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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 한 번 더
06.
직업이 아니라 돈이 사람의 얼굴을 만든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얼굴에 잡히는 눈가의 주름은 서비스직이라는 직업 때문에 생긴 것일지 몰라도 얼굴 전체가 풍기는 이질감은 바로 돈이 조각한 것이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닌 얼굴. 짐짓 냉정하게 보여도 빈틈이 보이는 얼굴. 모두 돈의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 돈 때문에 얼굴에 빛을 잃은 사람 한 명이 더 있다.
“참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급해서 저를 찾아왔으면서 급한 불을 끄고 나서는 저를 멀리하거든요. 제가 강제로 찾아다니면서 제발 제 돈을 빌려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현탁 씨, 제가 고리대금업자입니까? 제가 무리하게 독촉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법정 최고 이자율을 초과한 적도 없고, 그만큼을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금융권보다 고작 2% 더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상황 어렵다하시니 한 달을 더 기다려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현탁이란 사람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조아린 채 엎드려 있었다. 얼굴은 눈물과 땀, 콧물로 범벅이 되어 차마 못 봐줄 정도였다. 반면, 맞은편의 남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표정 하나 없어서 마치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의 얼굴처럼 보일 정도였다.
“담보설정도 제가 먼저 제시한 게 아닙니다. 현탁 씨가 먼저 가진 게 그것뿐이라고 하셨고, 전 분명 처음에 거절했었죠. 사람이 사람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건 이치에 어긋나 보인다고요. 그래도 제가 사정을 하며 끝내 고집을 부렸던 건 현탁 씨입니다. 제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일어나세요. 왜 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몇 달 전, 현탁은 남자에게 딸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일천만 원. 당시 현탁에겐 빛줄기와도 같은 돈이었지만, 딸을 대신하기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어떻게 일천만 원으로 자신의 생살 같은 자식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한 번만! 딱 한 달!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제, 제발 부탁… 드립니다.”
현탁은 개처럼 남자의 구두에 뺨을 비볐다. 바짓가랑이를 비비는 것으로 자신이 얼마나 간절히 빌고 있는지를 보였다. 그렇지만 남자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현탁 씨는 끝끝내 은혜를 내려준 사람을 천하의 죄인으로 만드시는 군요. 안되겠습니다.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죠. 지금부터 담보권을 실행하겠습니다.”
남자가 등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사내들이 몰려나와 현탁을 제지했다.
“김 팀장이 가서 데려오세요. 이제 곧 하교할 시간일 테니 사람들 보는 눈은 많을 겁니다. 그래도 굽히지 말고 당당히 데려오세요. 원칙대로 하시라는 겁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남의 돈을 쉽게 생각하지 않죠. 보세요, 저 사람도 결국 자기 그릇도 모른 채 남의 돈을 우습게 봐서 이렇게 된 겁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세단에 몸을 실었다. 남자는 그렇게 그날의 일과를 마쳤다.
-
현탁의 딸, 혜미는 갑자기 찾아온 검은 정장의 낯선 아저씨를 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남자와 김 팀장은 소란을 염려했었지만,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걱정이었다.
“안녕, 삼촌.”
혜미가 먼저 김 팀장의 손을 잡았다. 초등학생이라지만 고학년이었기에, 낯선 사람의 존재에 대해 분명 인식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천연덕스러웠다. 어쩌면 영악한 이 꼬마는 사고뭉치 아빠 덕에 어렴풋이 언젠가는 누가 찾아와도 올 것이란 걸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김 팀장과 무리들은 조용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반면에, 소란스러운 건 아빠인 현탁 쪽이었다. 현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했다. 자신의 딸이 어딘가로 팔려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주먹을 휘두르고, 온갖 집기를 내던지며 난동을 피웠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은 김 팀장의 무전을 받고 나서야 그런 현탁을 자리에 버려두고 떠났다. 무전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그저 현탁을 제압해두기만 했을 뿐,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검은 무리들 중 일부는 이곳저곳에 타박상과 생채기를 안아야했다.
-
김 팀장으로부터 집행이 일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남자는 망설이고 있었다. 확실히 나이 어린 딸아이를 담보로 설정한다는 건 그의 스타일과 전혀 맞지 않았다. 평소대로였다면, 현탁의 장기를 받는 정도로 마무리했을 일이다.
그런데 굳이 딸을 담보로 잡아달라고 했던 건 현탁 쪽이었다. 덕분에 남자는 평소에는 하지 않던 고민을 하게 되었다.
‘돈을 벌려다 오히려 돈만 깨먹게 생겼군.’
마음을 굳힌 남자는 몇 군데 전화를 돌렸다. 남자는 얼굴도 직접 대면하지 않은 혜미의 친부(親父)가 아니었기에, 필요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제가 정식 후견인이 될까 합니다. 아이가 지내는 건 제 집에서 지내게 하고요. 그렇지만, 제가 친부는 또 아니니까. 네, 네, 그렇죠. 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몇 통의 전화로 서류 작업은 어쨌든 마무리 될 것이다. 남은 문제는 정신이 글러먹은 혜미의 아비, 현탁이다. 그리고 당장 이곳에 도착할 혜미다.
아, 애들에겐 사춘기라는 게 있지 않았나?
후회하기엔 늦었다. 남자의 원칙대로.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으려고 수를 쓰기보단 책임을 져야 하니까.
-
남자의 걱정과 달리 혜미는 빠르게 적응했다. 낯선 어른에게 대뜸 ‘삼촌’이라고 먼저 말을 했을 정도로 영악했던 아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적응이 느린 건 오히려 남자였다. 평생 혼자서 살아온 남자가 누군가를 한 지붕 아래 둔다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상대라는 건 채무자로부터 받은 담보 설정. 나이 어린 혜미를 배려하여 말 못할 사연으로 묻어두고 있으려니 그것도 여간 갑갑한 일이 아니다.
‘눈치를 채고 있는 것과 내가 말을 뱉어서 사실로 만드는 건 완전 다른 일이니까.’
그 순간에도 남자는 고민이 많았다. 당장에는 식비만 조금 더 들어가는 정도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까? 이대로 간다면, 현탁에게 빌려줬던 일천만 원도 공중에서 사라지고, 마땅히 받았어야할 이자도 사라지고, 오히려 양육비로 몇 천만 원이 계속 들어가기만 할 터였다.
“혜미는 혹시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어? 뭐, 장래 직업 같은 거 말이야. 생각해 본 게 있어?”
“글쎄요? 뭐, 어차피 미래에는 로봇이랑 AI가 다 할 텐데, 제가 비빌 수나 있을까요?”
“뭐, 틀린 말도 아니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 혜미는 너무나 간단히 대꾸해버렸다.
“저보다 아저씨는 괜찮겠어요?”
“내가? 뭐가?”
“하시는 일요. 로봇하고 비벼볼 만해요?”
시체 같았던 남자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후훗,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다행히 아저씨는 괜찮단다.”
“다행이네요.”
“음, 아무래도 내 직업은 쉽게 사라질 직업은 아니라서.”
“아니오, 음식이요. 아저씨 일은 이미 괜찮은 것 같다니 다행이고. 음식이 제 입에 맞아서 다행이라고요. 아니었으면, 앞으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남자의 얼굴에 생긴 균열이 조금 더 벌어졌다. 그렇게 혜미는 조금씩, 조금씩, 남자의 얼굴에, 그의 삶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구김 없이.
-
혜미가 구김 없이 자라난 것과 달리 남자의 얼굴에는 점점 세월이 묻어나기 시작해 얼굴 곳곳에 크고 작은 주름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표정 없이 살아온 남자지만, 혜미 덕에 뒤늦게 얻은 표정들로 인해 그의 주름은 일반인들의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둘이 함께한 시간이 십여 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고맙구나.”
“갑자기요?”
“그래, 갑자기 생각나서.”
“그런데 뭐가요?”
“한 번도 네 부모의 이야길 하질 않았으니까.”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엄마는 제가 기억도 못할 나이에 떠나셨고, 아빠는 늘 초조한 모습이었죠. 뭔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늘 위태위태했죠. 그래서 김 팀장 아저씨 처음 봤을 때, 바로 느낌으로 알 수 있었어요. 아, 아빠가 드디어 사고를 쳤구나. 뭐, 이후로 안보고 싶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저씨 덕에 이렇게 넓은 집에서 살 수 있었으니까.”
“보고 싶지 않니?”
“…이젠 제가 떠날 때가 되었나요?”
역시 혜미는 눈치가 빨랐다. 덕분에 남자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그게 크게 기쁘지는 않았다.
“스무 살이 되면 바로 내보낼까 했지만, 요즘 세상에 그건 좀 무리일 것 같아서 더 기다렸다. 현탁 씨에게도 더 시간이 필요했었고. 현탁 씨를 자리 잡게 하는 그 과정이 좀 힘들기는 했다. 어쨌든 네 아빠는 요즘 성실하게 일을 하는 중이야. 돌아가도 지금과 생활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야.”
남자는 왜 자신의 심장이 뜨거워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장 눈앞의 혜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게 된 건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혜미는 자신에게 필요이상으로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럼, 우리 아빠는… 살아있었던 건가요?”
“맞아, 현탁 씨는 살아있었어. 다만, 네가 죽은 줄 알았지. 더 정확히는 어딘가로 팔려간 줄로만 알았지.”
“혹시 그게… 아저씨 때문인가요?”
“맞아. 다 나 때문이야.”
남자는 이전처럼 단단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잘라낼 인연은 빠르게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상처도 깊지 않고, 덧나지 않는다. 그게 남자의 원칙이었다. 그렇지만, 혜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없었고, 솟아오르는 말을 멈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두 다리는 정확히 땅을 딛고 있었고, 허리는 꼿꼿했다. 시선을 남자에게서 거둘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좋은 일이구나. 축하한다.”
“저는… 아저씨에게 인사시킬 생각이었어요. 아저씨가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 사람과 결혼도 그려볼 생각이었어요.”
“아니다, 난 네 아비도 아니고. 넌 스무 살이 넘었다. 뭐, 난 네 선택을 존중한다. 아마 괜찮은 사람이겠지.”
“…그랬군요.”
그게 둘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 남자가 타인들의 눈에 목격된 마지막 순간이었다.
-
혜미가 남자의 집을 떠나고 사흘도 지나지 않아 남자는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남자를 찾아온 저승사자는 젊은 시절의 남자만큼 굳은 얼굴이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때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 쉽군. 이제부터 자네 이름을 세 번 부르겠네.”
“잠시만요!”
남자가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다렸다더니… 미련이 있는가?”
남자는 혜미가 떠올랐다. 혜미가 소개해주고 싶다던 사람의 모습도 궁금해졌다. 아니, 사실은 매우 궁금해도 억지로 참고 있었지만, 더는 갑갑해서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결혼 같은 걸 함부로 꺼내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이다. 그 나이 때 사랑은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심지어 남자도 실패를 거듭하지 않았던가?
“제게 며칠만 더 시간을 주실 수는 없을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네 명이 다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런데 자네는 내게 명을 구걸하는군.”
남자가 엎드린 채 저승사자의 바짓가랑이를 비볐다.
“인간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내게 비는 것일까? 왜 내게 용서를 구하나? 그냥 자연의 섭리대로 자네의 명이 다했을 뿐이라네. 내겐 어떤 권한도 없어. 나도 원칙대로 주어진 일을 할 뿐이야.”
“제발, 제발! 이렇게 빕니다, 제발!”
저승사자는 냉혹했다. 굳은 얼굴로 남자의 이름을 천천히 세 번 불렀다. 남자의 혼이 빠져나와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까지 늘 굳어있기만 했던 남자의 얼굴은 혼이 되어서야 절망으로 잔뜩 굳어질 수 있었다.
“혜미야!”
단발마로 삐져나온 그 이름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침실은, 그의 집은, 그 남자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으니까.
출처 | 빠빠 먹으러 나가는 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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