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명단) 작성과 관리에 연루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이 사건의 공범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법조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문화·예술계의 좌파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고 우파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라’고 국정 기조를 제시한 것은 헌법과 법률 위반이 아니고, 김 전 실장이 구체적으로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것은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란 판단은 모순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31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문에서 “박 전 대통령은 보수주의를 표방해 당선됐고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국민들을 그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문화·예술계 지원사업과 관련해 ‘좌파에 대한 지원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확대’를 표방한 것 자체가 헌법이나 법령에 위반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재판부의 판결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의 행위는 헌법 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면서 김 전 실장 등에게는 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설명한 탓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전 실장에 대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범행은 정치권력의 기호에 따라 지원금 지급을 차별함으로써 헌법과 문화기본법이 보장하고 있는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정치권력의 기호에 따른 지원배제는 건전한 비판을 담은 창작활동을 제약할 수도 있어서 검열을 금지하고 있는 헌법의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유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김준우 사무차장은 “헌법상 양심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 이유가 없는 차별을 받았다면 그 자체가 헌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이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구별하고 이에 따른 차별적 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취지로 판시한 것은 국민의 대표자인 대통령의 헌법적 지위와 의무 자체를 몰각한 판결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며 “좌파와 우파 등을 손쉽게 재단할 수 있다는 인식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반면 이번 판결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표방’과 ‘구체적 실행’의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한 조직의 리더가 부하들에게 ‘어떻게 좀 해봐’라는 식의 추상적인 지시를 한 것과 부하들이 그 일을 실행하면서 위법한 행위를 한 것은 법률적인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국정기조로 ‘좌파 지원축소 및 우파 지원확대’를 표방한 것일 뿐 구체적으로 범법행위를 하라는 지시까지는 하지 않았다면 위법이 아니라는 논리다. 오히려 김 전 실장이 해당 지시를 실행하면서 합리적인 차등을 둔 지원책 등의 적법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위법한 행위를 한 것이 문제가 된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문예지 지원문제, 보조금 집행, 종북 성향 서적의 도서관 비치문제 등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런 지시가 위법·부당한 방법으로 특정 문화·예술계 개인 및 단체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는 범행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이 지나치게 법리에 치중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블랙리스트’ 사건의 핵심은 결국 박 전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고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일련의 행위를 승인했는지 여부”라며 “재판부가 관련 증거 등에 대해 너무 엄격한 판단을 내려 모순된 결론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