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요유 가입하고 초창기(2011~2012)년 정도에 계피가 좋아님 공포글을 재밌게 읽고 아직도 기억에 남아서 재업로드를 한번 해볼까합니다.
영철은 상덕 고등학교쪽으로 길게 뻗은 좁다란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이따금씩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발소, 분식집, 문방구 등은 16년이 지난 지금에도 간판만 조금 바뀌었을 뿐 옛날 그 모양 그대로였는데 다만 사정 없는 세월이 그것들을 더욱 더 먼 과거로 밀어버려 점점 쇠락해 보이게 하는 듯 했다. 그 건물들 너머 길 한쪽에는 ‘축 구월 6동 재개발 사업 승인 인가 확정’이라는 플랭카드가 군데 군데 때가 묻고 찢겨진 채 가을 바람에 쓸쓸히 나부끼고 있었다. 영철은 평생 이곳을 다시 찾아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시 올수도 없었고 와서도 안되는 곳이라 여겼다. 그런데도 영철은 지금 이곳을 걷고 있다. 몇 개월전부터 기도를 올리면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에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양심을 일깨우는 환청처럼 들렸었는데 이제는 하느님이 귓가에 직접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하느님은 이곳으로 무조건 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의 죄를 사하겠다라고도 약속하셨다. 그러나 영철은 매번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 하지만 기도를 드릴때마다 주님의 음성은 더욱 커져갔고 나중엔 왜 가지 못하느냐, 네가 나의 말을 거역할 셈이냐, 정녕 지옥불로 떨어지기를 원하느냐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래... 용서를 빌어야 해. 늦었지만 용서를...’ 오후 다섯시가 넘어서 수업이 끝난지 한참 지났을텐데도 아직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분식집앞에서 오뎅을 먹고 있거나 게임방앞에서 잡담들을 나누고 있었다. 영철은 그 학생들의 모습에서 옛날의 자신을 보았지만 그때의 그 기억이 송곳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다. ‘하느님, 부디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어느새 골목길의 끝에 다다른 그는 열려진 교문 사이로 흰색 화강암의 5층짜리 학교를 올려다 보았다. 예전에는 그냥 볼품없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었는데 최근에 외장을 다시 새로 한 것 같았다. 영철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교문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광활해보였던 운동장이 집 앞마당처럼 한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는데도 동네 꼬마애들 몇 명이 서로 패스하라고 소리 지르며 축구를 하고 있었다. 영철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잠시 서서 학교 전경을 다시 바라보고는 건물쪽으로 걸어갔다. 영철은 잠겨있겠지하고 무심코 정문의 문고리를 잡아 당겼는데 뜻밖에 문이 쉽게 열렸다. 멈칫하고 잠시 서서 누가 있는지 안쪽을 힐끔 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가 문을 닫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꼬마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뚝 끊기고 쥐죽은듯한 고요함이 밀려왔다. 영철은 개교 10주년 기념이라고 써있는 큰 거울을 지나 계단으로 곧장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며 눈시울이 점점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영철은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공부하던 1학년 2반 교실을 찾았다. 기억으로는 5층 복도 맨 끝에서 두 번째 교실이었다. 5층에 와 복도를 걸으며 창문으로 다른 반 교실들을 들여다보니 교실안은 옛날 그대로였다. 책상같은 것은 당연히 바뀌었을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도 옛날 나무 책상과 걸상 그대로였다. 영철은 금방이라도 옛날 급우들이 뒤에서 영철아! 하고 부를것만 같았다. 몇 개 교실을 더 지나 영철은 자신이 17년전의 1년을 보냈던 그 교실앞에 도착했다. 영철은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되뇌었다. 조심스럽게 미닫이 문을 열었다. 옛날에는 칠판지우개를 문위에 끼워놓았다가 만만한 선생님들중 한명을 순식간에 백발의 신사로 만들어버리곤 했었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면서 위를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학생들이 수업이 끝난 후 열심히 청소를 해놨는지 교실은 깨끗했다. 칠판도 분필가루 하나 없이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고 맨 뒤 게시판에는 남자학교임에도 여자같이 앙증 맞은 글씨로 ‘모두가 행복해질 때까지는 아무도 완전히 행복해질 수는 없다. H.스펜서’ 등의 명언 등이 써져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운동장 쪽으로 나있는 창문쪽을 보니 10월 들어 이제 완연한 가을이라 일곱시가 채 안됬을텐데도 벌써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축구하던 아이들은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갈 채비를 하는 듯이 보였다. 영철은 교실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자기 자리였던 곳으로 짐작되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때는 걸상이 너무 커서 발이 안 닿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엉덩이 걸치기 조차 불편할 정도로 작았다. 영철이 하느님을 만나고 마음의 안식을 어느 정도 얻은 후부터 살이 조금씩 찐 것도 의자가 잘 맞지 않는 원인중의 하나였다. 그는 낮은 책상에 엎드리다시피 팔꿈치를 대고 기대어 두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느님 아버지, 오늘 주님의 인도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때 교실의 스피커에서 옛날에 수없이 들었던 수업 시작을 알리는 멜로디가 점점 무거워져가고 있는 학교의 정적을 깼다. 영철은 기도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복도쪽에서 한꺼번에 수십명이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들이 귓전을 때렸다. 무슨일인가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교실문이 드르륵 열리며 수십명의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들이 급하다는 듯이 서로 밀치며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모두 저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고 앉는 동시에 숨을 고르고 얌전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영철이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을 때 열린 앞문으로 선생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들어왔다. 콜록 대던 한 학생이 기침을 멈추자 잠시 소란했던 교실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보충수업인가?’ 영철이 얼른 나가야겠다고 좁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뺄려고 할때에 기껏해야 20대 중반쯤 되보이는 여자가 외쳤다. “출석을 부르겠어요! 모두 앉아요!” 영철은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박호석!” “예!” “오민호!” “예!” “장정수!” “예!” 영철은 이상한 어른이 고등학교 교실 한가운데 떡하니 앉아있는데도 선생이나 학생들이나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말을 걸지 않는 것을 희한하게 여기며 다시 슬금슬금 일어날 채비를 했다. “김영철!” 영철은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앞을 쳐다보았다. “김영철!” 여선생은 더 크게 이름을 불렀다. 영철은 혹시 자기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처럼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김영처얼!” 여선생은 가느다랗고 하얀 긴목에 파란 심줄이 돋아날정도로 크게 외쳤다. 그래도 아무 응답이 없자 여선생은 출석부를 꽝하고 교탁위에 집어던지듯이 내려놓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김영철이 앉아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김영철은 얼굴이 새빨개진채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김영철! 왜 대답을 안하지!” “죄..죄송합니다. 제가 수업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금 나가겠습니다!” 영철이 반쯤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짝!” 영철은 하마터면 휘청거리다 넘어질뻔 했다. 여선생이 영철의 따귀를 있는 힘껏 때린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빨갛게 부어오른 뺨만 문지르고 있는 영철을 여선생은 한껏 노려보고는 몸을 훽 돌려 다시 교탁쪽으로 돌아갔다. 영철은 다시 뭔가 말하려 했지만 왠일인지 뺨을 맞으면서 혀까지 다쳤는지 발음이 전혀 되지를 않았다. 학생들은 늘상 벌어지는 일을 보는것 마냥 다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영철이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미처 생각도 하기 전에 여선생이 주목하라는 뜻으로 교탁을 세 번 두드리고는 말했다. “자 출석은 아무 이상 없고 오늘 시험은 아주 중요한 시험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보길 바래요.” 어느새 교탁위에는 하얀 시험지 뭉치가 놓여있었다. 여선생은 그걸 어림잡아 5등분으로 나누어 앞줄에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한 뭉치씩 나누어주었다. “제한된 시간은 50분입니다. 이미 어제 말한대로 70점 이상이면 통과, 그 밑이면 각오해요.” 학생들은 마치 훈련된 군인들처럼 신속하게 시험지 뭉치에서 자기 시험지를 뺀 다음 나머지 시험지들을 뒤로 돌렸다. 영철도 한 장을 빼고 뒤로 돌렸다. 지금은 학생들의 시험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이 시작되면 여선생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나가던지, 아니면 조금 전 다짜고짜 자신의 뺨을 때린 걸로 봐서는 히스테리가 굉장히 심한 여자일 수도 있으니 그냥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울렸다. 30여장의 시험지가 동시에 펼쳐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교실안은 물을 끼얹은듯이 조용해졌다. 영철은 시험지를 펼치는 대신 여선생쪽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철은 그냥 몰래 나가는 쪽을 택하고 조심스럽게 걸상을 뒤로 뺐다. “나보고 또 시험을 보라고! 내가 시험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한 사람이야. 이게 뭔 장난이야!” 난데없는 큰소리에 영철은 일어서다 말고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맨 뒤 창가 구석에서 한 남자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교복 대신 기름때가 묻은 청바지에 허름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더 중요한 건 남자가 영철과 비슷한 또래인 30대 중반쯤 되는 나이로 보였다는 점이다. 영철은 자기랑 똑같은 입장을 가진 남자가 있다는게 반가왔다. 눈을 마주칠려고 했지만 그 남자는 영철쪽은 못본척 하고 계속 여선생에게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항의를 하고 있었다. 여선생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손짓으로 그 남자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영철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얼굴을 보니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야 이년아!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시험이야.” 여선생은 남자 말투가 재밌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교탁 밑에서 30센티미터짜리 자를 꺼내 남자에게 손바닥을 대라는 몸짓을 했다. 남자는 자를 보자 옛날 학창 시절의 추억이라도 생각났는지 화난 인상을 피고는 키득거리며 한번 때려보라는 듯이 손바닥을 얌전히 여선생앞으로 내밀었다. 여선생은 자를 위로 쳐들면서 직각으로 자를 세웠다. 자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남자는 이미 계획한 듯 손바닥을 얼른 뒤로 뺐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 자는 남자의 열손가락 맨 안쪽 마디 중간을 정확하게 자르고 지나갔다. 남자는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다. 잘라진 손가락들은 교탁 주변으로 흩어졌고 그중 집게 손가락 한개가 맨 앞 자리 학생의 책상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학생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사내의 손가락을 자기의 손가락으로 튕겨버리고 시험문제를 푸는데만 전념했다. 영철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혀가 계속 마비되어 꺼꺼하는 기묘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여선생은 피묻은 자를 위로 들어 흔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자의 한쪽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갈아져 있었다. 손가락이 잘린 남자는 눈코입 모두 콧물과 눈물로 범벅된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더니 여선생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턱짓을 하자 고양이 울음소리같은 나지막한 신음만 내면서 얌전히 자기 자리로 다시 들어가 앉았다. 영철은 그 남자가 지나갈 때 다시 한번 얼굴을 유심히 살폈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영철은 이제 여선생이 미쳤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미친 정도를 넘어서 눈깜짝 안하고 사람을 죽일수 있을 정도로 잔인한것 같았다. 단정하게 빗은 단발머리, 촉촉한 눈망울 등을 봐서는 도무지 조금전 그녀의 행위가 믿기지가 않았다. 영철은 마음속으로 주님에게 저 여자를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40분 남았습니다.” 여선생이 손목시계를 보고 말했다. 방금전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여기 학생들은 시험문제를 푸느라 얼굴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 교실에 있는 학생 전부가 정상이 아닌것 같다’ 영철은 혹시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영철은 시험이 끝날때까지 그냥 잠자코 기다려보기로 했다. “30분 남았습니다” 영철은 시간도 빨리 보낼겸 시험지를 펼쳐보았다.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보던 시험지하고 종이질이나 인쇄한 모양 등이 비슷했다. 과목은 수학이었고 50문제 각 2점씩 100점 만점이었다. 첫문제부터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1. 지수함수 f(x)=αx-m의 그래프와 그 역함수의 그래프가 두 점에서 만나고, 두 교점의 x좌표가 1과 3일 때, α+m의 값은? ① 2-√7 ②3 ③1+√8 ④5 '요즘 고등학생들 수준이 굉장히 높군‘ 그러나 두 번째 문제를 보고 영철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2. 1+2는? ① 3 ② 5 ③ 65 ④ 7 1번 문제같이 도무지 문제 뜻도 제대로 모를 문제와 2번 문제같이 코흘리개도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뒤 섞여 있었다. “10분 남았습니다. 아무튼 70점 이하면 각오해요” 10더하기 3은? 이라는 어이 없는 문제를 보면서 영철이 짓고 있던 미소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70점 이하면 각오하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 저 미친 여자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식은 땀이 영철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왔다. 뒤에서는 아직도 열손가락이 잘린 남자의 신음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영철은 우선 초등학교 수준도 안되는 문제들부터 풀기로 했다. 30문제가 넘어보였지만 모두 풀어 답안지에 답을 표시하기까지 불과 5분도 채 안 걸렸다. 하지만 나머지 문제는 영철의 능력을 한참 넘는 문제들이었다. 영철은 포기하고 전부 4항으로 답을 찍었다. 마지막 문제의 답을 표시하는 순간 시험 종료 벨이 울렸고 학생들은 처음과 같은 기민한 동작으로 시험지를 모두 앞으로 모았다. 여선생은 칠판 옆에 놓여진 책상에 걸터앉더니 서랍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내 답안지를 채점하기 시작했다. 채점 속도는 눈부시게 빨라 불과 1분만에 30여장의 답안지 채점이 모두 끝났고 여선생은 피곤하다는 기색도 없이 손을 툭툭 털고 답안지를 들고 일어나 교탁앞으로 왔다. “지금부터 점수를 부르겠어요.” 영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동혁 74점!” 한 학생이 자기 이름이 불리자마자 가방을 재빠르게 쌌다. 그리고 선생이나 급우들한테 한마디 인사도 없이 교실밖으로 달려나갔다. “김장희 86점!” 또 한 학생이 처음 학생과 마찬가지로 가방을 싸고 나갔다. “심국한 76점!” 또 다른 학생이 가방을 쌌다. 영철은 고개를 살짝 들어 창문밖을 바라보았다. 맨 먼저 가방을 싼 2명이 신나게 운동장을 가로 질러 교문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김호영 66점!” 영철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70점이 되지 않는 점수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66점을 받은 학생은 가방을 싸는 대신 그냥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얼굴엔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강문수 64점!” 70점이상의 행렬이 계속되더니 이제 60점대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70점이 안되면 각오하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조승구!“ 여선생의 목소리가 갑자기 하이톤으로 울렸다. 뒤에서 신음소리인지 대답소리인지 모르는 소리가 모기소리마냥 조그많게 들렸다. 잘린 10개의 손가락 마디에서 나오는 피로 입고 있는 잠바며 청바지가 피범벅이 된 남자의 목소리였다. “조승구 0점!” 여선생은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조승구라고 불린 사내는 어렵게 육중한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옆의 책상들과 부딪혀가며 앞으로 나왔다. “학생은 왜 백지를 냈죠?” 남자는 두손을 들어 보이며 사정하듯이 말했다. “보시다시피 손가락이 이렇게 없으니 도저히 쓸수 없더라구요.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여선생은 혀를 끌끌 찼다. “그 손에서 나는 핏물로도 얼마든지 답안지 체크가 가능했을텐데 그걸 몰랐단 말이에요? 학생은 정말 예나 지금이나 뭘 해볼려고 하는 의욕이 없는 것 같아요. 이리로 가까이 와봐요.” 남자는 겁먹은 표정으로 여선생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키는 여선생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정도로 컸다. 여선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금 더 가까이 오라고 했다.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여자는 그윽한 눈길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좀 숙여봐요” 남자가 엉거주춤 상체를 구부리자마자 여선생은 레슬링 선수처럼 재빨리 한손으로 남자의 머리통을 감더니 다른 손으로 뭔가를 들고 남자의 눈을 사정없이 찔렀다. 귀를 찢는 비명이 교실에 울려퍼졌다. 여선생은 뭔가를 남자의 눈에 더욱 깊숙이 찔러 넣더니 뺄때는 와인 코르크를 따듯이 돌리며 뺐다. 커다란 콤파스 바늘에 남자의 눈동자가 꽃인 채 그대로 딸려 나왔다. 여선생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힘줄이 대롱대롱 매달린 눈알을 콤파스에서 빼내어 아무렇게나 뒤로 던져 버린 다음 이번엔 왼쪽 눈을 푹 소리가 날 정도로 깊숙이 찔렀다. 영철은 더 이상 그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그러나 귀를 막아도 눈알이 콤파스 바늘에 찔렸다가 빠지는 소리와 남자의 비명소리는 그대로 망치처럼 귓전을 때렸다. 뒤이어 쿵 하고 남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영철은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제는 달아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어째서 저 남자는 저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고 만걸까? 영철은 주님의 이름을 애타게 마음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선생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답안지를 넘기며 점수를 부르고 있었다. “김영철!” 마침내 올것이 왔다. 영철은 계속 두눈을 질끈 감고 주님의 이름만 불렀다. “김영철 68점!” 김영철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점수 발표는 끝이 났다. 이제 교실에는 영철과 70점을 못넘은 일곱명 정도의 학생들, 그리고 콤파스를 한손에 쥔 미치광이 여선생과 열손가락이 짤리고 두눈이 파인 채 교탁옆에 쓰러져 있는 거구의 30대 사내만이 남았다. “선생님이 70점을 못 넘으면 각오하라고 했죠?” “예” 영철과 쓰러져 있는 남자를 제외하고 일곱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60점을 넘겨서 다행이에요.” 여선생은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발로 툭차며 말했다. “60점도 안되는 사람은 바로 이렇게 되죠. 어차피 이런 사람들은 사회 나가도 남한테 피해만 주는 쓰레기밖에 안되요. 그쵸?” 일곱명의 학생들은 또다시 동시에 ‘예’하고 대답했다. “60점대는 재시험을 보기로 했으니까 문수가 나와서 재시험지를 나눠주렴.” 영철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 시험을 그대로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여기 계속 있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영철은 심호흡을 했다. 기회를 봐서 자리에서 뛰쳐나가 문을 열고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리 자신의 동선을 머릿속에 그린 다음 여선생의 동태를 살폈다. 영철과 뒷문까지의 거리는 불과 10미터 남짓, 여선생과 영철의 거리는 15미터는 넘어보였다. 여선생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영철은 어떻게든 저 미치광이 여자와 같이 몸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지를 돌리는 학생이 여선생의 시선을 차단하는 순간 영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뒷문으로 뛰어갔다. 거의 3초도 안되는 시간에 뒷문을 열게 된 영철. 그러나 뒷문을 드르륵 열자 육중한 쇳덩어리가 영철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영철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문턱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영철은 뒷통수가 욱신거림을 느끼며 깨어났다. 어느샌가 자신은 앉아있던 걸상에 다시 앉혀져 있었다. “10분 남았습니다” 영철은 정신을 최대한 또렷이 하고 시험지를 펼쳤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처음 시험의 문제들과 똑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쉬운 문제들만 풀면 70점을 절대 넘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쉬운 문제들 답을 일단 적은 다음 난해한 문제들중 한문제만이라도 풀자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영철은 처음 시험때 어려운 문제들은 다 4번으로 찍었으니 이번에는 3번으로 통일해서 찍기로 결심했다. 또 아슬아슬 종이 울리기 직전 답안지를 다 채웠다. 남은 사람이 얼마 안되서 그런지 채점은 더욱 빨리 끝났다. 이번엔 첫 번 점수 발표 때와 달리 60점대와 70점대가 번갈아 호명되었다. 희비가 계속 엇갈리고 있을 때 드디어 영철 차례가 왔다. “김영철 68점!” 또 한문제 차이였다. “이번 재시험 문제는 쉽지 않을 거예요. 더욱 어려운 문제들로만 구성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푸세요. 빨리 집에 가고 싶으면.” 어벙벙한 상태에서 영철은 새로 받아든 시험지를 펼쳤다. 더욱 어려운 문제들이란 얘기는 거짓말이였다. 문제는 처음이나 두 번째나 세 번째인 지금이나 순서만 바뀌었을 뿐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영철은 뒷문을 살짝 바라다보았다. 이번에도 뭔가 지뢰 장치가 되있을 지 모른다. 영철은 시험지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배도 고프고 오줌이 마려웠지만 지금 그런것 따위에 신경 쓸때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꼭 70점을 넘기리라.’ 역시 이번에도 쉬운 문제부터 답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중 가장 만만한 문제를 찾다가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영철은 답안지에 자신이 정답을 쓴 문제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이럴수가!’ 영철은 혹시 잘못 세었나 싶어 다시 세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34개였다. 혹시나 해서 아직 풀지 않은 난해한 문제들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16개였다. 결국 영철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에서 각각 4번과 3번을 찍었던 16개의 문제들은 다 틀리고 쉬운 문제들만 다 맞추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번 16개 문제 정답중에서는 2번이나 1번이 있을 것이다’ 영철은 전부 1번으로 찍기로 했다. 처음에 4번, 그 다음에 3번을 찍었으니 이번에는 2번을 찍을 차례였지만 처음부터 앞 번호부터 찍었으면 70점을 넘겨 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강한 후회가 2번을 건너 뛰어 1번을 찍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답안지를 다 채웠는데도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영철은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 자리에 누워있었지만 가슴이 이따금씩 부풀어 오르는 걸 봐서는 아직 살아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 영철은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껴 옆쪽을 올려다 보았다. 여선생이 바로 영철옆에 서서 답안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밑에서 내려다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선생은 굉장히 커 보였다. 뭔가 코를 찌르는 향기가 났는데 병원에서 자주 맡는 포르말린 냄새와 거의 흡사했다. 처음 보았을 때 피부가 백옥같이 희다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화장을 굉장히 두껍게 했다. 영철은 여선생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여 시험지만 바라보는 척 했다. 여선생은 한번 하품을 하더니 다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교단쪽으로 걸어갔다. 점수발표가 다시 시작되었고 영철은 이번에는 분명히 70점을 넘기리라 확신했다. 이번에도 60점대와 70점대가 뒤섞여 불리워졌는데 영철앞에 불린 학생들 중 무려 5명이 70점을 넘기고 교실을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영철이 불릴 차례가 되었다. 영철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달려 나갈것인가, 아니면 나갈 자격을 획득한 사람답게 유유히 빠져나갈것인가, 대안들을 서로 저울질 하고 있었다. “김영철! 68점!” 영철은 팔다리뿐만 아니라 모든 오장육부의 힘이 싸그리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흐물흐물 걸상위에서 그냥 녹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지금 여선생은 나의 허를 찌른 것이다. 이제 게임은 끝났다. 16개 문제의 답은 이제 모두 2번이 확실하니 이번 시험은 분명 100점이다. 이번에는 나갈수 있다!’ 영철은 자기한테는 마지막 시험이나 다름없는 네 번째 시험의 동반자 2명을 바라보았다. 복도쪽 벽 맨 끝줄에 앞뒤로 붙어 앉은 학생들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둘이 얼굴이 서로 상당히 닮았다. 나간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과는 달리 이 학생들은 서로 잡담을 나누며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건영, 건수! 조용히 안할래!” 여선생이 쏘아보았지만 학생들은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왠일인지 여선생은 더 이상 혼내지 않았다. 영철이 다시 한번 보니 둘이 닮은 정도가 아니라 머리 모양만 약간 다를 뿐 얼굴 생김새며 몸짓이 완전히 똑같았다. 쌍둥이가 분명했다. “이번에는 문제가 상당히 어려울꺼에요.” 영철은 저 여자가 또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시험지를 받았다. 칠판 위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2시가 가까와오고 있었다. 여지껏 본 세 번의 시험들은 모두 시험지가 5장이었는데 이번 시험은 한 장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기며 시험지를 펼치는 순간 영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숫자와 기호, 도형으로 도배되었던 문제들이 싹 사라지고 오직 글로만 되어있는 문제들이 딱 다섯문제만 써 있었다. 영철은 과목이 바뀌었나 보다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첫 번째 문제를 읽어본 순간 영철은 비명을 질렀다. 쇼크에 혀가 다시 풀려 말을 할수 있게 된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영철은 숨가쁘게 다음 문제 또 다음 문제들을 읽어 내려갔다. 1. 1991년 10월 4일 밤 12시 10분에서 1시 5분사이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①집 ②오락실 ③학원 ④학교 지하 보일러실 2. 위 1번 문제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에 당신은 무얼 했습니까? ①밥을 먹고 있었다. ②공부를 하고 있었다. ③농구를 하던 중이었다. ④음악선생님 윤미래를 윤간하고 목졸라 살해했다. 3. 공범의 이름을 쓰시오. (주관식) ( ) 4. 넌 몇 명을 죽였지? ①1명 ②2명 ③3명 ④4명 막 5번 문제를 읽으려 할 때 여선생이 교탁뒤에서 문제지를 보지도 않고 또박또박 대신 문제를 읽어줬다. “5번, 너는 언제, 어떻게 뒈질까요?” “일, 천수를 다 채우고 안방에 누워 자식들 사이에서 편안히 뒈진다. 이, 열심히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 짓거리를 계속하다가 설교 도중 과로로 쓰러져 뒈진다. 삼, 물에 빠진 아기를 건지고 뒈진다. 사, 멍청하게도 원혼의 초대를 하느님이 부르시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다가 2007년 10월 4일 12시 결국 시험 점수 70점을 못넘기고 자로 열손가락이 짤리고 콤파스로 두 눈깔이 뽑힌 다음 대패로 얼굴가죽이 모두 벗겨진채 불에 타 뒈진다.” “오 주여!” 영철은 울부짖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선생이 소리쳤다. “앉아!” 영철은 절규하듯이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지?” 여선생은 비웃는 눈초리로 영철을 한동안 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손을 내려 두꺼운 화장이 벗겨진 얼굴을 보여줬을 때 영철은 다시 주님의 이름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여선생은 영철이 16년전 강간하고 살해한 음악선생 윤미래 바로 그녀였다. “한가지 약속하지. 그 문제를 다 풀고 70점을 넘긴다면 나는 사라지고 너는 여기를 털끗 하나 안 다치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60점대라고 해서 재시험이고 뭐고 없다. 70점이 안되면 넌 죽는다.” 영철이 그때 그 이후로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1991년 10월 4일 그 날은 영철의 삶을 돌이킬수 없는 방향으로 바꾸어버렸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고 어머니는 동네 건달과 눈이 맞아 도망가버리자 영철의 방황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양아치들과 어울려 술과 본드로 밤을 새기가 일쑤였고 결국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 작은 절도로 시작했던 범죄가 소매치기, 퍽치기, 강도, 강간 등으로 발전해나갔다. 급기야는 평소 침을 꿀꺽 삼키며 눈여겨 보았던 음악선생을 강간하기로 결심하고 적당한 기회를 노려 그동안 어울려 다니던 동네 불량배 한명과 함께 그녀를 지하 보일러실로 끌고가 윤간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살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디선가 경비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선생이 비명을 지르려 하자 당황해 목을 조른 것이다. 영철은 그 후로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독실한 크리스찬인 큰 고모가 교회로 같이 데리고 다니고서부터 마음의 안정을 서서히 찾게 되었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기도할 때 하느님이 너의 죄를 사하여주겠다는 약속을 하시자 그 크나큰 은혜를 갚고자 하느님의 영원한 종으로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바로 오늘이 17년전 바로 그날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자신이 분명 살해한 윤미래 선생님이 바로 저렇게 살아있다니..... 영철은 이것이 사탄의 시험인지, 하느님의 시험인지 알수가 없었다. 시험이 시작된지 10분 정도 흘렀을 쯤 윤미래 선생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남은 시간은 10분” 문제수가 적으니 주어진 시간도 적었다. 영철은 정신을 최대한 차리고 시험지를 보았다. 다시 봐도 문제 한글자 한글자가 송곳처럼 가슴을 찔러댔다. 1번과 2번, 4번 문제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공범의 이름을 쓰라는 것과 어떻게 죽을것인지를 물어보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필요했다. 공범의 이름은 지금은 까맣게 잊은 이름이다. 철 없던 시절 그냥 같이 재미로 어울려 다니던 놈이어서 이름 따위는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때의 그 기억은 애써 지우려던 기억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얼굴조차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5번의 당신은 어떻게 죽을까요라는 문제도 헷갈렸는데 4항의 70점을 넘기지 못해 손가락이 짤리고 눈이 찔려 죽는다는 답은 말 그대로 70점을 넘기지 못했을 때 당하는 죽음을 묘사해놓은 것일거라고 영철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70점을 반드시 넘긴다고 가정하고 1항에서 3항중 하나를 찍으면 맞을 것이다. 영철은 1항의 천수를 다 채우고 죽는다는 답에 마음이 쏠렸다. 그러나 마킹하기 직전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모두 다섯 문제이니 한문제당 20점, 70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최소한 네문제 이상을 맞춰야 한다. 5번 문제는 생각하지 말고 나머지 네문제중에서 하나라도 틀린다면 내가 5번답을 1항에서 3항중 아무거나 찍더라도 여선생은 70점을 넘기지 못했을 때 당하는 죽음, 즉 4항이 정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두문제를 틀렸기 때문에 정말로 그 답대로 죽게 된다. 5번답을 4항으로 찍어도 마찬가지다. 4항이 정답이 되는 순간 저 여자의 약속과는 상관 없이 나는 정말로 그렇게 죽어야 한다. 그러니 무조건 1번부터 4번까지를 모두 맞추고 5번답은 4항을 뺀 나머지 답을 적어야 한다. 결국 공범의 이름을 묻는 3번 주관식 문제가 관건이었다. 영철은 머리를 싸매고 공범 이름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성씨조차도 기억이 안났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도 시계바늘은 쉬지않고 돌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분. 영철의 목숨이 이 3분안에 달려있었다. 그때 영철의 눈에 교탁옆에 아직도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내가 들어왔다. 오늘 밤 여기 있었던 사람들중 영철과 함께 유일하게 여기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영철은 처음에 저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의 느낌을 되짚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그렇다! 바로 저 남자가 그때의 그 건달이다! 영철은 이번에는 여선생이 처음 성적발표할 때 불렀던 저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그 끔찍한 순간들 틈에 잠깐 불렸던 이름을 기억하기는 힘들었다. 시계는 정확히 1분을 남기고 있었다. 영철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교탁옆에 쓰러져 있는 박명훈은 죽었나요?” 윤미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 놈은 벌써 죽은지 오래야.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이 가슴이 부풀었다 마는건 내가 저 자식 입에다 쥐새끼들을 몇 마리 넣어놨거든. 쥐새끼들이 신이 나서 저 자식 내장들을 몽땅 다 뜯어먹고 있나봐. 호호” 영철은 진저리를 쳤다. “아참, 그리고 저놈 이름은 박명훈이 아냐, 조승구야 조승구. 아까 불렀던 걸 벌써 잊어버렸어?” 영철은 잊기 전에 답안지에 조승구라고 얼른 휘갈겨 썼다. 그리고 마지막 5번답은 1항을 적었다. 만약 5번답이 2항이나 3항이더라도 이제 걱정이 없었다. 1번부터 4번까지는 확실히 모두 맞췄다. 최소한 80점은 따놓았으니 5번답이 4항일리는 없었다. 영철은 주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며 답안지를 제출했다. 쌍둥이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답안지를 냈다. 채점은 단 10초만에 끝났다. “정건영, 정건수 둘다 100점!” 쌍둥이들이 와아 하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김영철” 점수를 부르는 순간이 1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60점!” “뭐? 그... 그럴리가! 아냐 그럴리 없어!” “60점이 맞는데?” “무슨 소리야! 난 분명 3번답을 맞췄어! 당신이 말한 조승구! 당신 옆에 쓰러진 저 남자. 저 남자가 그때 나랑 같이 있었던 자라구!” “호호. 그걸 잊을리 있나. 그래 맞아. 조승구. 내가 언제 그 답이 틀렸다고 했나?” “그렇다면 내가 틀린 답이 뭐야! 5번? 그래 그게 틀렸다고 해도 80점이야! 왜 60점이지?” 윤미래는 깔깔 대며 배를 잡고 웃었다. 100점을 받은 쌍둥이들도 가방 싸고 나갈 준비는 안하고 서로를 툭툭 치며 웃느라 바빴다. 영철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채 씩씩 대며 서 있었다. 윤미래는 너무 웃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1번부터 3번까지는 다 맞혔어. 하지만 4, 5번이 틀렸어.” “그럼 틀렸지” 쌍둥이들이 동시에 맞장구를 쳤다. “왜? 어째서? 4번.. 4번 문제는 내가 몇 명을 죽였느냐는 문제였는데 지금까지 실수로 당신 한명을 죽인게 전부였어! 전부였다구!”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거야. 호호. 그날 당신은 3명을 죽였어. 그때 지하 보일러실에서 너와 이 옆의 쓰레기한테 끔찍하게 윤간당하고 살해당할 때 나는 쌍둥이를 밴 몸이었거든. 그러니 정답은 3항의 3명이지.” “뭐? 뭐라고?” 쌍둥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영철옆으로 다가와 그의 등과 어깨를 먼지를 털어주듯이 툭툭 치며 깔깔 대고 웃었다. “만약 쌍둥이들을 낳았다면 올해 그때의 네놈과 똑같은 나이일텐데. 그래서 사실 진작에 너를 이리로 부르고 싶었지만 올해까지 참고 기다렸던 게지. 호호호” 쌍둥이들이 영철옆에서 서로 키를 대보고 있었다. 자기들이 영철보다 약간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자 좋아서 발을 굴러댔다. “그렇다면 기도할 때 이리로 가라고 한 게 당신이었단 말야?” “5번 문제에도 나와있을텐데. 아참 그리고 5번 답. 당신은 1번이라고 뻔뻔하게 써놓았지만 답은 당연히 4번. 그러니 당신은 3개를 맞췄고 2개를 틀렸어. 60점. 그래서 너는 4번처럼 열손가락이 잘리고 두 눈알이 뽑힌 다음 얼굴 가죽이 벗겨져 갈리고 불에 타 뒈져야지.” 어느새 양옆에 있는 쌍둥이들 손에는 사시미칼만큼 날카로운 날을 가진 30센티미터짜리 자와 콤파스, 공작용 대패가 들려 있었다. 영철은 쌍둥이들중 한명을 밀치고 뒷문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걸상을 하나 집어 머리 위로 올리고 뒷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위에 있던 양동이가 엎어지면서 물이 쏟아졌다. 걸상이 막아줬지만 걸상에 튀긴 물방울들이 손등에 떨어졌을 때 영철은 비명을 질러야 했다. 양동이를 가득 채웠던 것은 보통의 물이 아니라 강력한 염산이었다. 영철은 걸상을 뒤따라오는 쌍둥이들에게 집어 던지고 있는 힘껏 계단쪽으로 뛰어갔다. 복도는 그래도 희미한 형광등이나마 켜 있었는데 계단은 껌껌했다. 영철은 한번에 5,6계단씩 뛰어 내려갔다. 쌍둥이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4층, 3층, 2층, 이제 한 층만 더 내려가서 앞쪽으로 내달으면 거울을 지나 바로 정문이 나온다. 그런데 영철이 드디어 1층으로 내려와 문쪽으로 달려갔는데 쿵 소리와 함께 벽에 부닥쳤다. 쓰러진 영철은 머리에 피가 나는줄도 모르고 다시 일어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비췄다. 문쪽으로 나가는 짧은 복도는 온데 간데 없고 회색빛 시멘트 벽만 가로 막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을 둘러봤지만 복도가 통해야 할 곳이 다 벽으로 막혀 있었다. 라이터로 뒤쪽을 비추자 자기가 방금 내려왔던 계단과 지하로 통하는 계단만 보였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계단 뿐이었다. 다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영철은 이 학교 건물이 산비탈에 지어져 지하 2층에 바깥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쌍둥이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 2층까지 오자 바로 쪽문이 보였고 쪽문에 난 창을 통해 어슴푸레한 불빛이 들어왔다. 쪽문은 녹이 슬대로 슬어서 여는데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잠겨 있지는 않았다. ‘이제 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깥 밤바람의 찬 공기가 느껴지기는 커녕 후끈 더운 열기가 온 피부에 와 닿았다. 영철이 앞으로 몇걸음을 떼고나서야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이 그때 17년전 살인의 현장인 보일러실이었고 쪽문으로 보이던 불빛은 바깥의 불빛이 아닌 활활 타오르고 있는 보일러의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철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았다. “오 주여, 오 주여. 저의 죄를 사하여주소서. 불쌍한 저를 살려주옵소서.” 붉은색 이글거리는 보일러의 화염앞에서 영철의 간절한 기도소리는 계단을 내려오는 쌍둥이들의 미친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출처 웃대 - 십전제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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