모아 악용하는 기업국가로 전락하는 국가 시스템은 공해는 고사하고 자기들의 영해에도 극독의 화학 폐기물, 방사능 폐기물도 버리고 퇴역한 핵잠수함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수장시키기도 했. 고작 돈 몇푼 때문에 그런 지구적인 범죄를 서슴지 않는 병적인 탐욕, 그리고 바다를 무슨 무한대 용량을 가진 정화조나 무엇이든 한번 집어넣으면 영원히 빠져 나오지 않는 무저갱이나 블랙홀이라도 되는 것처럼 확신하는 그 편리한 절대 무지.


    고래

    한 열흘 북태평양 쓰레기 섬을 종횡무진 바다를 청소하던 무인 바지선이 어느 날 남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사분의로 천체 관측을 게을리하지 않은 민공이 며칠 지나서야 알아차린 것이었지만. 표류한 지 석달, 그들은 이제 카탈리 섬으로 되돌아가길 간절히 원하는 상태가 되었다.

    "담백한 채식 생각이 나네. 온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거 같아."

    "한번 상상해보자구. 이 무인 바지선이 애초에 퇴역할 때까지 끝없이 바다를 떠돌게 설계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바다를 떠도는 무인도에 영원히 갇힌 거 아닌가?"

    민공과 대협의 암울한 말에 도사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들의 무한 낙관주의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에 섬이라도 보이면 다시 조난 당한다 해도 돛단배를 띄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무인 바지선은 장애물을 알아서 피하는 자동 청소기라도 되는 것처럼 육지는 고사하고 다른 배 가까이 다가가는 일조차 없었다.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군."

    도사가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그들은 뉴질랜드 남쪽까지 흘러와 있었다. 아니, 무인 바지선은 해류에 실려다니는 그런 수동적인 배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무인 바지선은 위성을 통해 원격 조종되는 것인지, 쓰레기섬 해역을 불규칙한 항로를 따라 헤매던 것과는 딴판으로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민공의 종이 지도 위에서 매끄러운 항로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바다는 거칠어졌고 그 와중에 바지선에 달고 다니던 그들의 돛단배마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난 뒤라 이젠 섬이 나타난다고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옴짝달싹 못하고 바지선에 갇힌 꼴이 되었다.

    남극 쪽으로 내려갈수록 날씨는 나날이 추워졌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먹을 것이 풍부해졌다는 사실 정도. 찬 바다엔 역시 어종이 풍부해서 낚시로도 충분한 식량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타민 등의 영양소 부족을 염려하여 대부분의 생선을 익히지 않고 날 것으로 먹었다. 또 다행인 것은 바지선의 내부 선실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거였다. 남반구의 여름이라고 하지만 남극해에 다가갈수록 수은주는 계속 떨어져 영하에 머물고 있었는데, 심한 파도가 치던 날, 선실로 통하는 문이 저절로 열렸던 것이다. 아무런 장비나 장식도 없는 창고 같은 선실이었지만 벽에 붙은 온도계는 늘 섭씨 15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네."

    남극해의 칼바람이 바지선의 모서리에 걸려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는 동안 이미 자리에 누운 민공이 말했다. 뜻밖에도 밝은 목소리였다. 돛단배를 잃기 전에 다행히 짐들을 옮겨온 터라 깔개 위에 놓인 침낭은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실내 온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잠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따뜻한 바다에서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봤는데, 이 꽁꽁 언 바다에선 어떨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대협의 풀죽은 말소리였다.

    "따뜻한..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잠잘 공간이 있고 먹을 식량이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느긋하게 기다려보는 수밖에."

    도사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 침울한 목소리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창 하나 없는 그 선실은 하루 종일 지지 않는 남극해의 여름 태양을 피해 잠을 자기에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꿈 없는 잠에서 깬 그날은, 그들의 계산이 맞다면 1222일이었다. 해가 최고 정점을 찍는 날. 침낭에서 몸을 일으킨 세 사람은 처음 몇 초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잠에서 깨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그들은 조금전의 충격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올라 선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무인 바지선은 한 면을 다른 거대한 네모 모양의 모선에 붙이고 있었다. 갑판과 갑판이 높낮이 없이 평평하게 이어져 드넓은 평원을 보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모선에 접안하고 있는 다른 바지선들도 보였다. 크기며 모양이 그들이 타고 온 바지선과 똑같은 배들이었다. 모선 한 면에 4척씩 모두 16척이 질서정연하게 정박해 있었다. 모선의 한쪽 길이는 500미터 정도. 그들의 무인 바지선이 맨 나중에 접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경악시킨 것은 아무 것도 없던 남극해 한 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 선단이 아니었다. 맨 처음 그들을 맞은 것은 피비린내였다. 바다의 짠내와 뒤섞인 그 피비린내는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어 바람이 불면 날아가 흩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들의 바지선은 핏물 위에 떠 있었다. 투명한 빨간 잉크가 아니라 걸쭉한 빨간 페인트를 부어놓은 것 같았다. 바닷물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선의 갑판에도 여기저기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지선 옆에는 커다란 작살을 등에 박은 흰긴수염고래가 핏물 속에 떠있었다. 갑판 위에는 거의 해체가 끝난 다른 고래의 뼈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이들 놀이터에 있는 커다란 구조물 같은 고래 뼈 옆에 몇 사람들이 죽어넘어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세 사람은 난간을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 사람들 또한 고래와 비슷하게 해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래를 해체하는 데 쓰는 청룡도비슷한 긴 자루의 큰 칼을 비껴 든 사내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세 사람이 끌려간 곳은 모선 안에 있는 한 선실이었다. 그곳에는 깨끗하게 차려 입은 한 사내가 깔끔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판 위의 살풍경과 너무도 다른 별세계의 풍경에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사내는 한동안 그들을 본체만체 식사에만 열중했다. 새하얀 식탁보가 눈을 찔렀다. 그는 은제 칼로 붉으스름한 살덩이를 잘라내어 은제 포크로 찍어 냄새를 맡아보고 이리저리 감상하다가 마침내 입에 넣기를 반복했다. 그 깨끗한 식탁과 그 깔끔한 사내의 모습이 현재진행형의 갑판 위의 상황과 겹쳐지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혐오감이 샘솟았다.

    새하얀 손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찍으며 사내가 그들 탁자 맞은편에 앉자, 웨이터 복장의 남자가 그의 앞에 커피 한 잔을 놓고 갔다. 사내는 여전히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차가웠다. 60대 초반쯤.

    "유신마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분들이신가?"

    사내는 자신을 선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바로 불법 포경업자들이었다.

    "우리는 국제연합에 고용되어 바다를 청소하는 회사라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지. 너무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진 말라구. 아름다운 행성 지구의 바다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목표 가운데 하나이니까."

    그 선장이라는 사내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혼자 떠들어댔다.

    "현장에 오랜만에 나왔더니 이렇게 또 귀빈들까지 찾아주시고!"

    세 사람은 그들이 타고 온 바지선의 선실에 감금되었다. 선장이라는 사내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바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바지선으로 위장한 16척의 포경선으로 남태평양과 북태평양에서 고래를 잡아 남극해에 정박해 있는 모선에서 해체, 가공, 포장까지 일괄적으로 끝내버리는 불법포경회사였다. 바지선들은 수면 위로 드러난 곳에서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거하여 녹여 공이나 상자 모양으로 만들어 육지로 가져가서 처리하거나 매립하는 척하면서 수면 아래에서는 고래를 유인하여 작살과 로봇팔로 잡아들이는 무인 포경선이었다.

    "멸종위기종인 고래를 어떻게 죽이느냐고? 그걸 누가 먹느냐고? 으허허헛!"

    선장은 세 사람을 유쾌하게 비웃었다.

    세 사람이 갇힌 지 하루가 지났는데도 불법 포경업자들은 소식이 없었다.

    "우리도 당연히 그 사람들 꼴이 나겠지?"

    모선 위에서 해체되고 있던 고래의 뼈 옆에서 살해당한 그 몇 명의 사람들은 바로 인근 섬의 원주민들이라고 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만 허가받은 수의 고래를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잡을 수 있는 부족인 그들은 고래를 쫓다가 유신마루의 불법포경 현장을 보게 되었고 결국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칼날만 1미터도 넘는 고래칼을 휘두르며 집채만한 고래를 해체하고 있던 불법포경업자들의 핏발 선 눈에 그들 원주민 몇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을 법했다. 거기다가 선장의 구체적인 명령까지 있었으니 그 원주민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셈이다.

    "국제연합과 국제법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한들, 이 머나먼 남극해에서까지 꼭 그렇달 수는 없겠지. 선장이 진실을 얘기할 때 벌써 우리의 운명은 정해졌다 봐야겠고."

    대형 선단을 지구 반대편에 보낸 그 막대한 투자 규모와 불법포경이 적발되었을 때 그 회사가 국제법 법정에서 처할 엄중한 상황, 무엇보다도 천문학적인 벌금 규모를 생각할 때, 결론은 뻔했다. 자본이 아니면 애초부터 불법의 규모를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키우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 이유에 직접 가해지는 압력이랄 수 있는 천문학적 벌금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면 극한적 폭력도 불사하는 게 자본이니까 말이다. 고래 처리가 끝나고 나면 그들이 처리될 차례였던 것이다.

    "사람을 굶겨 죽일 모양이군. 바다 군자 고래에게도 저리 무참한 악귀들이 어련하겠어."

    "과학연구를 위한 포경? 위선의 극치, 후안무치의 전형이로세."


    상어

    선실에는 별다른 잠금 장치도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데 굳게 잠겨 있어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았다. 역시나 선실 내벽에 교묘하게 위장된 감시카메라를 네 개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선실로 처음 들어갈 때에도 문은 알아서 열려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감시 카메라는 당연하리라 추측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그 무인 바지선에 승선하기 이전부터 그 불법포경업자들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흉터투성이 선원들이 세 사람을 갑판 위로 끌고 나간 것은 다음날이었다. 하나같이 덩치 크고 팔 근육이 우람한 자들이었다. 모선 갑판에는 선장과 함께 또다른 다섯명의 선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원들은 어제의 그 고래칼을 들고 있었는데, 갑판 위에는 이제 막 해체가 시작된 고래가 작은 언덕처럼 누워있었다.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고 바람은 잔잔했는데도 파도는 꽤나 거친 편이었다.

    "그린피스 위성도 까막눈이 되었을 테니, 돈 되는 일 중간중간에 돈 안되는 일을 좀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보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선장을 고개짓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세 사람과 자기 선원들을 둘러보며 특별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웃는 입, 차가운 눈초리는 아마도 선장의 등록상표 같았다. 세 사람을 에워싼 선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며 웃었다. 상대방이 접수하지 않은 욕 또는 조소나 저주는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우주의 기본적인 원리도 모르는 바보천치들.

    "선장, 지금 이것도 과학연구용 포경을 하자는 것인가?"

    민공이 불쑥 육식과 채식을 꺼냈던 바로 그 말투로 물었다.

    "과학과 포경이라.. 사람들은 '과학'을 꽤나 좋아한단 말이지. 불법이란 부정적인 단어보다 과학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를 더 듣고 싶어하거든. 그래야 고래고기를 먹으면서 느끼는 불편한 마음 같은 것을 최소화할 수 있거든. 고기의 잡내를 잡아주는 후춧가루 같다고나 할까. 후후후."

    "일본과 일본인을 욕보이는 짓은 그만 두는 게 어떤가? 부처님을 모신다면서 저런 거대한 살생을 서슴지 않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단 말인가? 생선 잡아먹는 것은 살계를 범하는 게 아니라고? 설마 그대들의 생물 교과서에서는 고래를 어류로 분류는 건 아니겠지!"

    대협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마루타, 후쿠시마, 과학포경. 참 잘 하는 짓이다."

    도사도 한 마디 했다.

    선장은 손에 들고 있던 셀폰을 꺼서 호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선원들에게 뭐라고 짧게 명령을 내렸다. 통역기를 끈 것이다. 흥분한 선원들이 동시에 세 사람에게 덮쳐들었다.

    갑판이라는 무대는 드넓었지만, 일단 타격의 목표가 작았다. 열 명이 고래칼을 휘두르며 세 사람을 등뒤에 감추며 방어하기에는 큰 공간이었지만 세 사람을 에워싸고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좁았다. 최고의 살상력을 발휘하는 칼 끝부분은 가까이 있는 세 사람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동료 선원들의 머리에 가 닿기가 십상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열 명이 공격한다고는 하지만 한번에 한 사람씩 나서서 공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누가 먼저 공격할지 정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있었다.

    "내가 뚫고 나갈 테니 바짝 붙어 따라오라구. 고래 뒤로 돌고 고래 위로!"

    민공이 낮은 소리로 재빨리 말하면서고래칼날 하나를 오른발을 들어 옆으로 차내, 다섯손가락을 곧게 편 뾰족한 왼손을 내뻗어 고래칼을 들고 있던 사내의 드러난 목줄기철사장의 수법으로 찔렀다. 그 선원은 비명과 함께 뒷쪽으로 날아가고 민공과 두 사람이 그 틈으로 몸을 빼내 포위망을 벗어나 십여 미터 떨어진 고래쪽으로 달아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원들이 소리소리 지르며 뒤쫓았는데, 이미 두 명은 서로의 칼날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세 사람이 쫓겨 올라간 곳은 고래의 앞지느러미 근처였다. 표면이 미끄럽고 고래의 몸체가 커서 갑판 위에 남아 있는 선원들의 고래칼로는 쉽사리 공격할 수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커다란 지느러미가 엄폐물과 방패의 구실을 해주었다.

    그렇게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선장이 선원들 등 뒤에 와서 고함을 질렀다. 한쪽에 려 서있던 선원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서 고래 위로 기어오르려고 했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해체하다 만 고래 고깃덩이들을 집어던지며 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도사의 외침에 민공과 대협은 깜짝 놀라 뒤돌아 보았다. 혹시 부상이라도 당해나 싶었던 것이다. 도사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쪽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고래 앞 지느러미 뿌리쪽 움푹한 곳에 커다란 공구 상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칼과 같은 고래 해체 작업에 쓰이는 연장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맞춤한 칼을 한 자루씩을 골라잡았. 선원들의 고래칼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길이였다. 그렇게 무장을 하고 나니 선원들도 더 이상 기어올라 공격할 생각을 못했다.

    선원들 뒤에서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선장이 또 다시 소리를 꽥 질렀다. 선장의 명령에 두 사내가 들고 있던 고래칼을 갑판에 버려두고 갑판 아래 선실로 내려가더니 큰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꺼냈는데 그것은 커다란 총이었다. 바로 고래를 잡을 때 쓰는 총이었다.

    세 사람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앞다투어 바닥에 엎드렸다. 다행히 지느러미 근처 움푹한 부분이 세 사람이 몸을 감추기에는 충분했고, 엎드리 선원들도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선원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총의 사선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뜻. 그들은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총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처음 몇 발은 아예 고래 위로 지나갔지만, 마지막 한 발은 그들로부터 2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곳에서 작은 구멍을 만들며 빠져 나갔다. 고래의 옆구리쯤에서 들어간 총알이 등에 가까운 반대편 옆구리로 빠져 나간 것이었다. 다행히 연발 사격은 가능하지 않은 총이었지만, 고래 잡는 총답게 위력은 대단하여 고래의 두툼한 살 뒤에 언제까지 숨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머리 위로 작은 드론이 떠올랐다. 고래총과 통신을 주고받으며 조준경 노릇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 더 이상 요행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건 어때?"

    대협의 속삭임에 돌아본 두 사람의 눈에 두 자루의 비도가 들어왔다. 한 뼘 길이의 날카로운 칼이었다. 비검술의 달인을 꿈꾸는 대협이 몸에서 한시도 떼놓지 않고 잠자리에서까지 몸에 지니는 비도였다. 아래에서 철커덕 소리가 아직 나지 않고 있었다. 총알이 발사되기 전에 나던 소리였는데, 아마도 총탄을 장전하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래에서 드디어 철커덕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준비하고 있던 대협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지나 싶더니,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비도를 날리고 번개같이 다시 엎드렸다. 뒤이은 폭발음과 비명 소리. 대협은 자신있게 몸을 일으켰다. 손을 떠난 비도의 궤적을 보고 이미 성공 확신했던 것이다. 민공과 도사가 덩달아 일어나 보니, 고래총의 총열은 꽃잎처럼 여섯 갈래로 갈라져 있었고 선원 하나가 거치대 옆에 쓰러져 있었다. 비도는 총알이 발사되기 직전에 정확히 총구로 들어가 총열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비도야, 비도야, 미안하다. 형세가 위급하여 너를 아주 멀리 보내게 되었구나!"

    작게 중얼거리던 대협은 두 사람에게 손짓 해서 공구함을 엎도록 했. 바닥에 공구들이 흩어졌는데, 태반이 작은 손칼 종류였다. 그 작은 칼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전체적인 무게와 칼날과 자루 사이의 무게중심을 가늠해 보던 대협은 그 가운데 십여 자루의 칼을 골라내었다.

    첫번째 과녁은 드론이었다. 나머지 칼들이 대협 손을 모두 떠나기까지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선원들은 모두 다리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비명 소리로 갑판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세 사람이 고래에서 내려와 갑판 위에 섰을 때, 선장은 모선 갑판 위를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반대쪽 출입구 선실로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그 문은 잠겨 있었다. 선장인 그에게도 열리지 않았다. 선장은 결국 난간 모서리로 몰렸다. 5미터쯤 간격을 두고 세 사람은 멈추었다.

    "선장, 우리와 함께 순순히 국제법 법정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민공이 말했고, 대협은 마지막 남은 비도를 공중에 던졌다 받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온 바다에 울려퍼지는, 그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고래를 어떻게 고기로 먹어버릴 생각을 다 했을까?"

    도사가 말하는 순간, 커다란 파도가 뱃전에 들이쳤고 그 거대한 모선마저 흔들거렸다.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자세를 잡은 세 사람의 눈에 빈 난간이 들어왔다. 세 사람은 난간으로 뛰어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선장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찌기 고래 피냄새를 맡고 몰려왔다가 허탕만 치고 주변을 떠돌던 상어들이 그 한 지점을 향해 일제히 방향을 트는 게 보였다.


    바다에 살어리랏다

    세 사람은 다시 오리자바산에 올라 콩을 줄기째 모닥불에 구워 먹으며 야영을 했다.

    "무엇이든 불에 구우면 맛이 기가 막히거든."

    콩을 콩깍지에서 바로 입속으로 털어넣으면서 민공이 말했다. 대협과 도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 사람은 다시 한참 동안 늦은 저녁 식사에 열중하였다.

    "대협은 캘리포니아 귀신고래를 따라 다닐 거고, 민공은 한국 귀신고래 바라기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나는 바다의 청소부 일이나 더 하려고."

    도사가 찻잔을 기울이며 눈길은 아발론 항구 방향으로 돌렸다. 세 사람의 배가 거기에 정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하자면 두 척의 잠수함과 한 척의 바지선.

    불법 포경 마피아와 고래고기 비밀유통 카르텔을 우연한 기회에 와해시킨 세 사람의 삶은 결국 카탈리나 섬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말았다. 바다에 둘러싸여 있지만 섬도 엄연한 육지, 그 좁은 땅에 붙박혀 사는 육지 정주민이었던 세 사람은 바다 유목민이 되어 지표면의 칠할을 차지하며 행성 전체 물의 96퍼센트를 담고 있는 바다를 집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지구인 또는 '수구인'의 대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고래종 보호와 포경 반대의 두 전위라고 할 수 있는 국제연합과 비정부기구인 그린피스는 세 사람의 활동에 열광하여, 세 사람을 인류사회에서 귀신고래 종을 이익을 대변하는 대사로 임명하면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 또한 워낙 강렬한 경험을 한 터라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삶의 터전을 바다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민공과 대협은 옛 소련과 옛 독일의 재래식 잠수함을 개조한 고래 수호선을 타게 되었고 도사는 유신마루의 무인 바지선을 개조하여 집으로 삼기로 했다.

    민공과 대협은 무공을 수련하는 무림인이지만 열렬한 밀덕후, 즉 밀리터리 매니아이기도 했다. 모든 종류의 전쟁과 무력충돌이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전쟁과 군사기술과 무기체계 전반이 비록 인류역사 내내 인간성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기능을 수행해온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술로서의 전쟁기술 그 자체는 박제화된 상태로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밀덕후들의 강령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무공수련도 밀덕후 활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몸 자체를 위주로 원시적인 무기만 쓰는 무림인들의 세계는 상대방보다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자기 수양에 더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리고 실제로 밀덕후 가운데에서는 가상의 세계에서일 망정 전쟁이나 군사 그 자체를 미화하는 전쟁 미치광이보다 반전주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밀덕후들의 3대 분야는 소련, 독일, 미국이라 할 수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 그 국가들은 명성 중에 악명을 더 많이 누린 편이었지만, 종종 정치적 악명은 군사적 위명으로 통하는 면이 많았다. 단기간 대량생산에 특화되어 있으면서도 외적 화려함을 놓치지 않는 미국 무기, 기상천외의 경지까지 오른 혁신과 기술적 광기의 대명사 독일 무기, 그리고 극한환경에서도 최고성능을 보장하는 차가운 신뢰성과 투박한 멋을 뽐내는 소련 무기 가운데, 민공과 대협이 주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소련과 독일 쪽이었다.

    외관은 많이 달랐지만 민공과 대협의 잠수함의 내부는 비슷했다. 군사적인 잠항능력과 적을 타격하기 위한 무기체계로 가득찼던 공간을 12명이 살 수 있는 크고 밝은 거주공간으로 개조하였던 것이다. 잠항능력은 바다 표면이 거칠어질 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정도, 최고속력 또한 고래를 먼발치에서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수함의 동력원은 연료전지와 태양전지로 충분했다. 잠수함이란? 외부의 물이 내부로 새들어오지 않게 하고 내부의 액체를 외부로 새나가지 않게 하는 배. 환경에 대한 영향을 "배수량 만큼의 물을 밖으로 밀어내고 그 만큼의 공간을 차지한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최신 잠수함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축구장 넓이의 갑판을 가진 도사의 바지선도 갑판 아래 선실들을 거주공간으로 만들었고 작은 잠수정까지 갖추고 있었다. 도사는 바지선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기로 했다. 바다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걷어내는 것 자체에서 무한한 희열과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래 보호 활동, 해양감시 활동도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 귀신고래 돌보기, 대양을 회유하는 고래 따라 오가는 잠수함 타기, 해양 쓰레기 수거선에서 바다지킴이로 살기. 모두 훌륭한 선택이었고 기본소득이 보장하는 훌륭한 삶이었다.

    "이제 육식은 졸업했네."

    "내 귀신고래들의 번식지 바하캘리포니아, 신혼여행지로 딱이겠지."

    "백년''. 앞마당 청소는 언제 다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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