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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101239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2
    조회수 : 1401
    IP : 72.83.***.206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20/03/24 11:33:07
    http://todayhumor.com/?panic_101239 모바일
    폴리테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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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폴리테이아


    핵전쟁

    국가안보회의가 열리고 있는 백악관 상황실. 대통령은 까만 나이트 가운 차림에 머리카락도 부스스한 게 2층 침실에서 막 뛰어내려온 것 같았다. 그는 긴 테이블에 한쪽 끝자리에 앉아 정면에 있는 커다란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에너지장관, 군사보좌관, 정보보좌관이 앉았고, 그의 왼쪽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들이 줄지어 앉.

    상황은 긴박하기 이를 데 없다. 화면에는 위성에서 찍고 있는 실시간 동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북미방공사령부 컴퓨터가 적색경보를 발한 장면이었다. 공화국군 미사일 부대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대륙간탄도탄의 이동발사대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습 발사 때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통상의 연습 발사에는 미사일과 발사대가 특수 차량에 의해 끌려 나오고 각종 부속 장비들이 줄을 지어 현장으로 딸려나오는 어둑한 한 축의 움직임이 전개되고 동시에 반대 한 방향에서 뻗어나와 발사대를 멀리에서 완전히 둘러싸고 유난히도 밝은 조명을 쓰는 다른 한 축의 움직임이 전개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직선으로 쭉 뻗는 발사대의 전개 움직임만 있을 뿐 발사대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발사 자체를 뉴스쇼로 만드는 정황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정치또는 군사적인 극적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선전선동에 활용하는 유능한 대중매체를 국유하고 있는 공화국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장군, 저 노란 동그라미는 무엇이오? 빨간 직선과 만나는 모양이 무슨 컴퓨터 파워 스위치처럼 생겨 먹었는데."

    대통령의 말소리는 무척이나 가볍고 유쾌해서, 상황실 안의 분위기와 대통령 자신의 차림새에서 풍겨나오는 긴박감을 대번에 누그러뜨렸다. 그때서야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대통령 각하, 빨간 선은 발사대의 이동 경로이고 노란 원은 방송 카메라와 조명들이 설치되었던 위치입니다. 다만 오늘은 노란 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방송 카메라와 조명들을 설치하지 않은 것입니다. 몹시 우려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커다란 화면 앞에 서 있던 딱딱한 표정의 4성 장군이 말했다. 군복에 각이 잡혀 있고 성긴 백발에도 힘이 들어가 있어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런 차림의 장군과 그런 차림의 대통령이 말을 섞는 모습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면서도 신선해서, 상황실의 엄중함 수치는 한 단계 더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 아니, 잠깐만!"

    비서실장이 누구에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순간 상황실은 상황실다운 분위기로 되돌아가 모든 소음이 없어지며 모두 비서실장을 보고 또 걱정스럽게 대통령을 돌아다 보았다. 평소에 모든 상황 즉 방송 카메라의 중심에서 벗어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대통령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각하, 잠깐 얘기 좀.."

    절반쯤 사무적인 그 말에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몸을 일으켜 비서실장을 따라 옆방으로 갔다. 잠시 후 대통령은 정장 차림으로 돌아왔다. 한낮의 나이트 가운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뒤따라나온 비서실장은 놓치지 않았다.

    대통령이 자리에 앉았다. 거의 동시에 자리에 앉던 비서실장이 엉덩이가 의자에 닿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올라왔.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비서실장의 손에 슬레이트가 들려 있었다. 딱 소리와 함께 국간안보회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대통령의 표정도 바로 엄숙해졌다. 과연 프로 방송인 출신 정치인다웠다. 슬레이트도 직접 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하던 대통령의 쇼 비즈니스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비서실장은 그런 대통령의 모습이 낯설기까지 한 것이었지만.

    "앞으로 발사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입니다. 적들은 방송조명까지도 끈 채 액체연료를 주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적 레이더의 지향각도로 볼 때 탄착점은 태평양 너머 북미주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선제 타격이 필요합니다."

    4성 장군의 말에 세상 심각한 구석이라곤 없던 대통령조차 잠시 말이 없었다. 장군은 지금, 공화국이 핵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이미 멀지 않은 곳에 전개되어 있는 폭격기로 발사대를 폭격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일단 재래식 폭탄 공격이겠지만, 재래식 제한 전쟁은 언제든지 전면적인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 특히나 합중국 대통령과 공화국 국방위원장 두 사람은 작금의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예측불허이자 휘발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

    "만약 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짜 핵 미사일을 발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요?"

    "미사일 요격 시스템이 공해상에 배치되어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두 적들의 영해 상에 떨어질 것입니다. 추진체에 대한 공격이므로 핵이든 아니든 탄두가 폭발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관리가 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이오? 만약 그들의 미사일이 하나로도 우리 요격망을 벗어나, 이를 테면 엘에이에라도 떨어진다면, 그때는 지옥문이 열려서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할 터인데."

    "적들의 간덩이가 그토록 부어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 지옥은 적들에게만 열릴 것입니다."

    장군의 설명에 대통령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정도가 지나친 모양이었다. 대통령의 이어지는 발언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으니까.

    "그렇다면 아예 우리가 먼저 핵공격을 가하는 것은 어떻소? 저 심상치 않은 미사일 발사대에 대한 폭격은 그대로 진행하면서 그들의 수도에 핵폭탄 한 방 어때? 비서실장, 핵 가방 가져오시오."

    4성 장군은 화면 앞에 선 채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한 사람, 비서실장의 얼굴 표정은 오히려 밝아졌다.

    (과연 연기의 완급과 강약을 본능적으로 아는 광대!)

    아무도 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지만.

    대통령은 핵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열었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핵 가방 사용법에 대해 이미 숙지하고 있는 듯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핵 가방을 켜자, 발광 다이오드 몇 개가 반짝거리고먼지 뒤집어 쓴 진공관에 연결된 말굽자석 스피커에서나 남직한 기묘한 소리가 났다. 이제 상황실은 숨소리 하나 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적들이 도발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이 핵 발사 단추를 누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그답지 않은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말투를 잘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핵 가방 위의 단추를 몇 개 실제로 눌러보였다.

    "안돼!"

    핵 가방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는 부통령마저 대통령의 그 같은 과감한 손놀림에는 기겁을 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렇게 단추 몇 개를 눌러서 핵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장치가 아니었다. 핵 미사일 발사는 몇 단계의 복잡한 확인 절차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 순간 비서실장이 부르짖었다. 그도 영락없는 헐리우드 출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채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같은 순간 공화국의 주석궁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정상회담

    합중국 대통령과 공화국 국방위원장 두 사람이 정상회담으로 직접 만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따로따로 있을 때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던 두 사람은 정작 백악관 만찬장에서 만나서는 오래된 친구처럼 굴었다.

    대통령의 핵 가방 해프닝이 일부 국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면서 대통령의 경솔함이 부각되고, 국방위원장도 양국 간의 극한 대치 상황에 대한 공동 책임론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늘 그랬듯이 합중국은 합중국대로 공화국은 공화국대로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더 큰 상황이었지만, 겉보기에 패기 넘치고 화려한 강경론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원래 국면이란 것은 늘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 그 국면의 파도에 슬쩍 편승하여 롤러코스터 타듯 하는 것도 그 자체로 훌륭한 정치일뿐 아니라 우주 작동 방식에 순응하는 장수법이기도 했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스토리 전개상 나쁠 것은 없지만, 이번 핵 가방 해프닝은 너무 희화적이어서 전체적인 모양이 좋지 않아요. 좀 더 강경 드라이브를 지속하면서 정상회담의 정교한 시점을 고르는 게 좋겠습니다. 스케이트 보드 타기에서도 바퀴가 자갈에 걸려 곤두박질치며 굴러떨어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급경사 내리막길에서도 파워슬라이드/알리팝으로 멋지게 멈추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적들이 몇 개 되지도 않는 핵미사일로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상회담으로 끌려가는 꼴을 당한다면 군대의 사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핵과 미사일이라면 바로 우리의 안마당이랄 수 있는데 이리저리 끌려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갈 데까지 가보는 것, 절대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핵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국가안보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비서실장과 4성 장군은 집무실까지 따라와서 대통령을 압박했다. 압도적인 핵전력 우위를 갖고도 굴복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군정치에 이대로 밀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소위 '선진정치'를 어떻게 볼까요? 또다시 그 낡고도 지겨운 비유, 비아냥들을 들어야 하겠지요, 다윗과 골리앗."

    "적들의 군사력은 우리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으며, 핵전력 우위는 비교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각하! 이번 정상회담은 군부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집요함에 대통령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정치, 군사, 정부, 국가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시트콤이 되어가는 마당이었다. 헐리우드 쇼 비즈니스 출신인 그가 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닳고 닳은 워싱턴의 정치모리배들과 펜타곤의 군산복합마피아들이 훈수를 넘어 노골적인 협박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핵전쟁을 불사해야한다는 그들의 강한 주장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대통령 집무실에서 그의 면전에 대고 가르치려는 그들의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거, 왜들 이러시나. 원래 전쟁도 평화도 게임이라며? 당신들은 공화국 국방위원장이 그렇게 무서워? 나는 아니야. 어차피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 짓들인데, 두 사람이 만나 밥 한 끼 먹겠다는데 뭐 그리 사설이 길어? 쇼 비즈니스는 내가 전문가거든."

    대통령의 파격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비서실장과 4성 장군은 대통령의 그와 같은 엉망진창인 말과 말투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칠십이 넘은 대통령의 무려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잘 알고 있었다. 비슷한 일이 공화국의 주석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비서실장은 다시 한번 그들의 탁월한 선택을 의심하지 않았다.

    공화국에서 마지막 순간에 공개한 심야의 핵미사일 발사대의 모습과 합중국이 처음부터 생중계하다시피 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장면을 교차폅집하며 핵전쟁 위기로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던 방송사들은 이제 화려한 백악관 만찬장을 비추었다. 그 어디에도 전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쇼 비즈니스 출신 대통령은 물 만난 고기처럼 방송카메라용 조명에 반짝거렸고 신비주의와 군사주의에 가려져 있던 위원장은 대통령의 능수능란한 진행에 잘 따라가는 게스트가 되었다.

    늙은 대통령의 기행과 젊은 국방위원장의 카리스마는 애초부터 연출의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했고 상대의 파격을 중화시키고 보완하면서 모종의 상승 효과를 일으켰다. 정상회담은 그렇게 잘 만든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백악관

    언제부터인가 국가 정치경제가 헐리우드 쇼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 대중매체의 발달에 따른 대의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변화이기도 했다. 인구증가와 사회 구성원 간의 통신의 증가는 사회를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으로 만들어간 반면, 대중들의 인식 또는 정보 처리능력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사회의 조직과 운영 원리는 그에 따라 고도화하지 못했다. 오히려 발달한 과학기술이 인간사회를 왜곡하고 그 장점보다는 단점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빈부격차는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했고 민주주의는 갈수록 얇아지는 껍데기만 남았다. 그리고 편리하게도 민중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오감과 생각 그리고 감정마저 쇼 비즈니스에 의해 즐거이 왜곡되고 조작되었기 때문에.

    정치경제 쇼 비즈니스화의 직접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통 정치와 정통 정치인들의 퇴조였다. 얄팍해진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에 있어서 정치인들은 쇼 비즈니스맨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토론은 예능, 선거는 버라이어티 쇼가 되었을 때, 쇼 비즈니스의 최강자는 자연스럽게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정치는 처음도 마지막도 쇼였다. 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아니 우주 전체가 쇼라고 그는 확신했다. 비록 ''도 편집도 없는 생방송에 가까웠지만.

    합중국도 국제사회도 그 운영원리는 헐리우드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대통령은 처음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각본이 중요했고 연출이 중요했고 배우가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물론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없진 않았다. 전국의 수만 개 영화관에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은 엄청난 수익의 원천이 되는 반면, 그 많은 사람들을 투표장에 끌어 모으자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한다는 사실. 더군다나 그렇게 한 곳에 끌어모은 사람들의 마음과 표를 한 데 모으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그 불편한 사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데? 영화에서처럼 되겠지."

    집무실 탁자 위에 두 발을 올리고 앉아 빈둥거리던 대통령의 느닷없는 질문에 비서실장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장면들이니 얼추 맞지 않을까요."

    그렇게 대답하려는 순간, 그는 대통령과 자신이 헐리우드가 아니라 백악관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차렸다. 그리고 영화는 10달러만 내면 볼 수 있었지만, 핵전쟁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스크린 위에 보여주는 게 다라면 물론 예쁘게 그린 컴퓨터 그래픽이면 충분하겠지만, 실제 핵전쟁은 적어도 수퍼컴퓨터를 동원해서 정교한 모의실험을 해봐야 알 것 같네요. 치명적인 방사선만 해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럼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계산을 해보라고 하지. 그림 잘 나오면 영화사에도 그 계산 결과를 팔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극사실주의도 영화의 한 축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구."

    대통령의 말에 비서실장은 더욱더 자신이 헐리우드에 설치된 백악관 촬영세트장에 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머리를 한 차례 흔들고 나서야 에너지부 장관의 얼굴과 버뱅크 수퍼컴퓨터 센터의 전경이 떠올랐다. 영화제작 때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그 수퍼컴퓨터 센터에서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허풍인지 진실인지 그곳 프로그래머가 큰소리 치던 모습도 생생했다.

    "우리 수퍼컴퓨터가 국립물리연구소보다 빠릅니다. 그림은 현실보다 더 그럴 듯하게 나올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현실보다 더 그럴 듯하게.. 비서실장은 그 말에서 이제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초현실주의는 헐리우드에서라면 모를까 평면 스크린 대신 넓이뿐 아니라 깊이도 있는 입체 스크린, 곧 현실 속에서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현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현실 꼭 그대로여야만 했다. 영화의 안과 밖, 초현실과 극사실을 혼동하거나 혼용할 수는 없었다. 초현실이 현실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핵전쟁은 스크린 밖으로 방사선 한 오라기라도 흘려서는 안 되었다.

    "핵폭탄 말이야, 폭발력을 한 천 배쯤 늘릴 수도 있나?"

    영화도 만들어 봤고 국가안보회의와 정상회담도 기획해 본 비서실장마저도 그와 같은 대통령의 맥락 없는 말에는 슬슬 적응이 안 되기 시작했다. 그와는 달리 대통령의 머리 속은 여전히 헐리우드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 들었다.

    "핵전쟁 모의실험에서 말입니까?"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배우 출신인 대통령을 감독 출신의 입장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를 어릿광대라고 무시해 왔는데, 이때만큼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은 비서실장이었고 그는 대통령이었다.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 쓴 것처럼 바짝 긴장하는 이유는 서서히 진짜 비서실장이 되어가는 자신과는 달리 대통령은 여전히 어릿광대일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의식적으로 반문에 자신의 바램을 담아냈다.

    "모의실험이라니? 진짜 핵폭탄 말이야. 언제적 핵폭탄인데 아직까지 그런 낡은 것을 쓴단 말인가. 늘 새롭지 않으면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구. 핵폭탄도 마찬가지야. 영화 관객, 특히 그 젊은 국방위원장인가 하는 친구를 감동시키려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할 게 아니겠어?"

    대통령의 말에 전율을 느끼며 그는 이제부터 자신만이라도 비서실장으로서의 위치를 명확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은막과 골든 글로브만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그의 영화감독 유전자는 적어도 영화와 다큐는 전혀 다름을, 국제정치가 게임이론으로 분석가능한 면을 갖는다고 해서 현실이 게임은 절대 아님을 잘 알았다.

    "제작비도 만만치 않으니 일단 돈이 덜 드는 모의실험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각하."

    대통령은 '제작비'라는 말에 곧바로 수긍하는 눈치였다.


    주석궁

    공화국 5대 실세가 주석궁으로 국방위원장을 예방한 것은 합중국과의 정상회담 여운도 가시고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가 있는 상황이었다. 군 총정치국장, 인민군 총참모장, 국가안전보위부장, 군수공업부장, 인민무력부장은 특수부대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여군 비서의 안내로 주석궁 접견실에 자리를 잡았다.

    "국방위원장께서 잠시 기다려달라는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비서의 말을 듣고 오후 3시쯤 시작한 대기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날은 저물어 저녁시간이 되었다. 공화국 최고의 실세들이 끼니를 걸렀다.

    "국방위원장께서 별관에서 뵙자고 하십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번엔 건장한 남군 비서였다.

    "동무는 밤 근무인가? 위원장님은 어디 계시지?"

    덩치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보위부장이 그 젊은 친구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순간 비서는 바짝 긴장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국방위원장 동지께서는 별관 1918호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석궁 뒤쪽으로는 철제 컨테이너를 잇대어 놓은 듯 무미건조한 건물들이 십여 동 들어섰다. 모두 국방위원장이 취임하고나서 직접 만든 것으로서, 순전히 그 유명한 국방위원장 개인의 밀덕후, 곧 밀리터리 매니아 취미를 위한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국방위원장의 그와 같은 괴상한 취미를 탐탁치 않게 여겼는데, 이들 공화국 5대 실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군정치의 원로인 그 노병들의 눈에 플라스틱 모델은 쓸데없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전략폭격기, 항공모함, 탱크.. 아주 좋아. 그런데 그걸 플라스틱으로 35, 72, 350분의 일 크기로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굴러가지도 않고 조 한 알도 쏘지 못하는 그런 빈 껍데기를 말이야. 그럴 정성이면 진짜 발사되는 소총 한 자루를 더 만드는 게 낫지 않나?"

    "과학소설에나 나오는 거대 로봇과 역사와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는 거북선과 범선은 또 어떻고. 그런 것들이 공화국 군대의 전력 강화와 무슨 상관인데? 로봇 군단, 거북선 함대라도 창설할 모양이지?"

    "핵잠수함과 핵폭탄 같은 무기는 겉모양이 너무 단순해 플라스틱 모델로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여태 생산되지 않았는데,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도록 분해조립이 가능한 양파형 프라모델을 발명했다지 아마. 겉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알맹이까지 꽉 들어찬다면 더 이상 싸구려 프라모델이라 할 수 없지. 값이 꽤나 나가겠는걸."

    "그 쬐그만 장난감 갖고 노느라 현지지도할 시간을 못 낸다니 말이 되냐구요. 정말 천하에 쓰잘 데 없겠더구만."

    "육해공 주요 무기와 장비를 프라모델로 만든다던가."

    하지만, 그와 같은 불만은 국방위원장 취임 초기의 현상이었을 뿐, 그 이후로는 극소수의 선군정치 원로들 사이에서만 명맥이 유지되는, 세대교체에 따른 갈등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곤 했다. 대부분의 일반국민들과 정부조직 사이에서는 국방위원장의 열렬한 프라모델 취미 또는 밀덕후 활동에 대해 유아적이라거나 국가예산 낭비 비난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밀덕후인 젊은 국방위원장이 짧은 기간에 공화국을 군사강국으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국민들은 열광했고, 그와 같은 군사적 정치적 영감과 능력의 원천을 바로 그의 밀덕후 취미, 플라스틱 모델에서 찾는 것이 정설이었다. 공화국의 안보와 함께 그의 집권기반은 튼튼했다. 장기집권을 넘어 합법적 종신 국방위원장이 가시권에 들어왔지만, 정작 본인은 프라모델과 공화국 무력의 현대화에 빠져 군사에서 유리된 정치만을 위한 정치꾼들의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밀덕후들의 프라모델은 더 이상 애들 장난감도, 일부 극소수의 또라이짓도 아니라니깐."

    "밀덕후는 위대한 군인이라면 통과해야만 하는 사관학교 필수과정이야."

    "프라모델은 무기설계는 물론이고 모든 엔지니어링 디자인에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공학도를 위한 뮤즈의 화신이라 할 수 있겠지."

    "아무리 인생은 한바탕 꿈이고 꿈은 현실이 된다지만, 밀덕 군사학과 프라모델 공학이라는 현실이 참 낯설기만 하네."

    "국방위원장은 프라모델을 만들고, 프라모델은 국방위원장을 만든다."

    공화국 5대 실세들 사이에서도 결국 그렇게 결론이 난 상황이었다. 그의 밀덕후 취미가 오늘의 국방위원장을 만들었다고. 프라모델 안에 그의 군사, 정치, 공학, 철학이 다 들어있다고. 아니, 지도자로서의 그의 모든 자질이 프라모델에서 나왔다고.

    "동지들, 어서 오시오."

    사방의 국경이 조용하고 합중국 그리고 중화국과의 삼국정립도 완성되어 수십 년까지는 몰라도 최소 십년의 평화가 정착되었다고는 하지만, 사흘 동안 두문분출한 젊은 국방위원장은 온갖 군사용 항공기를 축소한 무수한 프라모델의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혹시 해리어라고 항공기 역사상 최초의 수직이착륙 공격기인데 아시는지?"

    국방위원장은 눈을 반짝이며 팔뚝만한 크기의 정교한 프라모델 하나를 들어보였다. 군 원로들 가운데 최고령으로 공군 출신인 총참모장만 대충 아는 체를 했다. 국방위원장의 번들거리는 눈빛에서 그들은 위원장 몰래 알만하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난 며칠 동안 프라모델 조립하며 뜬눈으로 밤을 몰골이었던 것이다.

    "지금 미니 제트 엔진 제작중이니 내일쯤 시험비행을 할 수 있는데 내일 시간들이 어떻게 되십니까? 지금까지의 모형 항공기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진짜 제트 엔진을 장착했는데 말입니다."

    국방위원장은 방 한쪽 구석에 설치된 커다란 상자형 설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멀뚱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위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감을 잡지 못했다.

    "각 항공기의 특징적인 곡면의 동체판부터 제트엔진까지 실제로 작동하는 축소모형을 복사해내는 최신 입체 프린터인데.. , 그래 무슨 일로들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오셨는지??"

    국방위원장은 그때서야 군 원로들의 대거 등장에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

    주석궁 주변에 들어선 십여 채의 건물, 그 안에 있는 천여 개의 방, 그리고 그 방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수한 프라모델들. 국방위원장 개인의 프라모델 설계, 제작, 전시, 연구를 위한 그 방들은 군사 매니아로서의 영감의 원천인데다, 그런 밀덕후의 모습에 이민자들이 모여들고 국민들이 열광하고 있었으니 군 원로들로서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전지구적인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의 인기와 인구는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상훈련 1

    버뱅크 수퍼컴퓨터 센터의 수석 프로그래머는 비서실장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감독한 영화에 컴퓨터 그래픽 제작업체로 참여한 적도 여러번이었다. 일반 사람들의 일상이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끊이지 않고 흐르는 글렌옥스 길을 사이에 두고 동네 주택가를 마주보고 있는 수퍼컴퓨터 센터는 넓은 터 한 가운데에 우뚝한 중앙 건물과 둘레에 점점히 흩어져 있는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누렇게 뜬 잡풀들 그리고 쌩뚱맞은 야자수 몇 그루가 어우러져 황량한 느낌을 더했다.

    "대통령 수행 중에도 용케 시간을 내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통령께서 경호원 서넛만 데리고 일정에도 없는 낚시를 굳이 하겠다고 카탈리나 섬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잠시 틈이 났네요. 대통령 특별 지시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두 사람은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수석 프로그래머의 11층 사무실에서 만났다.

    "핵폭발이나 핵전쟁 장면이 필요한데 그새 실력이 녹슨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요. 실제 핵폭발보다 더 그럴 듯하게, 더 큰 메가톤급으로, 원하신다면 기가톤, 테라톤급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상은 누구입니까? 설마 영화 관객은 아닐 테고 뉴스 시청자? 유권자?"

    수퍼컴퓨터 센터와 영화판에서 수십 년 굴러먹은 수석 프로그래머의 예리한 질문에 비서실장은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수소폭탄의 이론상 최고치이자 지금까지 제작된 수폭들 중 가장 강력한 폭발력의 1천 배, 티엔티 화약 십억 톤의 폭발력에 맞먹는 기가톤. 예술성보다는 사실성 위주. 그리고 이번 핵폭발 세례의 고객은 합중국의 모든 시민들. 일단은 바로 대통령 자신. 그리고 또 한사람을 더 든다면 공화국 국방위원장."

    "합중국 대통령과 공화국 국방위원장, 두 사람을 위하여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꼴이겠습니다.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관객들이니 무리도 아니지만."

    카탈리나 섬 낚시가 재미있었는지 대통령은 아예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다는 소식에, 수석 프로그래머와 만나고 난 비서실장은 그가 좋아하던 음식점으로 갔다. 헐리우드 출신으로서 자기가 잘 아는 카탈리나 섬을 대통령이 즐기겠다면 자기도 역시 자신의 안마당이랄 수 있는 버뱅크를 좀 더 즐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밀가루와 물과 소금만으로 만든 담백한 라바쉬 빵에 싸기는 했지만 안에 든 양고기 숯불 구이의 맛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수석 프로그래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기존 수소폭탄보다 1천 배 센 기가톤급으로 충분할까 모르겠습니다. 기가톤이 아니라 테라톤급 수소폭탄도 우리에겐 고작 여섯배 정도 더 센 것으로밖에 안 느껴지거든요. 우리 감각은 자극의 로그함수에 비례한다는 베버-페히너 법칙 때문이죠. 감독님이, 아니 비서실장께서 원하시는 대로 1천 배의 감각적 효과를 내려면 101천 제곱 배의 폭발력이 되어야 하는데, 그건 수퍼컴퓨터로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 정도 에너지라면 모르긴 몰라도 일개 핵폭탄이 아니라 초신성의 폭발을 넘어 빅뱅까지 넘나드는 우주론적인 시뮬레이션이 될 테니까요. 간단히 말해서, 프로그래머인 제가 노벨물리학상을 노리는 상황이죠. 하하하."

    그럴 수는 없었다. 스크린 안에 갇힌 핵폭발로만 느껴져서는 안 된다. 수퍼컴퓨터 속 모의실험이긴 하지만 핵폭발이 컴퓨터 밖에 있는 대통령에게 걸어나와 생생하게 전해지든지, 아니면 대통령이 기가톤급의 수소폭탄이 터지는 현장인 수퍼컴퓨터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했다.

    "대통령을 영화에서 꺼내서 다큐 안으로 집어넣어야 하는데.."

    비서실장은 생각에 빠져 손에 들고 있던 라바쉬 빵 옆구리가 터져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통령이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 국가안보회의를 다시 소집한 때는 카탈리나 섬 낚시가 끝난 지 한 달쯤 지난 시점이었다. 군사외교정치 분야에서 새로운 긴급 상황이 발생해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보름이나 달포에 한번씩 폭주하는 대통령의 헐리우드 호르몬 때문이었다.

    "제국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 볼거리, 먹을거리, 사건사고가 하루도 끊이지 않는, 재미와 흥미가 넘치는 대마왕 같은 나라야. 국민이란? 국가라는 거대한 영화세트장에서 자기만의 영화와 같은 삶을 찍어가는, 살아가는 존재. 대통령으로서 나의 첫번째 임무는 그 몇 억개의 독립영화가 동시에 촬영될 수 있도록 그 영화세트장을 말이지.."

    "대통령 각하, 지시하셨던 핵전쟁 모의실험이 완성되기 전에 재래식 도상훈련을 준비해봤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판에 박힌 사설을 자르며 슬쩍 치고 들어갔다. 오후 늦게 소집된 국가안보회의가 자칫하면 또 자정을 넘기는 사태는 막아야 했다.

    "재래식 도상훈련이라. 그럼 이 장난감들을 지도 위에서 이리저리 밀고다닌다는 말인가? 화면 속 비행기와 탱크를 조이스틱으로 조종하는 그런 재미없는 도상훈련보다는 더 재미가 있겠군. 좋아!"

    대통령의 말을 큐 사인으로 삼은 듯, 국가안보회의 고정 멤버들과 특별히 초대된 육해공군, 해병대, 전략군 사령관들이 둘러 앉은 커다란 둥근 탁자가 거대한 모니터가 되면서 그 위에 세계 지도가 떴다. 그리고 부관들이 상황실 안으로 들여온 각종 무기체계 모형들이 전략거점에 배치되었다. 각 군 사령관들이 익숙하게 ㅜ자 모양 밀대가 달린 막대기를 써서 지도 위에 자신들의 전략 자산을 전개하는 동안, 대통령은 어린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합중국, 중화국, 공화국 사이의 삼국 가상전쟁이 합참의장인 5성 장군의 박진감과 섬세함을 넘나든 지휘에 따라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도상훈련은 비서실장의 노력 덕분에 자정 전에, 무슨 은하전설 속 괴조와도 같은 신비감과 지도상 적국의 한 모퉁이를 뭉텅 날려버릴 무시무시한 절대 파괴력을 품은 듯한 정교한 모형 전략폭격기 한 대가 공화국과 중화국의 전략거점을 핵폭격한 뒤 대통령 집무실 탁자 한 모퉁이에 착륙함으로써 끝이 났다.


    비밀회담

    대통령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비서실장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대통령이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관심을 딴 데로 돌려 '재래식'으로 풀어보자는 취지였는데, 이 재래식 도상훈련이야말로 전쟁은 그저 장난감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잘못된 느낌을 대통령의 잠재의식에 심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비서실장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수소폭탄 모의실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대통령은 수소폭탄의 폭발력을 1천 배 강화하는 예산안에 서명해 버렸다. 전쟁은 재미있는 놀이, 핵전쟁은 영화의 좋은 소재이자 선거라는 초대형 정치시트콤을 위한 하위 아이템으로서의 국민오락 정도로 인식하는 모양새였다. 영화와 다큐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다큐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내버리고 영화란 블랙홀 속으로 번지 끊고 점프, 편도 여행을 떠났다고나 할까.

    "대통령 각하, 공화국 쪽에서 핵군축 회담을 제안해왔습니다."

    "그것 보라구. 우리의 '수폭 1000' 카드의 효과가 벌써 나타나잖나. 국방위원장이 다급해하는 꼴이 훤히 보이는구만. 국방위원장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직접 보고 싶기는 한데, 일단 당신이 가서 만나봐. 우리야 급할 이유 없으니까 느긋하게, 자유하고 민주하게 말이지. 크크크."

    비서실장은 당장 워싱턴에서 평양으로 날아갔다. 그의 회담 상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 총참모장이었다. 그는 군인보다는 외교관 느낌이 나는 인물로서, 합중국과 공화국 사이에 비밀리에 구축되어 있는 막후 접촉선, 일종의 핫라인이었다. 처음에는 국제연합 사무국이 주선한 비밀중재의 결과였다. 그러나 자주 만나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동지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아무런 군사력도 강제력도 보유하고 있지 않는 국제연합, 특히 사무국의 장기는 큰 그림 그리기였다. 한 해에도 스마트폰 앱처럼 무수히 많은 나라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동적인 국제 정치 생태계에서 국제연합은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막연한 이야기만 했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와 같은, 그래서 결국 아무도 대놓고 거스를 수 없는 대국적인 가치들.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지만 몰래몰래 해야 하는 그런 상식들.

    합중국의 비서실장과 공화국의 총참모장은 거대한 두 군사대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현장에서 미세한 접점 찾아가기를 오랜 세월 동안 되풀이하다 보니 그와 같은 국제연합 사무국의 큰 그림과 막연한 이야기, 곧 인류의 집단적인 양심을 공유하는 폭이 자연스럽게 점점 넓어졌고, 어느 순간 그 임계치를 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합중국과 공화국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류 양심의 비밀 수호자가 되었다. 국제연합 사무국의 절대적인 지지와 지원이 뒤따랐지만, 역시 국제연합 사무국의 물리적인 기반이 취약하였기에 대부분의 경우 도덕적 지지와 지원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국제연합 사무국으로부터 비밀리에 받는 실질적 물리적 지원은 딱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인류 전체의 생사와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무대인 지구의 지수화풍이란 하드웨어 자원에 이어 인류의 정신세계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랄 수 있는 제5의 자원, 1억 대의 서버로 구성된 전지구적인 인터넷 서버 네트웍에 대한 접근권이었다. 물론 각국 정부들은 온갖 암호 시스템과 보안 설비를 통해 민감한 일급 정보는 국제연합 사무국과 공유하지 않아서, 맥락 있는 의미라고는 전혀 없고 영양가 측면에서 보자면 섬유질과 진배 없는 그런 일상적인, 어떻게 보면 쓰레기 정보로 넘쳐나는 곳이 인터넷이었다. 만약 플라스틱 미세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던 지난 세기의 태평양 비슷한 인터넷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면, 사금 채취나 우라늄 235 농축처럼 더럽고 비싼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바로 빅 데이터. 많은 경우 사금이 투자금에 미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네트웍 접근권은 인류의 집단양심을 수호하는 데에 그 어디에서 받을 수 없는 특별한 도움을 두 사람에게 줄 때가 많았다.

    "국방위원장의 근황은 어떤가?"

    "대통령 정신세계의 기상도는?"

    "중화국 당 기율위원회 서기는 어때?"

    서로의 고급 정보를 교환하고, 두 사람의 내면을 통해 그 비밀 회담에 은유적으로 참석하고 있는 제3의 존재, 즉 국제연합 사무국으로부터의 공유 정보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그날의 현안은 두 가지였다. 수폭 1000와 중화국 핫라인의 개설.

    "대통령이 마침내 수소폭탄 위력을 1천 배 증강시키는 예산안에 서명했어. 이론적으로야 수십 년 전에 밝혀졌으니 1년 안에 완성되리라 예상하고 있다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 못지 않은 밀덕후인 국방위원장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는데 어떡하지. 그 계획을 중단시킬 만한 묘책이 뭘까? 이번 기회에 핵무기 자체를 모두 폐기할 방안이 나오면 좋겠는데 말이야."

    "한 가지 방안을 생각중이야. 아직 1년의 시간이 남았으니 더 구체화되면 알려줄게."

    "중화국 핫라인 개설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 합중국과 공화국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만, 우리 둘과 바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을 둔다면 일 처리가 한결 편할 텐데."

    "그거야 물론이지. 그래서 사무국에서 그 사람을 추천했겠지. 중화국 당 기율위원회 서기. 나도 따로 찾아봤는데, 역시 괜찮은 인물로 보이더군. 난 사무국의 추천에 찬성!"

    "자네가 그러하다면 나도 찬성이지. 우리 둘과 성격 측면에서도 잘 맞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거야 사무국에서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사무국의 정보수집능력을 우리가 어디 하루이틀 보아 왔던가."

    "그건 그래."

    잔잔하게 흐르는 대동강 강변에서 비밀회담을 끝낸 두 사람은 공식회담을 위해 인민보안성 신청사로 이동했다. 핵전력 감축협상을 위한 사전 실무회담.

    "워싱턴 광장과 포토맥 강 사이 아인쉬타인 공원에서 김일성광장과 대동강 사이 인민보안성 신청사까지. 그림이 아주 좋아! 대칭, 너무 좋아! 그 어려운 수리 물리학에서도 문제 안에서 대칭성을 찾으면 그 문제를 다 푼 거나 마찬가지이거든."

    "워싱턴 광장에서 김일성광장까지? 갖다 붙이기 선수로구먼. 하하하."


    수폭 1000

    백악관 상황실에 붙어 있는 작은 방에 새로운 기계장치를 설치하였다. 중앙 기둥을 중심으로 의자 세 개가 기둥을 등지도록 배치되고 각 의자 위로 튜브와 줄 여러 가닥에 헬멧이 매달린 모습이 언뜻 보기에 회전 치과 진료실 같기도 하고 미용실 파마 기계 같기도 하고 안마의자 같기도 했다.

    "이게 그거란 말이지."

    대통령가 던지는 대명사 화법은 지금 그가 몹시 흥분한 상태란 뜻이었다.

    "맞습니다. 사차원 가상현실 영화관의 미래. 오감으로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드는 영화."

    통상적인 오감은 아니었다. 물리적인 시각, 청각, 촉각은 처음엔 기계적으로 자극되지만 화학적으로 복잡하고 예민하기 그지 없는 후각과 미각은 불가능했다. 뇌의 말단에 해당하는 감각기관인 눈과 귀와 피부를 자극하는 기계식 감각 단계를 지나 뇌를 직접 자극하는 전자식 감각 단계로 넘어갔을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리화학적인 자극을 받아들여 전기신호로 바꾸어 뇌로 보내는 감지기인 눈, , 피부, , 혀와 그 전기신호를 처리하고 분석하여 오감으로 인식하는 뇌 사이를 해킹하여 물리화학적 자극 없이도 뇌로 가는 전기신호를 임의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향기는 또 뭔가? 몸은 나른하고 편안해지는데 정신은 오히려.."

    대통령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오감의 해킹이 시작되어 뇌와 감각기관, 곧 뇌를 제외한 온몸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혀에서 뇌로 올라가는 미각 신호뿐 아니라 뇌에서 혀로 내려가는 운동 명령 신호까지 차단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대통령이 맡은 향기는 진짜였다. 뇌에서 전신을 생화학적으로 분리해내는 일종의 마취제였다.

    수폭 1000의 핵실험 시뮬레이션은 그와 같은 오감 해킹 경로를 타고 두 사람의 뇌에 직접 접속하여 입력되었다. 대통령과 비서실장 두 사람뿐만 아니었다.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 공화국 주석궁 구석방에서도 국방위원장과 총참모장도 파마 기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다큐 '수폭 1000'을 함께 시청하고 있었다. 버뱅크 수퍼컴퓨터 센터의 걸작이었다.

    시뮬레이션은 우주, 지하, 대기, 해양, 대도시 환경에서의 관측을 위한 핵실험이 아닌 군사적인 공격 수단으로서의 적나라한 핵폭발을 보여주었다. 네 사람 각각을 그 가공할 기가톤 수소폭탄 핵공격의 한 가운데로 밀어넣어 버렸다고 할까. 실제로 그들은 잠을 부르는 안마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그들의 두개골 안 쪽에서 온갖 형상으로 피어오르는 전기불꽃 놀이를 감상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그들은 무시무시한 핵폭발의 한 가운데에서 고층빌딩을 순식간에 내파시켰다가 가루로 날려버리는 핵진공과 핵폭풍, 카메라와 망막과 시각 그 자체를 태워버리는 핵광, 바위를 순간기화시키고 모래를 유리로 녹여버리는 고열, 그리고 세포속 적혈구와 백혈구를 한 줄로 꿰어 꼬치구이하듯 생명 그 자체를 유전자 단위로 꼼꼼하게 파괴하고 죽여버리는 핵방사능을 온몸으로, 증강된 오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들 뇌의 입장에서는, 핵폭발의 결과 나오는 유형 무형의 에너지 흐름은 입자 하나 광자 하나까지 나노 초 단위로 전기신호로 바뀌어 증폭된 다음 그들의 온몸에 퍼져 있는 수억 개의 통각 말초신경에 한꺼번에 전달되는 상황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섬세하게 일깨워지고 정교하게 증폭된 수천수만 가닥의 오감 자극은 그 하나하나가 검색어와 낚시바늘이 되고 스위치가 되어, 해마라는 하드웨어와 잠재의식이라는 소프트웨어 그리고 무의식이란 펌웨어 안팎에 구축된 정교한 자신만의 매트릭스 속에 평생 또는 어떤 이론대로 무한 생을 두고 쌓이고 봉인되어 왔던 뒤틀리고 꼬인 모든 업장의 고해 데이터베이스에서 온갖 공포와 고통을 낱낱이 끄집어내어 네 사람의 현재 의식에 접속시켜 주었다.

    "차라리 지옥이 낫겠군! 우리가 선제 핵공격 가하고 그래도 살아남은 적 핵미사일 몇 개만 요격하면 이긴다는 미친 생각, 도대체 누가 했나?"

    파마 헬멧을 벗은 대통령이 진저리를 치면서 하는 말이었다. 비서실장으로서는 처음 보는 대통령의 진지한 모습이었다. 오감과 영혼까지 탈탈 털린 핼쓱한 표정이었다. 비서실장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에서 척추를 거쳐 새끼 발가락 끝 말초신경까지 전기 고문을 당한 듯 온몸이 얼얼했고, 자기도 몰랐던 자신만의 공포, 잔혹, 슬픔의 코드에 최적화된 악몽 속에 여전히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기가톤 수폭은 전쟁 당사자와 방관자를 따로 구별해주지 않는군요. 일찌감치 화성이나 달나라로 달아난다면 모를까. 지구-화성 전쟁에나 쓰지 지구인들끼리 전쟁하면서 쓸 물건은 아니네요."

    수퍼컴퓨터에서 돌아가는 핵폭발 시뮬레이션도 대단했지만, 마취제와 합성신경전달물질 칵테일은 일종의 공감증폭기로서 수폭 1000 모의실험 프로그램이 아예 뇌라는 생체컴퓨터에서 직접 돌아가게 만든 셈이었다. 효과는 두개골 안에서 일어난 미니 빅뱅.

    "수소폭탄 1000 연구, 당장 중지해. 만약 군산학복합체쪽에서 반대하면 저 다큐 보여주고."

    집무실로 되돌아온 대통령의 일이었다.

    "전국 영화관에서 온 국민이 의무적으로 보게 할까? 핵무기 예산 전용하면 무료 관람 가능할 터.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어 팔아? 미래의 주인공,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중요하잖아."

    대통령은 역시 천생 쇼 비즈니스맨이었다.


    도상훈련 2

    릉라도 51일 경기장. 대동강 하중도에 착륙한 거대한 비행접시 모양의 원형경기장, 현대판 콜로세움. 그날의 관객은 15만 명 대신 국방위원장을 위시하여 공화국 권력 서열 백 위까지. 그날의 공연은 10만 명이 동원된 '아리랑' 대신 10만 대의 프라모델이 전개되는 초대형 육해공 전투 시뮬레이션인 '플라스틱 전쟁 3.14'.

    맨 먼저 펼쳐진 육상 전투. 경기장 바닥에는 야산과 구릉, 강과 호수가 축소 모형으로 실감나게 재현된 상태였다. 국방위원장 노트북 컴퓨터 화면에서의 마우스 클릭으로 시작된 전투에는 적색 탱크 1천 대와 백색 탱크 1천 대가 투입되었다. 탱크는 2차대전 때 소련과 나찌 모델이었으며 1/35 스케일로서 20센티미터의 무한궤도에 포탑까지의 높이는 10센티미터. 152밀리미터 주포는 22구경으로 축소. 휘발유 대신 전기를 썼지만 무한궤도로 전후진과 방향전환 등 모든 기동을 해냈기에 탱크 특유의 소리까지 그대로였다. 모두 2천 대의 모형 탱크가 축소판 전장에서 질주하며 진법을 펼쳐 진격, 포위, 타격, 타개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비록 경기장은 넓고 탱크는 작아 쌍안경 관람이 기본이었지만, 맨눈으로 보기에도 훌륭한 전차전이었다. 전투는 십자선으로 표시된 상대 진지에 대한 집중 포격으로 끝이 났다. 합중국 대통령의 자랑거리라는 거대한 체스판부럽지 않았다.

    해전은 관람석 바로 앞에 설치된 지름 50미터 깊이 2미터 투명막에 채운 물 위에 작은 섬들도 점점이 떠 있는 바다 축소모형에서 벌어졌다. 대장선인 거북선 빼고는 모두 2차대전 때의 구축함, 순양함, 잠수함 프라모델로 구성된 두 함대 간의 해상 전투가 생생게 펼쳐졌다. 전장은 해군용 헬리콥터와 잠수함으로 인해 입체적으로 확대되곤 했다.

    맨 마지막에 등장한 프라모델 군용기들의 비행은 압권이었다. 전투기의 공중전, 폭격기 요격기의 사투, 그리고 밤에 모든 조명을 끈 상태에서 초소형 발광 드론 5만 대가 보여준 가창오리떼의 공중군무를 모방한 비행.

    그 희대의 도상훈련, 아니 스마트 프라모델의 전개 훈련을 보고 총참모장 이하 백 명의 공화국 실세 관객들은 밀덕후 국방위원장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국방위원장의 밀덕후 취미를 속으로는 업신여기고 있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는 입이 딱 벌어져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프라모델 하나하나를 모두 설계하여 제작하고 그 모든 무기들을 컴퓨터로 프로그램하고 조종하고 수많은 프라모델들을 디스플레이 장치의 픽셀로 사용하여 소인국의 전쟁을 완벽하게 재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크고 끔찍한 무기들을 만들어서 아까운 젊은이들을 떼죽음하게 만드느냐는 말입니다. 전쟁은 원래 군자의 수단이 아닌 만큼, 굳이 전쟁을 원한다면 소인국에 가서 소인의 방법으로 할 일이겠습니다. 바둑이나 장기가 너무 심심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리고 실제 탱크에 비해 프라모델 탱크는 아무리 스마트해진다 해도 제작비가 백만 분의 일밖에 안 든단 말입니다. 바둑알이나 장기알보다는 좀 많이 비싸긴 하겠습니다만."

    국방위원장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미니 군수공장을 건설하시오. 제트엔진 자체까지 축소모형으로 만들고, 로봇 군인 축소모형까지 제작하시오. 병사가 필수인 보병 전투와 역사 속 고대 전투까지도 재현할 수 있도록."

    국방위원장이 군수공업부장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옆에 있던 총참모장 이하 5대 실세 같은 노병들은 속으로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의아해했지만 국방위원장 또래의 젊은 군수공업부장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기계 장치도 조립해내는 입체 프린팅과 마이크로 가공기술을 인공지능을 이용한 설계와 접목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제작가능함을 모르고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프라모델과 입체 프린팅은 상상과 꿈을 곧장 현실화시키는 요술봉이죠."

    자신감에 넘치는 군수공업부장의 말이었다.


    국가론

    국가란 무엇인가. 의견이 분분했다. 국가의 3대 요소라 불리우는 국토, 국민, 주권을 가진 집단. 국토와 국민에 미치는 통치 권력인 주권의 원천과 주체는 국민. 그 정도였다. 물론 거대한 복잡계인 국가가 고작 세 가지의 극히 추상적인 재료를 하나의 선언적인 구성 원리로 얼버무려 뚝딱 만들어질 리는 없다. 국가의 주체라는 국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국토도 주권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그 어떤 무엇이 된다. 국민의 국가인가, 국가의 국민인가. 폴리테이아의 중요한 문제였다.

    국민 개개인이 각자의 권리 일부를 잠시 유보하여 상호 응집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주체적으로 만든 잠정적인 계약체가 된 22세기의 국가, 지금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중세시대의 영주와 같은 존재로서, 국토보다 우위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국토의 일부로 언제든지 철수할 수 있는 상태로 잠시 맡겨놓았을 뿐이며, 국가 주권마저도 국민 개개인의 국가선택권의 하위에 놓이는 판었다. 국가 내에서만 존중받았던 거주이전의 자유는 이제 국가 밖으로 확장되어 국경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국민의 운명을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국가는 사라지고 가입탈퇴가 자유로운 동호회나 자동차 보험회사 같은 나라가 되었다.

    합중국과 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의 정신세계의 가장 큰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예술계 팬덤과 전문성과 충성도에서 독보적인 밀덕후들이 모여 일시적으로 형성한 가상국가였다. 인간의 본성이 심각하게 변하지 않는 한 중화국과 함께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되리라 전망은 하지만, 20년만에 한번씩 열리는, 무와 유를 오가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양자 확률의 바다 속 가상입자처럼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 속 덕후들의 현실국가화 놀이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

    세 사람이 처음 만났다. 합중국 비서실장, 공화국 총참모장, 중화국 당 기율위원회 서기.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국제무대에서 부딪힐 일이 많아 개인적으로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국제연합 사무국의 핫라인으로서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중화국의 핫라인이 된 것을 축하해."

    "새로운 20년이 시작된 만큼 잘 해보자구."

    "영덕, 밀덕, 화덕을 위하여!"

    황량한 교외 지역 2천 평이 넘는 황무지에 몽골식 천막을 치고 사는 기율위원회 서기는 독주와 양고기를 무한정 내왔다.

    "이 게르는 퍽이나 운치가 있는 걸. 이 정도라면 화덕보다는 밀덕, 우리 공화국으로 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총참모장의 말에 서기는 호탕하게 웃었다.

    게르 천정에 만월 하고 셋이 만취했을 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국제연합 사무국이 국장이 따로 없는 최초의 무인 조직이라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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