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r></div> <div>3공수 소속 계엄군 5·18재단에 털어놔.."관이 없어 가마니를 덮어 묻었다"</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신분증이 있으면 가슴 위에 얹었다. 관이 없으니 가마니를 덮어서 묻었다"</span></div> <div><br></div> <div>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옛 광주교도소에 주둔했던 3공수여단 15대대 부사관 출신 김모씨는 지난 22일 5·18기념재단 관계자와 현장을 둘러보며 37년간 간직해온 기억을 털어놨다.</div> <div><br></div> <div>김씨는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1980년 5월 21일에 전남대 퇴각 명령을 받고 호남고속도로가 바라보이는 교도소 서쪽에 배치됐다.</div> <div><br></div> <div>그는 "부대원과 함께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을 향해 총을 쏘았고, 멈춰선 차 안에서 시신을 수습했다"고 5·18재단에 증언했다.</div> <div><br></div> <div>김씨는 "암매장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방치된 시신에서 악취가 나니까 묻었다"고 재단 측에 전했다.</div> <div><br></div> <div>그러면서 "5·18이 끝나고 나서 이곳에 처음으로 왔다"며 "모든 걸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고 털어놨다.</div> <div><br></div> <div>그의 증언처럼 옛 교도소에서는 계엄군에게 연행당한 시민뿐만 아니라 전남 담양에서 광주 도심을 오가던 여러 시민이 계엄군 총격에 살해당했다.</div> <div><br></div> <div>당시 3공수 5개 대대 병력은 교도소로 퇴각하면서 전남대에 연행한 시민 수십 명을 끌고 갔고, 초과 인원이 탑승한 차량 적재함을 밀폐한 채 CS최루분말가스를 터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div> <div><br></div> <div>적재함에서 밀려 나오는 시민은 대검으로 찌르면서 욱여넣었다. 차량이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 6명이 숨져 있었다.</div> <div><br></div> <div>재단이 최근 입수한 '12·12 및 5·18 사건' 검찰 진술조서에는 '전남대에서 교도소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3명을 포함해 12구의 시체를 매장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div> <div><br></div> <div>관련 진술을 한 1980년 당시 3공수 본부소속 김모 소령은 암매장 시점을 '5월 23일 오후 6시부터 약 2시간'이라고 검찰에서 밝히며 약도까지 그렸다.</div> <div><br></div> <div>재단은 이와 비슷한 시민 제보도 최근 입수했다.</div> <div><br></div> <div>1980년 5월 교도소에 수용됐던 최모씨는 "1급 모범수로 생활하며 매일 저녁 6∼7시 모포를 털거나 빨래를 걷었다"며 "어느 날 이 시간 교도소 담장 밖에서 굴착기가 작업하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div> <div><br></div> <div>최씨가 지목한 작업 현장은 김 소령이 '시신 12구를 묻었다'고 검찰에 남긴 약도 속 장소와도 일치한다.</div> <div><br></div> <div>23일 5·18재단에 따르면 광주교도소 재소자들이 과거 농장으로 일궜던 해당 장소에서 오는 30일 발굴이 시작된다.</div> <div><br></div> <div>재단은 5·18 항쟁 기간에 100명이 넘는 중환자가 치료받았다는 교도소 진료기록을 토대로 많은 수가 암매장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div> <div><br></div> <div>광주 북구 문흥동에 자리한 옛 교도소는 2015년까지 죄수를 수용했던 법무부 보안시설이다.</div> <div><br></div> <div>5·18 재단이 항쟁 후 최초로 시도하는 옛 교도소 발굴을 통해 37년 전 사라진 사람들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div> <div><br></div> <div><br></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