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여자친구와 크게 다투었다.
조국 전 민정수석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보는 방향만이 정면임을
철썩같이 믿으며 서로를 비난했다.
가시 돋은 말들이 사납게 오갔다.
지금껏 만나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여자친구는
심지가 꺼진 촛불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말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더니
말없이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말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자 슬슬 흥분도 가라앉아
내가 했던 행동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뭐가 더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데 전화를 받은 여자친구가
지금 자신은 휴가를 내고 부산에 와 있다는 거다.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일을 도와준다며.
그녀는,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으로 스며드는
한밤중의 겨울바람처럼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로
“당분간 떨어져 있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점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당분간이 며칠을 말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겨우 서점 이름만 알아낸 채로
부랴부랴 열차표를 끊고 부산으로 향했다.
여자친구가 일한다는 서점 이름은 ‘야행’이었다.
나는 부산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검색해 보았다.
그곳은 시내에서 떨어진 변두리 산자락에 있었다.
택시를 타고도 한참을 헤매다가 내려서
고지대로 향하는 급한 언덕길을 올라야 했다.
얼마나 가파른지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어렵게 마주한 서점은 마치 폐가 같은 모습이었다.
스무 평 남짓한 파란 기와지붕의 단독주택으로
뿌연 유리문 옆에 ‘야행’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발밑에는 무너져 내린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고
백설공주가 먹다버린 사과처럼 바싹 마른 화분이
현관 앞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슴푸레한 복도와 계단이 보였지만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
동굴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듯했다.
이런 곳에 여자친구가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며 “계세요?” 하고 불러보았다.
깊은 연못에 돌멩이를 툭 던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계단 뒤 어둠 속에서 “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낯익은 얼굴이 계단 중간쯤에 나타났다.
여자친구였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 하더니 물었다.
“누구세요?”
여자와 나는 현관 앞에서 한참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말투가 묘하게 낯설었다.
여자친구와는 확실히 달랐지만,
(얼굴에 점이 있는 것만 빼면)
두 사람은 쌍둥이 자매가 아닌가 싶을 만큼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게다가 이 서점은 이제 운영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난주에 문을 닫았다”고 여자는 말했다.
책을 워낙 좋아해서 무작정 시작했는데
유동인구가 없어 매출이 별로였던 모양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무슨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싶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응답만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미안하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여자가 내 팔을 붙들더니 말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라도 하면 어떻겠냐고.
팔던 책이 아직 잔뜩 남아 있다면서.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모습이 여자친구와 똑같았다.
어, 어, 하다가 나는 서점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여자는 세 권의 책을 꺼내 오더니 죽 늘어놓았다.
그 책을 마주한 나는, 월급이 입금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카드값으로 빠져나간 통장을
확인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출간된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지난주에 마지막으로 입고했다며 말했다.
“이 책은 맨해튼의 명물 ‘미스터리 서점’을 만든 출판업자이며
에드거 상을 받은 걸출한 에디터인
오토 펜즐러가 기획한 최고의 크리스마스 앤솔로지예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내가 만든 책을 여기서 마주할 줄이야.
바로 그때.
그녀의 별 쓸따리없이 자세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여자친구로부터 기다리던 문자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기야, 이 사진 좀 봐.
초대 공수처장님이래.
처음 보는 분이지만 무척 신뢰가 가!
고민 끝에 나도 생각을 바꿨어.
토요일 아침 기차로 올라갈게.”
나는 서점 여자에게 인사하고
가파른 언덕을 천천히 내려오며
여자친구가 보내준 사진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근데 두 사람이 닮긴 많이 닮았네.
아까 그 여자와 여자친구만큼이나.
언덕을 다 내려오니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이 살랑, 분다.
나는 문자 창을 열고 답장을 적었다.
“고맙고 미안해. 곧 만나."
보고 싶네,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