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우리는 우리땅 독도 지키기에 나섰다.
노래를 만들고 독도기금도 마련하고...
어디서나 독도를 향한 국민들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독도어부 200명이 미군비행기에 폭격당해 죽었다는 것은 없었다.
미군이 그것도 일본에 있는 주일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다.
어부들이 미역을 채취하는 것도 아랑곳않고
독도를 향해 어부들을 향해 포탄과 기총사격을 해 댔던 미군...
비행기의 광학렌즈로 불과 몇 백 미터 아래에 있는 배가 바위로 보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변명을 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200여명의 어부들을 모두 마약운송선의 범죄자로 몰았었다.
그것도 일주일의 부인 끝에 나온 미군의 자백이었다.
미군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직도 독도에는 그 때의 포탄이 남아있다.
그리고 바다에는 죽음조차 부정당한 200여명의 어부들이 있다.
독도를 지킨다는 것은
우리땅 독도의 역사를 우리가 바로 세운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바로 역사 속에 파묻힌 미군의 독도 폭격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일 것이다.
[포커스]독도폭격사건 잠에서 깨어났다
[뉴스메이커 2005-06-10 09:54]
시민단체 등 대규모 위령제 개최… 정부측에 진상조사·피해보상 촉구 계획
세월의 먼지를 켜켜이 뒤덮은 채 잠자고 있던 비극의 역사, 독도폭격 사건이 또다시 쟁점이 될 듯하다. 독도폭격 사건이란 1948년 6월 8일 독도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울릉도 및 강원도 어부들이 미 공군기의 폭격에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이예균 회장)과 한국외국어대 역사동아리 독도연구회는 6월 8일 독도에서 독도폭격 사건 희생자를 위한 대규모 위령제를 개최한 뒤 정부측에 진상조사와 피해보상을 강력히 촉구할 계획이다.
위령제를 위해 두 단체 회원 40명은 이미 독도 입도 허가를 받아놓은 상황이며 만약 독도 입도가 여의치 않을 경우 인근 울릉도에서라도 행사를 강행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행사 관계자는 “위령제를 위해 무속인과 함께 독도에 갈 예정이며 위령제를 지낸 뒤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성명서 낭독을 통해 본격적으로 정부를 압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공군 폭격 어민 200명가량 사망
이들 단체에 따르면 1948년 벌어진 독도폭격 사건은 어선 82척에 나누어 타고 있던 어민 200명가량이 오키나와 주둔 미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숨지고 3명이 간신히 살아 남은 비극. 하지만 지금껏 피해보상은 커녕 진상조사를 위한 정부측의 변변한 노력도 없어 유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건 이후 미 군정은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폭격사실 등을 부인하다 미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 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고 발표했다. 미군정 당국은 또 소청위원회를 구성, 울릉도와 독도에서 피해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배상을 완료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상내용은 물론 독도를 연습지역으로 지정한 경위와 사고에 따른 내부 처벌여부에 대한 내용은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 정부 차원에서 진상과 피해조사에 나선 적도 없다.
이번에 위령제를 기획한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의 이예균 회장은 “당시 독도 서도 부근에서 미역 등을 채취하던 어선 82척 가운데 단 2척이 만신창이가 돼 돌아온 비극적 사건이었는데, 사건 직후 지금까지 정부측의 책임있는 말은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95년부터 당시 폭격에서 살아남은 장학상씨(1996년 6월 사망)와 공두업씨(1996년 3월 사망)의 증언을 바탕으로 독도폭격 사건을 조사해왔다”고 밝혔다.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과 독도연구회 회원들에게 1995년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폭격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공씨의 녹취록에는 끔찍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담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사 관계자들이 전한 공씨 녹취록 요지.
“48년 6월 8일 미역을 따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동료 2명과 독도 서도 물골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식사준비를 했다. 당시 서도 앞에서는 모두 32척의 배가 미역을 채취하고 있었다. 오전 11시에서 정오 사이 갑자기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비명소리가 바다 위를 뒤덮었다. 우리가 있던 동굴에도 폭탄 세 개가 떨어져 동굴 중간이 무너졌고 돌무더기가 쏟아져내리면서 동료들이 쓰러졌다. 서도쪽 배들은 모두 침몰했다. 일부 어부들이 폭격이 시작되자 태극기를 흔들며 도망가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장학상씨, 그리고 또다른 생존자 하재선씨와 함께 울릉도 도동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는 150명에서 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제2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인가
폭격 당시 동도쪽에서 채취한 미역을 말리고 있던 장학상씨의 증언도 공씨와 유사하다. 장씨는 녹취록에서 “미역을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울릉도 방향에서 10여대의 폭격기가 2개 편대로 나누어 서도의 물골부터 시작해 동도쪽으로 융단폭격을 해왔다”면서 “폭격기가 퍼붓는 폭탄들로 거대한 물기둥이 생기고 사람들과 파편이 하늘로 치솟는가 하면 바다에는 죽은 어부들과 바닷고기들로 핏빛이었다”고 증언했다.
장씨는 또 “당시 서도에는 30여척, 동도에는 50여척의 배가 있었는데 미역 채취에는 배 한척에 최소 2명이 필요하므로 적어도 150여명이 현장에 있었던 셈”이라면서 “1달 가량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미국인들이 찾아와 병세를 물었지만 보상은 없었다”라고 전했다.
녹취작업에 참여했던 이예균 회장은 “당시 독도에서 조업중이던 어부들 대다수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출항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미 군정 당시의 공식문서 확인이 어려운 것은 물론 현재 생존자도 없어 조사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과 독도연구회가 위령제를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입도허가가 걸림돌이었다. 독도에 입도하려면 먼저 삼봉호와 한겨레호 등 독도를 오가는 여객선 운항사에 간략한 신상과 방문목적을 알려야 한다. 여객선사는 이 명단을 울릉군청에 제출하는데, 이때 울릉군에서는 단순한 관광목적의 독도 방문자에 대해서는 곧바로 입도허가를 내준다. 단 취재·행사·학술조사 등의 목적으로 독도에 들어가려는 사람에 대해서는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선택적으로 입도를 허가한다.
행사 관계자는 “애당초 울릉군청 등에서는 최근 일본과의 해상충돌 등을 고려해 위령제 명목이라면 입도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다행히 현재는 독도에 상륙하는 것이 허락된 상황이지만 행사가 무사히 치러질지 아직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독도폭격 사건은 단순히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비극이므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과 같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차근차근 접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