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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소행성 세레스 추방. 그래도 명색이 세기적인 미식가 피고인인데 재판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악질적인 현행범으로 체포된 순간부터 무인 법집행 시스템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된 구금과 재판 전 과정은 불과 보름 남짓,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가혹한 선고마저 체포 이후 줄곧 머문 네 평이 될까말까한 그 좁은 구치소 감방에서 화면에 흐르는 몇개의 단어가 전부였다. 세레즈라 불러야 할지 케레스라 불러야 할지도 망설여지는 이 낯선 소행성은 인류가 개척한 식민지 가운데 인류문명의 발상지 지구에서 가장 멀고 한적한 곳이었다. 초호화 우주낙원의 대명사인 지구 궤도 우주식민지, 태양계 최대 규모인 독립국 달나라, 납도 녹이는 대기의 열기를 멀찌감치 피해 궤도를 돌고 있는 금성 궤도 우주식민도시, 달나라에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하고 있는 화성 정착지, 열지옥과 냉지옥의 경계이자 낮과 밤의 경계인 새벽을 따라 표면 위에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수성 식민도시에 이은, 태양과 지구에서 가장 먼, 한때 태양계의 제일금광으로 불리웠던, 소행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행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왜행성이라 불리는 세레즈.
"반구대씨, 만찬치고는 꽤나 비싼 최후의 만찬이었던 셈이군요."
체포 이후 처음 만나게 되는 지구에서의 마지막 사람, 추방 판사였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그 사람은 구대의 감방으로 직접 찾아와 우주공항까지 동행했다. 구대에게는 수갑도 채우지 않았고 무장경호원 같은 다른 동행도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이 마치 소행성 탐험이나 가벼운 우주식민지 소풍이라도 떠나는 분위기였다. 보름만에 감방을 나서는 구대는 특히 그랬다.
"일반인들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지저분한 핵발전 전기로 무겁기만 한 납축전지를 마지못했 충전하는 행위나 진배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미식가들에게 제대로 된 한 끼니란 예술이고, 철학이고, 목숨 그 자체랍니다."
구대의 말에 추방 판사는 희끗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정도로 고개를 젖히며 웃었고 구대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키와 체형은 물론이고 하얀 머리카락에 나이도 비슷해 보였다.
"고래고기가 그래, 그렇게 맛있던가요? 지구에서 영구추방된다 해도 괜찮을 그런 맛이었던가요? 지구상 최후의 야생 귀신고래를 잡아드셨다구요."
추방 판사의 입술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선 약간의 냉기가 느껴졌다. 구대는 그의 눈길을 피해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우뚝우뚝 서 있는 우주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 대기에서 공기를 빨아들여 작동하는 제트기들이 납작 엎드려 있는 일반 공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뾰족한 로켓은 하늘 너머 지구 궤도를 한참 벗어난 변방 중의 변방, 소행성대를 똑바로 가리키며 자기에게 "꺼져!"라고 외치는 거인의 손가락처럼 보였다.
"고적미, 진화영.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되었던가요?"
과거보존국 국장 고적미와 유전자보존국 국장 진화영, 구대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그들은 저의 친구인가요, 아니면 적인가요?"
짚이는 데가 있어 구대가 판사에게 물었다.
"반구대씨를 세레즈로 추방해달라는 청원서를 법원에 낸 분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그런 네 평 감옥에서 썩었을 텐데, 그들이 친구인지 적인지, 그러니까 네 평 감옥일망정 지구가 좋은지 명계 버금가는 곳이지만 드넓은 우주로 열린 얼음 행성 세레즈의 평원이 나은지는 직접 판단하셔야겠네요."
"저로서도 속단할 수 없는 처지이군요. 일단 세레스에 도착해서 더 고민해보도록 하죠."
과거와 유전자 보존? 인류역사상 첫째 둘째로 꼽을 만큼 어리석고 값비싼 식탐 끝에 세레스라는 폐광산촌으로 유배되어 가는 자신의 처지와는 어떤 상관 관계도 없을 듯했다.
세레스는 인류가 지구 밖에서 저지른 우주적 규모의 먹튀 현장이었다. 세레스는 수성과 금성, 화성 식민지보다 훨씬 더 먼저, 달에 세워진 최초의 월면 도시에 앞서 개발된 곳이었다. 에베레스트산 정도가 아니라 성층권 너머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지구 중력이라는 드높은 절벽 위, 갈수록 추워지고 어두워지는 평평한 꼭대기를 따라 지구 궤도에서 소행성대까지 내쳐 비행해야 도달하는 황량한 세레스가 우주탐험개발역사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개발된 이유는 바로 세레스에 묻혀 있었던 막대한 지하자원, 특히 황금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세레스 우주공항을 벗어나니 풍경에선 단연코 중국 서쪽인 서역과 미국 서쪽인 서부 또는 호주의 내륙에 있는 광산촌 느낌이 났다. 일년에 한번씩밖에 오지 않는 지구 연락선이 떠난 우주공항의 썰렁함, 그리고 그로 인한 공권력의 진공 상태 같은 황량함은 그런 분위를 더했다. 얼음에 뒤덮여 있고 수증기 분출도 자주 관측되었던 세레즈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물의 총량보다 더 많은 물이 있으리라고 예측되고 있었다. 따라서 소행성대 너머의 먼 우주에 대한 탐험 혹은 깊은 우주에 대한 '채굴'이 본격화되면 필수불가결한 중간보급기지가 될 터였다. 지구에서는 흔한 자원일지 몰라도, 지구 밖 우주 또는 천체의 환경에서 물이란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생명물질일 뿐 아니라 로켓 엔진의 추진 연료로서, 마실 수도 태울 수도 없는 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세레스 우주공항에서 그를 맞은 사람들은 새미와 윈징 그리고 순야, 그렇게 셋이었다. 텍사스 넓이의 표면적을 갖고 있는 세레즈의 인구는 천 명 정도라고 했다. 거의 대부분이 구대의 경우처럼 재판을 받고 추방당한 사람들이었다. 새미는 60대 후반쯤의 사내였고, 윈징은 50대, 순야는 40대로 척 보기에도 힘이 넘쳐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티티우스-보데의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 백만 명이었다는 것, 믿을 수 있겠어요?"
"백만 인구의 도시에 천 명만 살고 있으니 좀 널널한 편이죠."
"조용한 성찰의 삶을 살기에 나쁘지 않고요. 속세의 번잡함에서 가장 먼 곳이니까."
구대가 우주선에서 내린 다음 기밀실을 거쳐 우주복을 벗고 공항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세 사람은 구대에게 말을 걸기 바빴다. 인구 천 명의 작은 마을, 이웃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온 분위기였다. 공항에는 천여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세레스 인구 전체가 거의 다 나선 숫자로서 구대의 환영인파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구대가 타고온 우주선에 함께 실려온 지구로부터의 보급품에 관심을 기울일 뿐 그들 네 사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각종 광물자원, 특히 황금 채굴 때문에 백만 명이 이 세레스 유일 도시인 티티우스-보데에 모여살았다고 하죠. 그런 태양계에서 보기 드문 호황이 한 이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인데."
"눈에 보이는 모든 장치와 장비들, 온 도시가 녹슬어 부서져 내릴 듯한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 되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흉물스러운 몰골로라도 유적들이 남아 있으니 믿지 않을 도리는 없고요."
"만약 세레스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공공도서관에 가면 돼요. 피아치 분화구 빼고는 제일 볼 만한 게 바로 도서관이니까."
백만 명의 도시에 천 명만이 사는 터라, 티티우스-보데 시의 대부분은 버려진 채였다. 새미 등 세 사람이 구대를 데려간 곳은 도심에 있는 거주 지역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였다. 그 세 사람이 살고 있는 3층 짜리 작은 아파트 건물 꼭대기 층에 구대도 거주공간을 지정받았다. 그들을 세레스로 추방한 공권력이었지만, 세레스에서는, 특히 지상과 지하에 걸쳐 건설되어 있는 티티우스-보데 시의 유리돔 안에서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힘이었다. 그렇지만, 농업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 식량 자급은 가능한 상황에서도 보급품을 통한 지구 공권력의 통제는 언제든 가능했다. 지구 정부의 촉수는 소행성대의 구석구석, 세레스 표면에 뚫린 수많은 광산 갱도 하나하나마다 깊숙히 뻗어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세레스를 어떤 식으로든 탈출하겠다는 망상은 버리는 것이 현명하죠."
"유리돔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기 시작한다고 봐야겠죠. 스스로 내뱉은 이산화탄소 중독사, 세레스 대기와의 열평형 즉 동사, 폐광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객사 등등, 그 방법은 끝이 없을 겁니다. 지구만큼은 아니지만 세레스라는 거대한 천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가능성은 시험해보기 전에는 다 알 수 없을 겁니다."
"결국 지구 정부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유리돔 안에, 그리고 도심의 거주구역 안에 자동으로 우리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셈이지요. 그런 면에서 역시 공공도서관이 최곱니다. 죽음의 그림자 걱정할 필요 없는 지식의 성소이니까요."
망원경과 무인 탐사체를 이용한 원격 탐사 끝에 일찌기 확인된 물의 존재는 세레스에 대한 지구의 관심을 지속시키는 이유가 되었고 로봇탐사선의 착륙으로 단순한 금이 아닌 금광의 존재가 드러나자 세레스에 대한 지구인들의 탐욕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우주선 발사 체계를 갖추고 있던 중국을 비롯한 여섯 나라에 태양계광산개발회사들이 속속 생겨나더니,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세레스는 지구인들이 뚫어 놓은 무수한 금채굴 갱도로 벌레먹은 복숭아꼴이 되어버렸다. 그 수가 얼마나 많던지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라고 했다. 이는 지하 갱도 미로에서 길을 잃으면 살아나오기가 힘든 이유가 되었다.
세레스 공공도서관에만 보관되어 있는 희귀본이라는 골드러쉬 시대의 생생한 기록을 접한 구대는 주로 새미, 윈징, 순야와 함께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안 곳곳을 돌아보는 시간 외에는 혼자 도서관을 찾을 때가 많았다. 세레스 자급 농업은 로봇 경작이라 구태여 개인 농장을 불하받지 않는다면 따로 할 일이 없는 기본소득자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세레스 거주민의 일상으로서 그리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각자위심과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구인들보다 훨씬 더 긴 자유시간을 누렸다.
"우리 세레스인들이 누리는 기본소득의 혜택은 죄수들에게 지급되는 기본 생계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면까지 곧장 까뒤집어 보여주는 화법이 새미의 장점이었다. 바늘구멍만한 빈틈도 순식간에 장정 하나를 통채로 집어삼키는 괴물로 변신하고 마는 기밀실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세레스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밴 화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정법보다는 직설법 그리고 은유보다는 직유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식도락은 고사하고 육식도 없어진 통에 벌써부터 쌓이기 시작한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부러라도 일을 만들어야 했다. 해야 할 일도 없는 처지에 자신의 관심을 딴 데로 돌려야 하는 구대 입장에서는 뭐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루하루를 꽉꽉 채워나가야 했다. 맨 먼저 지난번 새미가 공공도서관과 함께 추천했던 피아치 분화구를 가보기로 했다.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도시는 강철과 유리와 기밀 콘크리트의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분화를 그친 지 1억 년이 넘는 안정적인 지반과 그랜드 캐년 깊이의 분화구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원형 융기부는 그 분화구 안에 도시를 건설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운석 충돌 에너지로 완전히 녹았다가 굳어 형성된 유리질의 지반은 도시 건설에 필요한 단단한 바닥과 기밀 유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주었고, 원형융기부는 도시의 천연 성벽처럼 유리돔의 측면을 견고하게 붙잡아 주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대부분은 지하에 건설되어 운석 충돌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지하에 있는 지하 호수 또는 바다로의 접근을 쉽게 만들었다.
피아치는 지구에서 망원경으로도 관측할 수 있었던 거대 분화구로서 세레스를 처음 발견한 주세페 피아치의 이름을 딴 곳으로서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피아치의 분화구 바닥에 있는 지반은 특별히 반사율이 높은 재질인데다가 지하 호수와도 가까워서 표면에 무기물에 물분자가 결합한 물질의 형태인 수화물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태양의 각도에 따라 펼쳐지는 빛의 향연이 유명하였다. 피아치는 또한 세레스 개발 초기에 물의 접근이 쉬워 지하에 세레즈 최초의 핵융합 발전소를 건설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새미의 말에 따르면 분화구 가장자리를 따라 무수히 형성되어 있는 동굴 속 무려 백만가지로 색다르고 다채롭다는 빛의 향연과 함께, 건설 당시만 하더라도 궁극설계와 궁극재질의 시대 이전이라 이제는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핵융합로가 대표적인 관광 명소가 되어 있다고 했다. 물론 백만 명의 인구와 수십만 여행객들로 흥청대던 골드러쉬 호황기 때의 이야기일 뿐, 금광이 마른 데다가 전반적인 우주 개발의 퇴조 물결과 함께 찾아온 불황이 지속되는 현재 상황에선 그저 역사적 상상만 가능했다.
구대의 피아치 탐험에는 새미, 윈징, 순야가 동행해 주었다. 세레스에서의 공간 이동은 모두 비행으로 이루어졌다. 지구의 3퍼센트밖에 안 되는 중력이지만 걷기와 지상운송수단도 가능은 했다. 다만 전진과 부상의 에너지 비용이 비슷해서 운송수단을 아예 허공에 띄움으로써 불규칙한 지표면과의 충돌과 같은 제어가 어려운 상황을 원천적으로 피하는 게 오히려 편했다.
"대기가 거의 없는 이곳에서도 비행정들이 하나같이 유선형인 사실이 재미있네."
구대는 눈 아래로 멀어져 가는 공항을 가리키면서 세 친구들에게 유쾌하게 말했다. 세레스의 밤하늘은 칠흑 같았고 무수한 별들만 쏟아질 듯했다. 비행정 안도 진공이어서 모두 우주복 차림이었지만 특별히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계기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형광이 실내 조명의 전부라서 서로의 얼굴은 윤곽만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다.
"유체역학이 의미가 없는데 구태여 겉모양에 신경쓸 필요가 없으니까."
"지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체 설계를 그냥 갖다 쓰는 거지 뭐."
"지금 우리 몸이 아무리 유체역학이 필요없는 세레스에 와 있다고 해도, 밀도가 높은 유체인 물에서 발생하고 역시 조밀한 대기에 뒤덮인 뭍에서 진화한 우리 인간들의 미적 감각은 여전히 지구에 갇혀 있다고 봐야겠지."
모두 격의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이미 친구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구대는 기뻤다. 유체역학과 미적감각은 어떨지 몰라도, 생명의 발생과 진화 투쟁의 현장인 지구에서 형성된 딱딱한 격식과 타성은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세레스까지는 미처 따라오지 못한 듯했다. 비록 황량한 추방지였지만 세레스인의 우정과 선의는 지구인의 격식보다 훨씬 더 강했다.
착륙 지점은 너비가 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피아치 분화구의 원형융기부 바닥에 뚫려 있는 한 동굴의 입구였다.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며 구대는 벌써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 먼저 드는 느낌은 그랜드캐년의 바닥에 선 그것이었다. 오른편으로 바라보는 삼각함수 탄젠트 곡선처럼 수직 방향으로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는 절벽은 수많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운석의 충돌로 녹아내린 바위 표면을 안에서 끓어올라 기화한 가스들이 밖으로 뚫고 나온 구멍들이리라. 그리고 그 구멍 가득한 탄젠트 절벽은 역시 좌우 방향으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사라지는 데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도 지평선 끝점을 중심으로 하고 대부분이 지평선 아래에 잠겨 있는, 거대한 원형 절벽을 마음에 그려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절벽 속으로 깊숙히 뚫려 있는 수백만 개의 동굴 하나하나는 거대 동그라미에서 구불거리며 바깥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촉수들로 그려졌다.
"동굴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할 말을 잃게 만드는구만."
동굴 입구는 크지 않은 대신 불규칙하게 구불텅거리며 한참을 들어갔다.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가던 동굴이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지점에 그들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동굴 안이 무지개빛으로 가득 찼다. 동굴 입구에 햇빛이 정확한 각도로 비춰든 순간이었다. 동굴 벽에 박힌 수많은 결정들이 제각기 다른 빛깔을 낸데다 세레스의 빠른 자전에 따라 시시각각 그 색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불과 일 분 혹은 몇십 초만에 빛은 사라져 버렸다.
"저 빛과 색의 모양과 조합이 동굴마다 다 다르다는 거지.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사람들은 그 엄청난 빛의 향연을 보고도 자신이 진짜로 본 게 맞는지 의심할 정도라니까. 피아치 분화구, 콧대가 꽤나 높단 말씀이야."
세레스 최초의 핵융발전소의 유적은 그 동굴 가운데 하나 속, 깊숙한 곳에 있었다. 착륙지점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궁극의 설계, 궁극의 재질이 완성되기 전에 만들어진 핵융합로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구조라서 느낌이 좋았다. 컴퓨터에게나 의미있는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여 초고속 메모리칩에 담아 놓기보다는,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넓적한 플라스틱 원반에 직접 새긴 음악 같다고 해야 할까. 피아치 분화구가 자연의 신비를 보여준다면 피아치 핵융합로는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인간의 신비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먼 옛날 지구에서 단단한 열매 깨뜨리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가진 맹수들 향해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막돌이, 소행성대 그 머나먼 곳까지 천문학적인 공간을 날아 건넌 다음, 원자핵의 초미시 세계로 파고들어가 그 안에서 초거대 에너지를 파내는 핵융합로로 진화한 현장이었다.
피아치 분화구와 핵융합로 관광을 마치고 네 사람은 윈징의 아파트에 모였다. 공동식당이 멀지 않았지만 대화가 있는 느긋한 저녁 시간을 보내기에는 역시 개인 거주공간이 안성맞춤인 탓이었다. 거기다가 요리가 취미인 윈징의 초대였으니 다들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윈징의 요리솜씨를 전혀 모르는 구대의 기쁨도 못지 않았다. 그는 식도락을 즐기느라 범죄까지 저지르고 세상 끝까지 추방당한 몸이기 때문이었다.
"고래고기가 그렇게 맛있나? 고구마도 알이 너무 굵으면 퍽퍽할 뿐 맛이 별로 없는데."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한 상 가득 요리를 뚝딱 만들어낸 윈징이 고량주를 한 잔 털어넣고 콩고기 탕수육 한 점을 집어먹으며 구대에게 물었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건강 채식! 현대인의 숙명인 채식을 마다하고 육식, 그것도 고래를 먹을 생각을 했다니 대단해."
"우리 모두 한 가지씩 가진 가슴 아픈 이야기를 왜 이 좋은 순간에 꺼내고 난리인지 모르겠군."
순야와 새미도 한 마디씩 하며 구대를 쳐다보았다. 그들도 내심 궁금한 눈치였다. 세레스에 살고 있는 천 명에게는 적어도 천 개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소행성대까지 추방해버리고 싶어하는 지구정부 공인 범죄 이야기를 다들 하나씩은 갖고 있었으니까.
"고래고기.. 난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맛이란 것은 말이지, 혀로 감지하는 게 아니야. 마음으로 느끼는 게 맛이거든. 난 고래고기를 먹은 게 아니야. 그 싱싱한 원초의 바다를 통채로 먹은 거라구."
구대는 불현듯 추방 직전의 미식가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갑자기 술 기운이 오르는 듯도 하여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했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정말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 야생 귀신고래. 그 부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마지막 남은 한 마리였다. 미식과 식도락에 대한 욕망이 죄책감을 이긴 경우였지만, 상황을 그 지경까지 끌고 간 인류 전체의 잘못을 자신이 홀로 뒤집어 썼다는 억울함 또한 없지 않았다.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고래였고 말이지."
구대는 그 말을 남기고 탁자에 엎드려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레스에서 처음 마시는 술에 완전히 취한 탓이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거대한 귀신고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꿈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들어왔던 고래고기 한 점과 귀신고래의 한 입 거리밖에 안 되는 자기자신이 뒤죽박죽이 되어 꿈속에서도 그의 미각과 성욕을 자극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새벽녘에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구대는 거실 바닥을 기어서 간신히 거실 한 가운데에 난 구멍까지 갈 수 있었다. 녹색등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구멍 가장자리에 튀어나온 고리 손잡이를 잡고 구멍 난간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아직 익숙치 않은데다가 취한 상태라 마지막 순간에 손잡이를 놓치며 아래층 벽에 굴러떨어졌다. 회전목마. 그는 아파트 아래층을 그렇게 불렀다.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아파트는 세레스층과 지구층이 위아래로 붙어있는 복층 구조였다. 세레스층은 납작한 정사각형 공간이었고 지구층은 그 정사각형에 내접한 두툼한 원통모양이었다. 원통형 지구층은 원통 내부 벽면에 지구 중력과 같은 크기의 원심력이 발생하도록 세레스층과 지구층이 연결되는 중심 통로를 회전축으로 하여 고속 회전하고 있었다. 세레스층 거실 중앙에 있는 연결 통로를 통해 수직방향으로 들어서자마자 수평방향으로 자세를 잡고 손잡이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벽면으로 내려서면' 되는 그런 구조였다. 세레스층의 수평방향과 평행인 지구층의 수직방향은 모두 회전축에서 만나기 때문에 아래층 방들은 모두 원통 내부 벽면을 따라 앞뒤로 배치되어 있었다. 침실, 부엌, 서재, 화장실이 아래층에 있기 때문에 세레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아래층에서 보내고 윗층은 그저 출입구로 쓰는 정도였다. 만약 회전체만 감지하는 레이더 같은 게 있다면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도시를 무수한 크고 작은 팽이가 돌아가는 팽이의 도시, 회전목마의 도시로 그려낼 수 있을 터였다. 초전도체와 초유동체를 전기모터와 회전축에 쓰고 핵융합 에너지로 작동되는 그 수많은 팽이와 회전목마는 그 안에 사람이 있든 없든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미식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세레스의 약한 중력에서 지구의 강한 중력으로, 직각방향으로 꺾여 굴러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구대는 다시 고래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고적미와 진화영, 그 두 인물이 꿈에 보였다.
텍사스만한 폭과 인도만한 표면적을 가진, 지구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세레스였지만 그 지하에 대서양 크기의 바다를 품고 있었다. 물론 대서양처럼 평균 깊이 약 4킬로미터로 얇게 펴져 있는 대신 지름 950킬로미터의 구체의 부피가 얼추 대서양에 담겨 있는 물의 부피와 비슷하다는 의미에서였다. 세레스의 중심에는 암석으로 된 핵이 있고 그 위에 100킬로미터 두께의 맨틀이 있는데 그 부분이 바로 물과 얼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세레스에 인간이 착륙하기 훨씬 이전부터 잘 알려졌다. 지속적이지 못하고 반짝 유행에 그치고 말았지만 우주자원개발의 효시는 세레스였고, 그 일시적인 우주개발의 기폭제가 되었던 자원은 가장 많은 물이 아니라 바로 세레스의 중심핵 부분에 주로 매장되어 있는 황금이었다. 지구상에서든 세레스에서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자원인 물이 아니라, 인간들은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으며 너무 물러서 타제석기 돌덩어리만도 못한 천하의 쓸모없는 물건인 황금이 그 엄청난 우주탐사와 유리돔 도시 건설과 백만 명의 이주의 원인이 되고 거의 두 세기 동안 해마다 십만명이 넘는 우주여행객들을 불러들인 인류의 기묘한 행태는 인간이 아니면 도대체 이해불가였다.
"인간성 발현의 다양성과 독특함을 한껏 과시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고적미 과거보존국 국장은 척 보기에도 고고학자나 인류학자의 분위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반도체 제작에 필수적인 핵심자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 수요는 지구에서 산출되는 금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황금에 집착해온 것일까요? 골드러쉬 또는 황금열병, 바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인간성을 파헤치는 핵심어 가운데 아닐까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고 국장은 질문만으로 대화를 구성하는 사람 같았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향해 쉬지 않고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내며 마르지 않는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 학자로서는 최적의 성향을 타고 난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네 사람은 인류 문명의 변방, 그 최전선까지 갑자기 찾아온 지구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을 마주하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금은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자원과 에너지 흐름을 결정하고 심지어 심각하게 왜곡까지 하는 밸브 시스템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무리 기묘해도 우리야말로 최후까지 나몰라라 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인간성의 담지자로서, 그 역사적인 현장인 세레스를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고 국장의 질문은 끝이 없어보였다.
"지구 정부는 세레스를 재개발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첫 단계로 세레스를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래야만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되니까요. 다만 오묘한 인간성 발현의 현장으로서 보존하자는 취지에 그치지 않고 유전자 다양성을 보존하는 사업과 연계시킬 참입니다."
고 국장의 질문을 듣고만 있던 유전자보존국의 진화영 국장이 말을 받았다. 조용조용한 말투인데도 말을 하는 동안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무척 열정적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네 사람은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구대로 말하자면 눈 앞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지구를 떠나오기 전 추방 판사에게 이름만 들었을 뿐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과거와 유전자의 보존과 세레스에 추방되어 있는 네 사람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아무리 해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지구 정부에서 저희 네 사람을 찾는 게 맞습니까?"
역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새미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세레스는 지구에서 멀래야 더 멀 수 없는 추방지이고 우리 네 사람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까지 추방당한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우리 여생에 지구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방문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낯선 상황입니다. 저희에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새미의 질문에 고 국장과 진 국장은 서로를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뭘 그렇게 범죄랄 것까지야!"
고 국장이 깔깔대며 웃었다.
구대는 나머지 세 사람이 각 분야에서 쟁쟁한 전문가들임을 알게 되었다. 네 사람이 세레스에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두 지구 정부의 안배였으며, 고 국장과 진 국장은 그 흥미로운, 아니 차라리 단단히 미쳤다고 해야 할 사업의 입안자들이고, 그들 네 사람은 현장 업무를 위해 배치된 실무자들이었다. 고 국장과 진 국장은 네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세레스의 바다를 샅샅이 둘러보고 지구로 돌아갔다.
세레스의 바다는 수십억 년 전 세레스가 다른 행성들과 함께 형성될 때부터 얇은 지각과 중심핵 사이에 그 원형이 만들어져 있었다. 물과 얼음으로 된 맨틀 부분은 마치 달걀 노른자와 껍질 사이를 채우고 있는 흰자 같았다. 다만 노른자를 흰자 중앙에 둥둥 뜬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알끈 대신 암석핵으로부터 뻗어올라온 수천개의 거대한 천연 기둥과 벽 구조물이 맨틀 전역에 걸쳐 골고루 분포하여 지각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수한 석회동굴의 거대 네트웍이었다. 거기에다가 황금을 찾아 멀리 멀리 소행성대까지 온 인간들은, 마치 단단한 금광석에 구멍을 뚫어가며 부석이 될 때까지 금 입자를 찾아 먹어치우는 박테리아처럼, 그 천연 기둥과 벽 구조물뿐만 아니라 중심핵까지도 온통 구멍투성이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네 사람은 다음날부터 당장 공공도서관에서 금 채굴 갱도에 관한 자료를 찾는 한편으로 세레스의 지하 바다에 내려가 직접 탐사하기 시작했다. 잠수정을 비롯한 골드러쉬 시대의 장비는 여전히 훌륭하게 작동했다. 바다에 접근하기 가장 쉬운 곳은 피아치 분화구였다. 아무도 찾지 않아서 그렇지 수천 대의 크고 작은 잠수정과 잠수함들을 정박시키고 있는, 지하 바다로 열린 항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바로 피아치 분화구 원형융기부 절벽에 뚫린 동굴 가운데 하나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곳이었다. 금 채굴과 운반을 위해 세레스 전역에 설치했던 여러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가장 훌륭한 것은 바다의 조명 시설이었다. 지구 표면에서 보는 햇빛과 똑같은 스펙트럼과 에너지를 가진 거대한 인공조명등이 기둥과 벽, 그리고 바다의 천정 또는 하늘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각 하부 암석 표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적어도 빛에 관한 한 지구의 해수면에서 칠흑의 해저까지 다 존재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온의 측면에서도 그랬다. 열대해에서 남극해에 이르는 다양한 구역이 존재했다. 세레스 지각에 존재하는 염류가 녹아들어 염도 또한 지구의 바다와 비슷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레스의 바다는 지구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맑고 깨끗했다.
"이건 뭐 숫제, 지구의 평면적인 바다를 세레스의 입체적인 바다로 재해석한 느낌이구만."
"심지어 남극해, 북극해, 적도해, 열대 바다, 산호 바다까지 없는 게 없네."
"해류와 수온의 계절적인 변화까지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것 같군."
해양학자인 윈징이 느끼는 놀라움은 다른 세 사람의 경우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맨틀층에 있는 기둥과 벽면 그리고 인공태양 조명의 배치 등을 보고 윈징은 감동하는 눈치였다. 세레스의 바다에 낮과 밤을 가져다주는 인공태양등은 핵융합발전소에서 생산되고 있는 에너지로, 그리고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도시의 조명과 함께 지구의 계절에 따른 낮과 밤의 길이로 작동되고 있었다. 그들 눈앞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바다 하나가 통채로 놓여 있었다.
세레스의 중력이 지구 중력의 3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아래로 추락하기만 하는 돌덩어리가 아닌 살아있는 바다 생물이라면, 중력은 어차피 부력으로 상쇄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거대한 물 덩어리 속에서 입체적인 궤적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에겐 약한 중력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세레스 지하에 지구의 바다 만들기. 네 사람이 고 국장과 진 국장을 통해 지구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였다. 그런데 세레스의 지하 바다는 천연 상태로 이미 지구의 바다와 유사했다. 그 크기와 물의 양은 이미 지구의 대서양을 옮겨온 듯했고, 바닷물의 염도까지 비슷했다. 세레스가 지구와 동일한 성간물질 조건 속에서 동일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지 않았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가까이에 있었던 거대한 목성의 중력 간섭이 없었다면 세레스가 주축이 된 소행성대는 틀림없이 지구의 막내 동생 격인 엄지 행성 정도가 되었을 거라고 네 사람은 마음대로 결론내렸다. 지구의 지상 바다와 세레스의 지하 바다는 그만큼 이미 비슷했다. 거기에다가 골드러쉬 시대에 설치해둔 인공태양망과 중심핵에까지 미치는 벌집 또는 개미집 갱도 구조로 인해 대양의 에너지와 광물질 수급도 얼추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땅 속에 이런 보물이 묻혀 있었는데 그것도 모른 채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셈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일세."
구대는 골드러쉬 이후 버려진 꼬마 행성 세레스의 잃어버린 백 년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이란 악마의 환영에 취해 골드러쉬로의 비상과 추방지로의 추락 사이에서 우주적인 널뛰기를 한 인류는 세레스의 진정한 가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몰라보았던 거였다.
"외딴 추방지인데다가 세레스인들의 정신세계도 황량하기 그지 없었던 때문이겠지."
"탐험대들이 몰려가는 변방과 추방자들이 내몰리는 변경은 같으면서도 다른 곳이었던 게지."
"지금이 가장 이른 때이고 여기가 가장 가까운 곳이라지 않나. 지구 정부가 이번에야말로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로 한 모양인데 잘 해보자구. 그나저나 내가 정부지지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순야의 말처럼 세레스에 불어온 새 바람은 그들 네 사람뿐만 아니라 세레스 주민 전체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내면을 잠식하고 그들의 삶을 얽어맸던 추방자의 어두운 정신세계가 개척자의 밝고 희망찬 정신세계로 일변하고 있었다. 늘 거기에 있었던 세레스란 무대, 늘 그들과 함께 했던 마음이란 요물이 한순간에 감옥에서 낙원으로 표변했다. 네 사람을 필두로 천 명의 세레스인들은 세레스 자치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구 정부의 사업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는 순야가 말한 바로 그 쑥스러움과 함께.
지구 정부 안에 구성된 세레스 복원 위원회는 충분하다며 사전조사 단계에서 실행 단계로 속히 이행하기를 원했지만, 세레스 자치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세레스란 왜행성은 지구인들에게는 몇 억 킬로미터 떨어진 '그 어딘가'일 테지만 세레스인들에게는 자신의 두발로 딛고 선 바로 그곳이었다. 여신 세레스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차이가 없을 수 없었다. 세레스 안에 지구의 바다를 만들겠다면 그것은 오염되기 이전 지구의 바다와 같은 수준이어야 했다. 인류가 망쳐놓기 전까지 수십억 년 동안 청정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의 풍요로움을 유지했던 지구의 바다는 그 자체로 완벽한 시스템이었을 터, 평면적인 지구 바다의 모든 물리적인 요소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입체적인 세레스 바다로 변환시켜 옮겨와야 했다. 전면적인 행성 테라포밍은 아닐지라도, 그리고 우주적인 규모의 대규모 사업에 지질학적인 시간까지는 투여하지 않더라도, 서두름은 금물이라는 거였다.
"지구 바다를 재현하는 데에 두 가지 빠진 게 있습니다. 바로 바닷물-대기 경계면의 존재와 해류. 현재 세레스의 바다는 빈 공간이 거의 없이 물로 가득 차있는 상태입니다. 비록 지구에서처럼 강한 중력이 붙잡아주는 열린 공간 대신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물통인 세레스의 지각 안에 담겨 있어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지표면에 노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대기와 만나게 되는 지구의 바다처럼 '우리 바다'도 당연히 공기와 만나는 경계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바다도 숨을 쉬어야겠지요. 흐르지 않는 물은 죽은 것, 우리 바다의 항상성을 위해서 순환은 필수이니, 해류는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구대를 비롯한 세레스 사두위원회가 고 국장과 진 국장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세레스 복원위원회와의 화상 회의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복안을 갖고 있나요? 진 국장과 나는 다음 단계에 무척 큰 기대를 걸고 있거든요."
고 국장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고 국장이 요구한 복안은 지구 정부 세레스 복원위원회가 이미 갖고 있었다.
"천혜의 항구가 정말로 존재하는군. 숲속 나무가 나무꾼에게 도끼자루를 완성품으로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거야말로 세레스의 바다가 우리 인류에게 보내는 초대장이 아니면 무엇이겠냔 말이지. 이건 꽉 찬 바다에 물 반 공기 반의 해변까지 갖춘 대양을 통째로 내장한 채 은하수를 횡단하는 거대한 우주선 같은 걸."
시스템 공학자 순야가 그려내는 그림은 그럴싸했다. 인류가 도착하기 전 세레스의 지하 바다는 빈 공간 하나 없이 꽉 차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골드러쉬로 몰려온 연인원 수백만의 인간들이 이백 년 동안 살면서 소비한 물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계산해보기 전엔 알 수 없겠지만, 바다의 천정을 구성하고 있는 지각은 물론이고 맨틀에 있는 기둥과 벽 구조물, 그리고 중심핵에 있는 암석과 물이 만나는 경계면에는 빈 공간이 적지 않았다.
"수백만 명의 인간이 마신 물도 물이지만, 수만 대의 로켓이 마셔댄 물도 무시할 수는 없을 거야. 인간뿐 아니라 로켓도 물을 마신다니, 대단한 통찰 아닌가?"
순야의 유쾌한 발상이었다. 에너지만 공급되면 물은 산소와 수소로 얼마든지 전기분해가 가능했고 그렇게 얻은 산소와 수소는 바로 로켓의 연료가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세레스 지하 공간과 물이 처음부터 적당한 부피 차이를 갖도록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낫겠네. 지구라는 우주의 한 구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세레스라는 다른 한쪽 구석에서 되풀이되지 말란 법은 없겠지. 물이 모여들어 바다가 되는 이치는 지구에서도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도 그리고 이곳 세레스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 바깥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광대하고 스스로 닫혀 있는 이 우주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야."
해양학자 윈징의 말이었다. 잠수정은 피아치에서 멀지 않은 곳, 바닷물에게는 천정이 되는 두툼한 지각의 거대한 암반 속에 호로병을 거꾸로 박아둔 것처럼 빈 공간이 들어가 있었다. 세레스가 불의 공이었을 수억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 피아치 분화구를 파낸 운석과의 충돌 과정에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래쪽 대양으로 열린 호로병 주둥이에 해당하는 구멍은 초대형 잠수함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컸고 태양계 최대의 항구로서 손색이 없는 드넓은 호로병 내부는 절반쯤만 바닷물로 채워져 있었다. 호로병 수직 내벽에서 안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절반쯤 잠겨 있는 선반 모양의 수평 암벽은 선박 접안 시설로서 손색이 없었다.
"신께서는 항구의 설계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군. 아니, 항구를 항구로 쓸 인간까지 한 벌로 창조했다고 해야 할까."
순야가 말했다.
"인공태양등이 하나 있을 법한데 없는 걸 보면 골드러쉬 때에도 발견되지 않은 구조였던 모양이야. 지구 정부가 이곳을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지진파 탐사 자료에 들어 있었는데 그때는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 했을 수도 있겠고. 금의 광맥 방향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네."
구대도 잠수정의 탐사등에 드러나고 있는 태고적 우주 호로병 내부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새미, 어떻게 생각해? 인공태양등을 설치하면 어떨까?"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종석 한켠에 앉아 있는 새미를 돌아보며 구대가 물었다.
"세레스에 지구의 바다를 만든다고 했는데, 그 복원 대상에 지구 바다의 동식물 생태계도 포함되겠지?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나? 뭍 짐승인 우리 인간도 복원 대상에 포함해야 하나?"
새미의 말에 모두 궁금증이 갑자기 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지구 정부와의 화상 회의에서 다룰 주제가 하나 더 생긴 순간이었다.
바다 생태계의 이식은 크기가 작고 숫자가 많은 종에서 크고 적은 종으로, 식물에서 동물로, 먹이동물에서 포식동물로의 순서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세레스 지하 바다를 채우고 있는 거대한 물덩어리 구석구석에 각종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그리고 식물성 플랑크톤과 동물성 플랑크톤을 비롯한 미생물들로 보이지 않는 해양 생태계의 토대를 깔고, 바닷물과 접촉하는 지하 바다의 내벽과 맨틀 기둥과 벽 구조물 그리고 중심핵까지 인공태양등의 빛이 닿는 표면이란 표면에는 모두 갈조류, 홍조류, 녹조류 등 색색형형의 해조류로 도배를 마치고, 무척추 동물에 이어 마지막으로 어류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각종 염류, 미네랄과 같은 광물질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수정처럼 맑기만 했던 세레스의 100퍼센트 무기질 바다를 1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물방울에도 수십 수백에 달하는 무수한 플랑크톤이 순식간에 점령해 나갔다. 생명이 살 수 없도록 지나치게 맑았던 세레스 지하 바다가 토종 광물질, 핵융합로로 켠 인공햇빛, 그리고 머나먼 지구별에서 침공한 녹색 외계인인 미생물들이 만나, 5억 년 전 지구에서 일어났다는 캄브리아기 대폭발 부럽지 않은 생명력의 빅뱅을 세레스 현세에서 일으킨 셈이었다.
"천지창조가 따로 없군. 이거야말로 세레스판 창세기일세."
조종간을 잡고 있는 순야가 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플랑크톤만큼은 아니지만 수많은 전기 잠수정들이 세레스의 바다 속을 종횡과 수직을 가리지 않고 입체적으로 누비고 다녔다. 수온과 광물질 조성이 다른 해역에 따라 다른 미생물을 뿌리고 얼마나 잘 크는지 둘러보고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한 잠수, 축축한 우주비행이었다. 물론 그 광대한 바다 속을 유인 잠수정이 다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주먹만한 크기의 작은 무인 수중 드론 수백만 대가 지하 바다를 1입방미터를 단위로 하는 촘촘한 격자로 나누어 조직적이고 유기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지하 바다에 투입되는 잠수정과 수중 드론을 포함한 모든 인공물은 전기로 작동하여 어떠한 오염물질도 배출하지 않도록 할 것. 나사 하나까지 고유번호를 부여하여 유실되지 않도록 할 것. 생분해성 바이오 플라스틱 이외의 모든 플라스틱 수입 금지. 미세먼지 발생 금지."
평소 자기 주장이 별로 없는 새미가 보기드물게 전투적인 열정으로 세레스 자치정부 의회에서 통과시킨 법 조항 몇 가지였다. 한 마디로 세레스 지하 바다에서 인간의 흔적은 최소화, 극소화 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지구 바다 꼴 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위기의식의 반영이었다.
"지구에서든 세레스에서든 제일 위험한 오염물질은 뭔지 알아? 바로 우리 인간들이야."
"수호신은 못 될 망정 최소한 오염물질은 되지 말아야지. 태양계 최고의 오염원, 어떡하지?"
새미의 어록에 수록된 말들이었다.
엔진을 멈춘 잠수정은 해류를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중심핵쪽으로 잠수하고 있는 다른 잠수정 한 대가 수중 레이더 화면에 잡혔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세레스 바다 속 미생물만은 아니었다. 태양계에서 가장 번잡한 우주공항이 되어버린 티티우스-보데 우주공항에 착륙하는 우주선에 가장 많이 실려오는 화물은 바로 인간이었다.
세레스 바다에 이식할 바이러스, 박테리아, 플랑크톤 등 미생물은 화물로 쳤을 때 그렇게 많은 부피를 차지하지 않았다. 화약의 폭발력에 결코 밀리지 않는 폭발력을 갖춘 미생물은 불과 몇 줌의 양만으로도 세레스의 지하 바다를 꽉 채울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씨앗 한 줌으로 커다란 숲을 조성하고 불씨 하나로 산 하나를 태워버리고, 한 가닥의 곰팡이가 커다란 메주덩이를 먹어치우는 것처럼.
어쨌든 미생물에 비할 수 없는 긴 번식 주기를 가진 인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실어나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관광객이 아닌 이주민들이었다. 세레스는 향후 30년 안에 백만 명의 인구를 회복하리라고 전망되었다.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도시는 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이미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인구팽창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제2의 골드러쉬가 되는 것은 아닐지, 그게 겁나. 국 끓여 먹을 수도 없는 황금을 쫓아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났던 1차 골드러쉬의 허망함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야."
"지구 정부가 갑자기 저렇게 나오니, 이번에 쫓는 황금은 무슨 색깔일까 궁금해지거든."
새미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세레스 자치 의회에서 의정 활동을 열성적으로 해내고 있는 새미의 숨겨진 원동력이기도 했다.
"지구 정부의 숨은 의도? 하하하. 그런 것은 없어요. 우주개발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요? 세레스의 성공적인 식민은 태양계 전체적으로 이주를 앞둔 인류의 훌륭한 경험과 자신이 될 거에요. 지구가 회복불가능하게 오염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테고요."
화상 회의로도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고 국장의 감정선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 인류는 잘 해낼 수 있겠지요. 세레스의 지하 바다에 없던 해류까지 만들어낼 정도의 실력은 되니까요. 안 그래요?"
고 국장의 말대로 해류를 일으키는 장치는 압권이었다. 9시간 4분만에 한번 자전하는 세레스가 지하 바닷물에 자력으로 지속적인 대규모 흐름인 해류를 만들기는 역부족이었다. 에너지 자체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지각을 떠받치고 있는 맨틀, 즉 바다를 조각조각 나누는 기둥과 벽 구조물들이 일으키는 저항 때문에 바다 전체를 따라 돌면서 흐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는 구조였다. 해법은 그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추가 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요소요소에 대규모도 아닌 중소형 펌프를 설치하는 것이 다였다. 펌프의 정확한 위치와 출력은 슈퍼컴퓨터의 대규모 모의실험으로 미세 조정되었다. 그 펌프들은 정교하게 연계된, 각기 다른 주기로 맥동하듯 물의 흐름을 일으켰고 그렇게 장기간 축적된 작은 흐름들의 에너지는 지하 바다 전체에 공명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마침내 지속적인 해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최상층 해류는 폭이 수백 킬로미터, 두께는 수 킬로미터에 달했으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폭이 점점 줄어들면서 열 개가 넘는 하위층을 구성하였다. 그 층들은 수온과 광물질이 다르게 조성됨으로써 지구 바다의 연해와 심해는 물론이고 열대, 온대, 한대, 극지방의 환경을 재현하도록 했다.
항성간 우주 유인탐사를 위해 개발된 인체 냉동보존 기술을 먼저 적용받는 호사를 누린 크릴과 새우와 같은 무척추 동물과 크고 작은 각종 물고기들이 처음 이식된 날은 세레스 최대의 축제가 열린 날이 되었다. 지하 바다 각 해류 층에 맞게 방생된 새우와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노니는 모습은 수중 드론이 촬영한 동영상으로 세레스는 물론 지구에까지 실시간 방영되었다.
세레스의 하루는 지구시간으로 불과 9시간 4분, 짧기로는 태양계 장원감이었다. 공전주기는 4.6년, 55개월쯤이었다. 세레스의 하루로 세레스의 한 해를 보내는 것은 그 빠른 회전으로 인해 지구의 하루와 한 해에 비해 많이 어지럽다고 해야 할까. 구대, 새미, 윈징, 순야 네 사람의 일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지하 바다와 티티우스-보데 유리돔 도시 만큼이라 정신없이 알차게 채워지고 있었다. 세레스 시계로 육년 반이 훌쩍 지나가는 중이었는데도 그들의 정신만은 점점 싱싱해졌다.
"네 분께 세레스 바다 복원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선물을 오늘 보냈어요. 한 달 뒤에 받아보시겠지요. 이번에는 선물 포장이 좀 크네요."
진중하기만 했던 진 국장의 흥분한 얼굴이 화면 가득 찼다.
"특히 새미에게! 구대에겐 좀 조심스럽기는 하네.. 하하하."
그의 사전에 항목이 아예 없을 것만 같은 웃음 소리까지 더해졌다. 그 특별하다는 선물에 대한 네 사람의 궁금증은 진 국장의 의외의 모습에 더욱 증폭되었다. 구대는 어리둥절 표정이었고, 새미만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구에서는 항공모함 크기의 우주선이 우주 엘리베이터로 궤도에 올려지는 광경이 뉴스로 송출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바다에 나가는 네 사람이었지만, 첫 10년 이후에는 한 잠수정에 타는 경우는 연례 행사쯤으로 많지 않았다. 너무 맑기만 한 죽은 물덩어리에서 생명으로 가득 찬 지구의 바다로 바꾸는 동안 세레스의 바다는 그들 각각에겐 삶의 현장을 넘어 삶 그 자체, 그들 존재의 일부가 되어 버린 탓에 그들은 주로 홀로 바다에서 떠돌기를 좋아했다. 세레스의 지하 바다는 자신의 두개골 안쪽, 정신적인 내면을 몸밖으로 투사한 입체 영상 같다고 구대는 생각했다.
"세레스의 지각은 내 두개골, 그 안에 담긴 바다는 나의 뇌, 나는 평생 그 신비로운 의식의 바다 속을 유영하는 한 마리의 은어."
"바닷물에 꽉 차 있는 저 무수한 미생물과 물고기들은 그대의 뇌를 구성하고 있는 뉴런, 신경 세포가 되겠구만."
구대의 읊조림에 순야가 화답했다. 오랜만에 단체로 바다에 나온 탓이기도 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그들은 많이 들떠 있었다. 잠수정은 수중 레이더 화면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뚜렷한 점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점 주변에 있는 이 뿌옇게 흐린 부분은 무엇일까? 큰 점을 따라가는 작은 점들 같기도 하고 큰 물감 덩어리에서 조금색 색이 번져나오는 것도 같고 말이지."
윈징이 레이더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거의 다 따라잡았는데 맨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알 수밖에 없겠지 뭐."
구대는 자동 항법장치를 해체하고 조종간을 잡았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고?"
"30년 전 팔팔했던 기억은 그냥 추억으로 남겨두라구."
"아무리 선물이 궁금하다고 그럴 것까지야!"
나머지 세 사람은 일부러 구대 들으라고 한 마디씩 했다.
레이더 화면 윗부분에 그들이 발견했던 피아치 항구의 모습이 떳고, 레이더 화면에서 흐릿한 녹색 궤적을 이끌며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는 그 점은 이제 똑바로 항구의 입구쪽을 향했다. 그리고 항구의 좁은 호리병 입구에서 잠시 멈추어 주변이라고 둘러보는듯 한 바퀴를 빙글 돌고 나더니 드디어 항구 안으로 들어갔다.
"통발에 든 물고기! 30년 동안 뒤쫓던 놈을 드디어 잡게 되었군."
순야가 계기판 모퉁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그때까지 어둑하던 잠수정 전면 유리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수정도 항구로 들어선 것이었다. 눈이 부셔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점이 사라졌어!"
모두 레이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을 그곳까지 이끌고 왔던 녹색 점이 화면에 없었다.
"다시 나타났네."
전면 유리창에는 온통 물거품만 가득할 뿐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수정이 수면으로 부상하고 나서도 잠시 흐릿하던 유리창이 맑아지고서야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네 사람은 기밀문을 열고 나가 함교에 오른 그들의 눈앞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항구 가득 고래가 뛰놀고 있었다. 물 밖으로 솟구치는 고래의 그 육중한 몸매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잠수정 코 앞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고래가 솟구쳤다. 가까운 거리, 집채만한 압도적인 크기, 게다가 세레스의 약한 중력 때문에, 물밖으로 솟구친 그 거대한 고래는 허공으로 까마득히 뛰어올라 허공에 한참 머물다가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물 속으로 떨어져 내려 사라지는 그 전 과정이 마치 한 편의 느린 영화 같아 보였다.
"귀신고래다! 귀신고래야!"
고래 생태학자 새미는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호리병 항구에 갇힌 고래의 노래가 허공 가득, 세레스 지하 바다 전체 물덩어리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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