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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김 차사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만큼 그에 관한 호기심도 강렬하다. 작가들은 호기심에 비례하는 시와 소설을 역사에 남겼고, 흰 가운을 입은 석, 박사들은 그들의 생을 죽음을 연구하는데 오롯이 태워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죽음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태초부터 오늘까지, 모든 생명의 어깨 위에 머물다 때가 되면 어깨에서 내려와 해야 할 일을 하고 떠날 뿐.
그러니 조금 전 한 남자의 생을 거두어간 저승사자가 불만을 품게 된 것은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인간들은 하나같이 왜 다 이 모양인 것인지… 오만하고 아둔하기 그지없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해가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휘황찬란한 도심. 그 불빛을 고스란히 받아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이 창백한 달처럼 드러난 두 남녀가 있다.
그들은 장례식장에서나 볼 법한 검은색 구두와 검은색 슈트, 그것도 모자라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있었지만, 지나치는 누구도 그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마치 누구의 눈에도 그들이 머물지 않는 것처럼.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 꼴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더이다.”
키가 큰 남자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굳게 말아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표정은 한 결 같이 굳어 있어서 기괴함을 자아냈다.
“선배님이 이토록 흥분하실 정도면, 그 작자도 생에 미련이 많았나 봅니다.”
“많다마다. 그는 천애 고아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 겪고 자수성가를 한 자였소.”
“그럼, 이제 살만하니 데려간다고 난리였나 보군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되지. 그자가 어찌 맨바닥에서 일어난 줄 아시오? 그래, 어린 시절에는 정말 갖은 고생을 다 했었지. 팔자가 그렇다보니 안 해본 일이 없었을 정도니까. 그런데 그가 얼마만큼의 종자돈으로 사업이랍시고 굴린 게 뭔지 아시오? 바로 대부업이오. 딴에는 적절한 셈으로 자산을 불렸다지만, 결국 고리대금업자였다는 말이지. 그런 자가 어찌 깨끗하게 삶을 살았겠소?”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런 것이야 전부 인간들 스스로 만든 규칙과 법 안에서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저 하늘과 땅의 율법에 맞게 그들을 인도하기만 하면 될 텐데요? 그가 따로 극심한 저항이라도 했답니까?”
“조용히 따라올 것 같이 굴더니 마지막에 난리를 피우더이다. 그래봤자, 인간이라서. 우리에게 무엇을 어찌하지는 못한다지만, 끽해야 소리나 지르고 발버둥치는 게 전부라지만, 그 작자는 그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 몸과 마음이 따로 놀 정도로 자신의 정신을 기만하고 있었단 말이겠지.”
“제가 아직 선배님보다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 작자의 미련 때문에 분개하신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덩치가 왜소한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중절모를 썼지만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탓에 여자의 눈과 표정은 남자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하나 숨기지 못한 채 모든 게 여자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건, 그 작자로 하여금 미련을 남게 만든 것이 화가 났던 게지. 천애고아로 자라 팔자에 배우자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는 이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주어진 운명을 걷어내고 새로이 업을 쌓았지. 글쎄, 그새 남의 딸을 키웠지 뭔가? 마치 정말 그게 자기 친딸마냥 말이야.”
“그럼, 수양딸이 눈에 밟혀서 고집을 부리더란 말입니까?”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저는 그 작자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결국 인간들은 인연과 물질에서 비롯된 욕망 때문에 망자가 되어서도 미련을 보이지 못하니까요.”
“그게 다른 사연들처럼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서 하는 말이야. 자네는 그 정도로만 알고 있게나. 오늘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군. 자네 말대로 우린 그저 하늘과 땅의 율법만 따르면 되는 법인데 말이야.”
남자가 몸을 돌렸다. 여자도 더 캐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되었습니다. 곧 옵니다.”
그들이 몸을 돌리고 시선을 둔 곳은 사거리 대로였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도심의 불빛은 여전히 휘황찬란했고, 길가에 늘어선 가로등 덕에 여전히 걸음을 옮기는 이들로 거리는 붐비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퍽.
브레이크 파열음과 충돌음이 밤거리의 평화를 깨트렸다.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정상 주행하는 차량과 어째서인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신호를 어기고 날아든 차량이 충돌했다. 직진으로 날아든 차량이 훨씬 큰 차량이라 좌회전을 하던 경차는 그 자리에서 쿠킹호일처럼 구겨지며 전복되고 말았다.
거리 위 모두의 시선이 사고 현장으로 쏠렸다. 아스팔트 위에 타버린 타이어 고무가 눌러 붙는 고약한 냄새가 거리를 가득 매웠다.
남자와 여자는 인파 속에서도 떠밀리지 않고 정확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경찰차나 구급차, 심지어 바로 옆에서 달려온 시민들보다도 빠르게 이미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나오시게들. 경황이 없겠지만 우리도 자세히 설명해줄 시간은 없다네.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를 따라오면서 듣게나. 자네들은 이미 현장에서 즉사하여 이생에 머물 수 없는 망자가 되었네. 아무리 애를 써도 육신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테니 괜한 짓들은 말게.”
육신에서 빠져나온 혼령들은 피가 흥건한 자신들의 육신을 확인하고서는 발악하기 시작했다. 온갖 욕설을 내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중절모를 눌러 쓴 남자와 여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혼령들끼리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 늘어져도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들 스스로 만든 규칙과 율법을 어겨서 벌어진 이번 사건에 어떤 감정도 없었다. 어떤 개입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불필요한 소란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되어야 미련이 덜 남을 테니 잠시 방치해둘 뿐이었다.
“조금 전에도 이렇게 관조했으면 그만이었던 일이었는데 말이야…”
이후로도 혼령들의 드잡이는 계속되었다. 구급차가 육신을 걷어가고, 경찰차가 사건 현장을 기록하고, 파손된 차량들이 다 치워진 후에나 혼령들은 마지못한 듯 저승사자들을 따라 나섰다.
-
인간이 인간들의 관점에서 만든 인간의 법을 어겼다하여 그게 고스란히 저승의 율법에 적용되거나, 천계의 율법에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하늘과 땅의 율법에 따라, 신들의 관점에 따라, 인간들에게 벌과 상이 내려졌다.
그래서 저승 입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란은 항상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사기를 당한 건 저인데, 왜 제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그럼, 제게 사기를 친 자는 벌을 받기는 합니까?”
“저는 그저 장사치라서 이윤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라의 법을 어긴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과한 금액을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뇨?”
“제 딸에게 몹쓸 짓을 한 것들에게 딱 그만큼 되갚아줬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서는 그 형벌도 채우고 나왔습니다. 그래도 아직 저의 죄가 무거운 겁니까? 그럼, 혹시 제 딸을 괴롭힌 것들은 무슨 벌을 받나요? 저승의 법이라는 게 인간 세상보다도 형편성이 없는 겁니까?”
망자들은 염라대왕을 만나기 전부터 하소연을 길게 늘어놓는데, 누구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이가 없다. 모든 죄는 그저 염라대왕 앞에 놓인 업경대(業鏡臺)를 통해 밝혀질 것이기에, 저승의 일꾼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를 않았고, 입이 있어도 정확히 필요한 말만을 할 뿐이었다.
염라대왕 역시 지극히 사무적으로 업경대를 통해서 본 것으로만 죄를 판단하였고, 어떤 사사로운 감정도 이입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모든 말들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관점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들이 충과 효를 말하고, 재물의 공정한 나눔과 탐욕에 관해서 말하고, 연인 간의 사랑과 의리에 관해서 말하고, 심지어 폐륜을 말한다 하여도 염라대왕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200년간 조용히 근속하던 저승사자 하나가 감히 염라대왕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다.
“늘 업무가 과중하여 일분일초가 다급하거늘, 그대는 무슨 일로 짐을 찾아왔는가?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중요한 일이어야 할 테야.”
“신(臣), 김 차사가 아뢰옵니다. 제가 최근에 망자 하나를 데려왔는데, 그 자의 죄는 인간들의 법으로 보기에도 크게 거스른 게 없고, 업경대를 통해서 보아도 그 죄의 무게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그의 죄가 그리 가볍지 않다고 생각되며, 그의 오만함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째서냐? 그대는 어째서 짐의 업경대를 불신하느냐?”
“감히 제가 업경대를 불신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급변하는 인간 세상에 비해 우리의 기준은 늘 한결 같았던 지라 얼마간의 보충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 말씀을 올립니다.”
“그럼, 말이나 들어보자꾸나. 허나, 네 말에 근거가 부족하여 온전치 못하다 판단이 된다면, 네겐 감히 저승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든 죄를 묻도록 하겠다.”
김 차사는 허리를 숙여 길게 읍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망자는 살아서는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이룬 자입니다. 그 자가 셈법을 어찌하였든, 인간 세상에서 고리대금업이란 건 결국 타인의 미래를 갉아먹으며 성장하는 업이라는 걸 대왕께서도 익히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그래서 짐은 악랄한 업자들에겐 감히 인간 주제에 다른 인간의 성장가능성을 앗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내리지.”
“옳으십니다. 그 자는 그간 다른 자들과 잣대가 달랐다 하지만, 결국 감히 인간 주제에 다른 인간의 운명을 재단하려 들었던 건 큰 죄악이라 생각됩니다.”
“네가 어떤 망자를 말하는지 이제 알겠구나. 그렇지만, 그 망자가 그 부분을 명확히 인정하고 죄를 달게 받겠다고 시인한 것도 사실이지. 헌데, 그 망자와 관련된 판결이 이미 닷새 전에 이루어졌다는 건 알고 있느냐? 판결을 번복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 무게를 정녕 제대로 아느냐고 묻는 게다.”
“네, 정확히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신은 판결을 번복하자고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있을 판결을 위해서입니다.”
“그럼, 내 판결에서 부족함이 무엇이더냐?”
염라대왕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란 것이 생겼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건 분명 분노의 감정을 담은 작은 주름. 그 주름의 움직임이었다.
“망자는 스스로 판관이 되어 타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 인간의 딸을 담보로 설정하여 자신이 양육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비였던 한 인간의 삶이 달라졌고, 딸의 인생 역시 변하였습니다. 그 둘은 이미 태어났을 적에 부여받은 팔자를 바꾸어 이곳에서 그들의 수명을 파악하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금전은 모두 인간들이 스스로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일 뿐, 그게 하늘과 땅의 이치에 맞닿은 것은 아닙니다. 헌데, 그는 고작 몇 푼의 금전으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른 게 아니겠습니까? 이는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분명 그는 그런 죄를 지었지. 헌데, 원래 주어졌던 팔자란 걸 제대로 들여다봤느냐? 딸은 열넷이 되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팔자고, 그 아비가 된 자는 딸을 팔아 부지한 생을 또 허투루 허비하고 그 역시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팔자다. 헌데, 감히 스스로 율법을 행하는 자를 흉내 내기는 했어도 그런 인간들의 팔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꾼 건 결과적으로 원죄에서 일부를 덜어낼 만큼의 무게는 된다고 본다.”
“신(臣)은 바로 그 부분이 염려되옵니다. 그 망자는, 그리고 그 망자를 비롯해 몇몇은, 자신들이 감히 판관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 기준에 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판결을 무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판결이 얼마간의 율법을 어기더라도 그건 마땅히 지켜야할 것을 지키기 위해 과정이라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런 오만으로 다른 인간들의 미래를 재단하고, 그들의 팔자를 바꾸고, 업을 바꾸는 것은 중죄이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런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로 금전을 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앞으로 금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주변 천지가 요동치더니 염라대왕의 몸집이 순식간에 커져서 이승의 문턱까지 이를 정도가 되었다.
“내가 분명 네가 말한 부분들을 충분히 고려하였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럼, 자네는 진심으로 죄를 뉘우친 자의 형량을 줄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냐? 영혼들이 이승에서 겪었을 불행의 무게를 줄여준 자에게 중죄의 무게를 그대로 적용해야 된다는 것이냐? 아니, 그 이전에, 네가 문제시하는 그 한낱 금덩이가 인간들 문명을 이룬 근간이라는 것은 잊었느냐?”
염라대왕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지옥 전체를 울렸지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김 차사 역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신(臣)은 그 망자가 죽음 앞에서 허물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늘과 땅의 율법을 어긴 자가, 스스로 판관인 척 타인의 생을 주무른 자가, 마지막 순간에 제 바짓가랑이 붙잡고 용서를 빌며, 생에 미련을 보였던 건 그자 손으로 직접 키운 수양딸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그건 정상적인 아비와 딸의 관계, 그런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애증이 있었습니다만, 동시에 그는 분명 마음 한편으로 수양딸을 타인에게서 압류한 자신의 자산으로 셈하고 있었습니다.”
“짐도 보았느니라. 알겠는가? 자네가 본 건, 나도 이미 다 보았다는 말일세.”
“그렇다면, 대왕께서는 인간들이 감히 한낱 금덩어리로 인간이 인간을 평하고, 인간이 인간의 미래를 재단하고, 인간이 하늘과 땅이 정한 가치를 뒤바꾸어 버리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어이가 없군.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분명 평소와 같은 무게로 그의 죄를 추에 올렸다. 다만, 그가 세상을 위해 노력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네놈은 자꾸 그의 인생 전체를 평가절하 하려고 하지만, 짐은 공명정대하였다고 자부하느니라.”
저승의 하늘 전체가 염라대왕의 얼굴이 되어 개미처럼 엎드려 있는 김 차사 하나를 향해 맹렬한 기운을 내뿜었다. 감 차사는 대꾸할 힘조차 잃었는지 엎드린 채로도 겨우겨우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이게 대체 몇 백 년만의 일이더냐? 제대로 시간 낭비를 했군! 네놈을 이대로 무간지옥에 보내버릴까 싶지만, 짐은 결코 감정에 휩싸여 판결을 가벼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분간 네놈의 지위를 박탈하겠다. 내 명이 다시 있을 때까지 유배지에서 근신하도록 하라.”
말을 마친 염라대왕은 서둘러 그의 처벌을 기다리는 망자들에게로 향했다. 김 차사는 겨우 몸을 일으켜 중절모를 벗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김 차사의 얼굴은 짐짓 인간의 얼굴마냥 복잡한 표정으로 구겨져 있었다.
-
“선배님, 제가 왔습니다.”
“하필, 네가 담당이로구나.”
벌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김 차사를 찾아온 이는 일전에 대화를 나누었던 덩치 작은 여자 차사였다.
“대왕님의 명이 따로 있을 때까지 유배지에서 근신하시라는 명입니다. 유배지는… 인간계입니다.”
“예상대로군. 그럼, 어서 가세나, 길이 멀지 않은가.”
“대왕님을 알현하셨을 때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처럼 업무에 확실하신 분이 왜 열을 내며 대왕님의 판결에 의문을 표했는지를 말이죠. 우린 율법대로만 하면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러게, 나도 대체 이게 무슨 바람인 줄 모르겠구나. 어디서부터 나의 심사가 틀어진 것인지를… 아니, 언제부터 대왕님의 판결에서 인간들의 사정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 것인지를… 전혀 모르겠어.”
김 차사는, 아니, 파직되어 유배지로 향하고 있는 김 아무개는, 말과는 달리 여전히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다듬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많을 말들을, 다듬고, 벼리면서.
김 아무개가 먼 길을 맨발로 걸어 어느덧 인간 세계의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 김 아무개는 그제야 후배를 향해 한숨을 내뱉듯 말을 꺼내었다.
“결국은 인간들의 돈이 문제인 겐가? 그리고 이제는 그게 내 문제가 된 것이고… 이보게, 나를 묶은 오랏줄을 풀면 바로 배고픔과 추위가 찾아들 테니 조금만 천천히 해주시겠나? 말이 유배지지, 이곳이 지옥보다 더한 곳이거늘…”
김 아무개의 바람대로 후배는 천천히 오랏줄을 풀어주었다. 앞으로 벌을 받을 시간이 몇 년, 몇 십 year, 몇 백 년이 될지 전혀 모른 채로.
출처 | 어제 드라마 도깨비 봤더니 괜히 저승사자가 당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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